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 세계의 ‘혁명’, 우리는 반띵 안 해요!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44] ‘우리문방구’ 김진태·홍지웅
생계곤란, 진태씨가 입대하지 못한 이유다. 그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한신대학교 신학과에 다녔다. 친구 지웅씨와 동반입대 하려고 휴학했다. 그러나 친구만 혼자 훈련소로 갔다. 그의 집안에는 이렇다 할 재산이 없었다. 통장에 돈이 들고 난 흔적도 없었다. 빚은 많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병환 중이었다.
“한신대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교회에서도 많이 도와주고, 알바도 하고요. 중간에 군대 가려고 1년 휴학했다가 못 가고, 스물다섯 살에 졸업했어요. 근데 신학교 졸업장을 가지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마침 공인중개사 하는 후배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짜리 가게가 있대요. ‘형, 요리 좋아하니까 음식점 해 봐’ 그러는 거예요.”
진태씨는 인터넷으로 ‘돈가스 카페’에 가입 했다. 모르고 살았던 고수들을 차례차례 알아갔다. 돈가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돈가스의 본고장인 일본에 다녀오고, 전주 리베라 호텔 주방장이었던 송호성 셰프는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진태씨가 찾아가서 처지를 말하자 재료 고르는 법과 돈가스의 기본 조리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햇살론대출’을 받아서 군산시 나운 1동에 ‘돈가스 친구들’을 차렸다. 군산 시내 전역에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다. 진태씨는 주방장과 배달을 겸했다. 결혼한 누나가 와서 주문전화를 받아주었다. 군산의 끄트머리인 구암동에서 주문전화가 와도 “놀면 뭐 해. 하나라도 더 팔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배달 오토바이를 탔다.
“3년간 가게 하면서 오토바이 사고가 두 번 났어요. 기다리는 손님들은 오히려 저를 걱정해 주셨어요. 저는 얼른 가게로 가서 다시 돈가스를 튀겨서 퀵(배달)으로 보내 드렸죠. 5-6년 전에는 배달 돈가스 가게가 별로 없었거든요. 맛있는 데는 더 없었고요. (웃음) 우리 집 돈가스는 맛있었죠. 나중에는 아버지 어머니도 가게 일을 도와주셨어요.”
진태씨는 ‘교회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게 하면서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전북 CBS 방송국에서 열린 CCM(복음성가) 경연대회, 본선 무대까지 오른 그는 어머니 아버지를 초대했다. “대상! 김.진.태.” 이름이 불린 순간, 진태씨는 부모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서 본 얼굴 중에 가장 환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진짜 효도는 무엇일까. 그는 ‘부모님한테 5만 원·10만 원 드리는 게 효도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효도인가’를 생각했다. 돈가스 가게도 자리 잡았으니까 노래하고 사는 것에 마음이 쏠렸다.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부모님에게 “제 대신 가게를 이어서 해주시면, 저는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10대 후반에 죽고 싶은 적 있었거든요. 사는 게 힘들어서요. 그때 노래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찬양사역자(교회 노래) 하려고 한신대를 간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분들은 다 목사라는 직함을 갖고서 가수를 하셨거든요. 저처럼, 소망 없이 사는 ‘수많은 김진태들’한테 희망을 주려고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었어요. 신학대학원 공부도 큰 도움이 됐고요.”
한편, 진태씨와 동반입대 신청했다가 혼자만 군대에 갔던 지웅씨는 제대하고 한국영상대학교에 복학했다. 졸업하고는 <찾아라 맛있는 TV> 조연출로 일했다. 귀한 경험이었지만 서울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고향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던 어머니가 아팠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늘 밤늦게까지 일을 하니까 외동인 지웅씨는 군산으로 내려왔다.
지웅씨는 방송통신위원회(미래창조과학부) 전주지소에 바로 취직했다. 공중파 방송사나 중계유선사업자들의 편성·광고에 대한 관리를 했다. 2년 만에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 그러나 1년 뒤에는 전남 나주로 발령이 났다. 군산에서는 출·퇴근이 불가능한 곳이라서 한 지역유선방송의 본사로 이직했다. 거기서 1년을 일하고 나와서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지웅아, 철길마을에서 아이스크림 가게 같이 하자.”
지난해 봄에 진태씨가 말했다. 둘 다 처음 맞는 서른 살 여름, 아이스크림 장사도 처음이었다. 진태씨와 지웅씨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합쳐도 천만 원이 안됐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먹어보고 한눈에 반한 땅콩 아이스크림에 우도 생 막걸리를 넣은 아이스크림도 만들었다. 먹어본 사람마다 “대박!”이라고 감탄했다.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한여름이니까, 관광객들은 차가운 에이드나 음료수를 찾더라고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입안이 더 텁텁하다는 생각을 못 했죠. 한 달 지나서 매출을 계산해 봤는데 마이너스 15만 원인 거예요. 진태는 노래 공연을 다니니까 버는 돈이 있었어요. 많지는 않거든요. 근데 그 돈을 갈라서 저한테 주더라고요. (웃음) 용돈 하라고요.”
진태씨와 지웅씨는 곧바로 에이드 원액을 100만 원 어치 샀다. 그러나 단속 나온 시청 공무원은 그 자리에서 음료를 팔면 식품위생법 위반이라고 했다. 두 친구는 철길마을에 오는 관광객들의 연령대를 연구하고는 추억의 장난감이나 과자를 들여와 팔기 시작했다. 가게는 옛날 문방구처럼 꾸몄다. 햇볕은 따습고 바람은 선선한 가을, 주말마다 장사가 잘 됐다.
행운은 떼를 지어 왔다. CCM (복음성가) 아티스트 강찬씨가, 진태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앨범에 담자는 제안을 해왔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곡을 주고, 녹음 작업할 때는 악기 세션도 해 주었다. 2015년 9월, 진태씨는 생애 첫 정규앨범을 2000장 찍었다. 그 중에 절반은 순조롭게 판매 되었다. 그는 가수협회에 등록된 ‘가수 김진태’가 되었다.
지난해 12월, 출근한 진태씨를 맞은 건 포클레인. 진태씨와 지웅씨의 가게를 부수고 있었다. 그들이 월세로 든 가게는 불법건축물, 여러 번 계고장이 오긴 했다. 그걸 본 건물 주인이 “괜찮아, 아무 일 없어”라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두 친구에게 서른 살 겨울은 막막하고 추웠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주말마다 테이블 하나짜리 좌판을 벌였다.
“겨울이라 평일 손님이 없었어요. 그래서 황금 엿 틀을 십여 개 샀어요. 집에서 하나하나 만들어 봤죠. 인터넷 검색을 해도 설탕 엿 만드는 건 안 나오니까 사탕 만드는 것처럼 해 봤어요. 물, 물엿, 백설탕, 흑설탕이 들어가는데 몇 대 몇으로, 얼마나 끓여야 하는지 몰라서 실패를 많이 했어요. 끓인 설탕을 언제 틀에 부었다가 떼어내야 하는지도 모르니까요.
서른이나 된 놈이, 집에서 엿이나 만들고 있으니까 부모님이 처량하게 쳐다보시죠. 다행히도 엿 만들기는 성공했어요. 겨울에 그걸로 먹고 살았어요. 옛날에 할아버지들이 그런 것처럼 번호판을 만들어서 뽑는 거였거든요. 옷을 다섯 겹씩 입고 장사를 하는데 춥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그랬어요. 올해 2월에는 지금 이 가게로 들어왔고요.”
진태씨와 지웅씨의 ‘우리문방구’는 약 4평, 월세는 40만 원이다. 내년 2월에 재계약할 때, 얼마만큼 오를지 가늠할 수 없다. 가게 바닥에 아트 타일을 깔고 싶어도 참는 이유다. 광주에 있는 ‘1913송정역시장’은 청년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5년간 월세를 최대 9% 이상 올리지 않겠다는 상생협약을 맺었다는데... 철길마을에는 아직 그런 기미가 없다.
생각보다 월세가 더 오르면, 두 친구가 감당할 몫이 커진다. 그러나 진태씨와 지웅씨는 코딱지 만한 문방구가 좋다. 젊은 부모가 종이 인형을 가리키며 “엄마도 어렸을 때, 이거 가지고 놀았어” 라고 말하는 걸 듣는 게 좋다. 가게 손님들에게 명산동 쌈지공원도 알려준다. 소설 <탁류>의 주인공 초봉이가 살던 동네. 금강도, 군산도 한 눈에 보인다면서 추천한다.
평일에 철길마을은 한산하다. 여행자들의 발길은 뜸하다. 인근의 구암초등학교, 경포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몇 백 원짜리 ‘불량식품’을 사러 온다. 두 사람이 일 할 필요는 없다. 가게가 좁으니까 허리만 살짝 비틀어도 서너 명의 손님을 상대할 수 있다. 그런데 진태씨와 지웅씨는 함께 출·퇴근 한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저희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거든요. 20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