TV 속 아들의 ‘발연기’ 그래도 눈물 났던 이유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30] ‘지식채널e’에 나온 제규
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일반고에서 홀로 외롭지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요리하듯 자신의 삶을 요리하는 소년.’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는 날 받은 생활기록부. 제규의 담임 윤용호 선생님은 행동특성과 종합의견에 이렇게 썼다. 나는 몇 번이고 읽어봤다. 제규가 ‘자신의 삶을 요리하는 소년’이 될 줄 몰랐다. 입학했을 때는 보충수업과 야자를 너무나 싫어하는 학생일 뿐이었다. 2015년 5월 20일, 두 달 반 동안 원치 않는 공부를 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정규 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 하고 싶어요.”
설득력이 1도 없는 기이한 이유, 윤용호 선생님은 그러라고 했다. 다음 날부터 제규는 본격적으로 밥을 했다. 저녁밥 하러 들어오는 아빠한테 “나 혼자서 하고 싶어요”라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저녁마다 부엌을 독차지하고서 식구들 밥을 했다. 친구들도 데려와서 갖가지 음식을 해 먹였다. 어느 날부터는 혼자 일어나서 아침밥을 챙겨먹고 학교에 간다.
날마다 ‘밥이나’ 하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재미있어 보였다. 대학입시라는 궤도에 진입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겠다는 모습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이라는 기록을 시작했다. 제규가 “밥하기 싫어졌어”라는 말을 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생각이었다.
글을 읽은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서 말을 걸어왔다. 어떤 이는 “요리하려면 최소 전문대는 다녀야 하고, 영어도 꼭 공부해야 한다”는 당부를 했다. “대한민국에 실존하는 가족이 맞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야자를 하고 있다는 고등학생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낸 제규가 부럽다”고도 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얘기해줬다”는 교사도 있었다.
서울에 있는 방송사의 몇몇 작가들이 촬영 제의를 해 왔다. 밥을 하는 일반고 남학생은 카메라에 담기 좋은 소재일 수 있다. 제규는 “하기 싫은데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전했다. 어떤 작가는 제규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교무실에까지 전화를 했다. 좋아하는 유느님(유재석)이 나오는 프로였지만, 우리 모자는 거절했다.
올해 5월,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전에 나는 아버지 글을 몇 편 쓴 적 있다. 당신이 위중한 병에 걸린 걸 안 날에도 어머니에게 밥을 차려준 아버지, 나쁜 일도 “허허” 웃던 아버지를 촬영하고 싶다는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멀라고 그런 것을 찍는다고 난리를 피겄어”라고 했다. 문득,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영상 기록으로 남아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꿈을 갖고 살라고 하면서, 막상 그 꿈도 사회의 가치로 재단해버리는 걸 많이 봅니다. 제규 군과 가족 이야기는 유쾌하기도 하고, 성적이나 입시 위주의 언론 기사들 속에서 숨 쉴 공기를 주는 것 같거든요.”
7월 초순, <지식채널e>의 정은영 작가는 메일을 보내왔다. 남편과 제규에게 보여주었다. 남편은 “그 프로라면 괜찮지 않아?”라고 했다. 학교 수업시간에 <지식채널e>를 많이 본 제규는 “알려지는 게 싫어요”라고 했다. 의견이 다를 때는 토론해야 한다. 그러나 배고프면 날카로워져서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다. 우리는 저녁밥부터 먹었다.
“제규야, 밥 하는 거 창피해?”
“그건 아닌데요. 나보다 요리 잘 하는 애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예요?”
“조리고등학교 학생들은 당연히 잘 하지. 근데 너처럼 식구들 먹게 밥 하는 애는 드물 걸?”
“엄마, 나는 <지식채널e>에 나올 만한 애가 아니에요. 하나도 안 대단하다고요.”
<지식채널e> 제작진은 제규의 음식솜씨를 눈여겨 본 걸까. 입시공부 바깥으로 걸어 나온 자세를 본 걸 거다.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불안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와 해보고 싶다고 진짜로 밥 하는 모습에서 멋짐을 본 걸 거다. 어쩌면, 제규는 시대를 조금 앞서 걷는 소년일 수 있다. 언젠가는 출신과 성적으로만 사람을 평가하지 않겠지.
마침내 제규는 “(카메라 와서) 찍으면 떨릴 거 같아요”라고 했다. 승낙한 거다. “싫다네요”라는 메일을 받을 줄 알았던 정은영 작가는 기쁘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미혼의 젊은이는 모르겠지만, 아줌마들은 미화된 사진만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규 엄마는 절대 화면에 안 나오는 걸로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7월 29일, <지식채널e>의 권혁민 조연출과 정은영 작가가 우리 집에 왔다. 사전인터뷰였다. 제규는 청소년 특유의 ‘서술어가 뭉개지는 웅얼웅얼 말투’를 썼다. 처음에는 내가 중간에서 통역을 했다. 제작진은 제규가 만든 샌드위치를 먹고, 자칭 보물 1호라는 제규의 레시피 노트를 봤다. 단골 정육점에도 함께 갔다. 가게 사장님은 제작진의 질문에 답했다.
“(제규를 가리키며) 여기 자주 오는 총각이여. 학생이라는디 음식을 하드만요. 근디 이 총각 텔레비에 나오면 좋은 대학 간가? 좋은 디(직장) 취직한다면야, 촬영에 응해줘야지.”
정육점에서 나와서는 제규가 다니는 집 앞의 시장까지 답사했다. 권혁민 조연출과 정은영 작가는 “촬영하는 날에 친구 데려올 수 있어요?”라고 제규한테 물었다. 말이 없었다. 뜸들이다가 입을 연 제규, 다시 서술어를 뭉개며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있대요”라고 통역을 했다. ‘엄마가 대신 말 잘 했지?’ 하는 마음으로 제규를 봤다. 어? 표정이 서늘했다.
제작진이 서울로 가자마자 제규는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라고 했다. 그 말은 아직 대화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교복 바지가 뜯어진 것도, 카풀 버스를 놓친 것도, 단골 가게에서 맘에 드는 닭 가슴살을 못 산 것도, 생협에서 좋아하는 바게트 빵을 못 산 것도, 머리 삭발할 때 끝까지 말리지 않은 것도, “다 엄마 때문이야”라고 하니까.
“엄마가 쓴 글하고 사진으로만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정육점이랑 시장까지 카메라가 따라와서 촬영한다잖아요. 그러면 나는 이다음에 어떻게 장 보러 다녀요? 부담스럽다고요!”
남편은 ‘신스틸러’급 연기를 선보였다. “억지로 할 필요 없어”라고 진실하게 말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면서. 제규는 “할게요”라고 했다. 하루 지나서는 “안 해요”라고 했다. 다음날에는 또 “할게요”. 제규는 자신이 요리를 잘 한다고 확신하지 못 했다(경연대회가 아니라고!). 촬영하는 것도 두려워했다(‘유느님’도 카메라 울렁증이 있다고!). 남편이 중재안을 냈다.
“네가 요리하는 거를, 아빠가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지식채널e>에 보낼까?”
나는 우리 집 상황을 정은영 작가에게 중계했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솥, 음식이 끓는 냄비, 1년 넘게 쓴 레시피 노트만 찍겠다고 했다. 모델이 되어준다면, 요리하는 제규 뒤태나 손 정도는 촬영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제규는 된다고 했다. 메뉴도 정했다. 마늘간장치킨, 가지 요리,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카프레제 샐러드.
8월 8일 오전 8시 57분, “저희 지금 집으로 올라가도 돼요?”라는 전화가 왔다. 정은영 작가, 권혁민 조연출, 안상민 카메라 감독, 운전기사 선생님은 짐을 많이 갖고 왔다. 모두 카메라였다. 제규는 웃지 않았다. 긴장해서 그랬을 거다. 알아들을 수 없게 서술어를 뭉개며 말하지도 않았다. 촬영에 임하는 자세가 돼 있다는 뜻이겠지.
“제규군, 모든 요리는 두 번씩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촬영 끝나는 시간은 오후 6시쯤으로 잡고 있거든요. 조금 더 늦어지기도 해요.”
안상민 카메라 감독이 제규한테 말했다. 순간, ‘망했다’고 생각했다. 전날 밤에 제규를 다독이면서 “금방 끝날 거야”라고 했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 하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저절로 제규 눈치를 살폈다. 거실에서는 부엌에 있는 제규 뒷모습만 보였다. 등짝으로도 화났다는 걸 표현하는 청소년의 뒤태, 순해보였다. 양파를 썰고, 가지 속을 파내고 있었다.
“엄마 같으면 안 떨려요? 처음에는 긴장해서 양파를 엉망으로 썰었어. 가지 구이 하려면 토마토 소스를 만들어야 하거든요. 색감이 예쁘라고 일부러 ‘토마토 홀’을 썼어요.”
제규는 가지 구이, 카프레제 샐러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만들었다. 냄새가 좋았다. 누군가 “마늘 빵 찍어먹으면 맛있겠다”고 했다. 제규는 즉석에서 마늘빵을 만들었다. 접시에 담고 남은 음식은 조금씩 시식했다. ‘서울 사람들’인 제작진이 “맛있다”고 했다. 그 말은 제규 몸으로 흡수되어 ‘슈퍼울트라파워’가 되었다. 설거지 마치고 잠깐 제 방으로 간 제규는 웃었다. 걸그룹 트와이스 멤버 ‘사나’의 동영상 덕분인가?
남편은 점심시간도 아닌데 밥 차린다고 집에 왔다. 촬영하는 부엌 근처에는 다가가지 못 했다. 나한테만 작은 소리로 자신의 근심을 털어놓았다. “우리 아들인지 모르겠다. 얼굴 한 컷이라도 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해 봐”라고. 여섯 살짜리 아들이 있는 안상민 카메라 감독은 우리 부부 마음을 알고도 남겠지. “얼굴 나와요. 걱정 마세요”라며 웃었다.
점심 먹고 나서, 제규는 우유에 재어둔 닭 가슴살로 마늘간장치킨을 만들었다. 연두부 요리도 하나 하고, 다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했다. 촬영용 음식은 다 됐다. 권혁민 조연출과 안상민 감독만 식탁에 남았다. 촬영한 걸 잠깐 봤는데 꺄아! 접시에 놓인 음식들이 달라보였다. 연기를 하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제규랑 나는 눈을 마주쳤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촬영은 이내 제규의 일상생활로 넘어갔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는 건 제규가 카메라를 의식하는 바람에 NG를 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하는 건 ‘발연기’만으로도 충분하단다. 그래서 안상민 감독은 걸어 다니는 제규 다리만 촬영했다. 학교 가는 모습, 하교해서 집으로 오는 모습, 레시피 노트 쓰는 것 등을 찍었다. 집안 촬영은 끝났다.
9월 6일 오후 12시 40분, 우리 부부는 밥도 굶고 <지식채널e - 소년의 레시피>편을 보았다. “나를 찍은 거 자체가 말이 안 돼. (웃음) 그래도 기대 돼요”라고 말했던 제규가 나왔다. 우리 집 부엌에서 음식을 했다.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제규와 담임선생님, 친구, 고모, 이모가 한 말은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이라는 글을 통해 세상으로 나간 거였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1년 반 동안 내가 쓴 글을 5분으로 압축한 제작진의 천재성에 감탄해서만은 아니다. 혼자 가고 있는 제규가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본 다른 이들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대견하다"고 했다. 그런 관점들이 쌓이며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에게 대학입시 말고도 다른 길이 열리겠지. 밥 하는 제규 이야기는 완전 시시해지고.
나중에는 별 볼 일 없어질 ‘소년의 레시피’. 그러니까 지금들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