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원형탈모... 아들은 굴을 튀겼다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⑰ 게임 아이템 살 세뱃돈으로 요리한 아들
남편에게 진지한 질문을 할 때나 제굴이와 꽃차남이 잘못한 걸 고자질 할 때, 따지고 싶은 일이 있거나 놀려먹고 싶을 때, 나는 남편을 ‘강동지’라고 부른다. 생채를 만들던 남편이 간 좀 봐 달라고 할 때도 “강동지! 나한테 너무 의지하는 거 아니야?” 라고 대꾸한다. 그러니까 나는 ‘강동지’라는 호칭을 ‘여보’와 동급으로 쓴다.
“강동지! 내가 누구 때문에 수산리(시댁)에 와 있어? 전 부치고 설거지 하면 다냐? 왜 친구 만나러 가서 새벽에 들어 오냐고? 나중에 만나도 되잖아!”
어느 명절, 새색시였던 나는 시댁 옆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남편에게 따졌다. 옛일이다. 지금은 그런 일로 발끈하지 않는다. 아들 둘의 아빠가 된 남편이 날짜를 짚으며 “명절 힘들어”라고 하면, 나는 맞장구를 친다. 돈도 많이 들고, 화장실(나는 화장실을 많이 가림) 가는 것도 힘들고. 음식까지 할 줄 모르니까 너무 미안하다면서.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명절 걱정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꽃차남은 “뭐가 힘들어? 한복 입고 놀기만 하면 되는데”란다. 제굴은 중학생 때부터 명절 연휴 첫날에는 친구들이랑 피(시)방 가고, 영화 보고, 쏘다니다가 저녁밥 먹을 때에 왔다. 용돈도 두 배로 많아진 고등학생, 제굴에게 명절 전야는 명실상부한 지상낙원이었다. 지난 추석까지만.
“제굴아. 이번 설에는 너도 같이 수산리 가자. 아빠 좀 도와 줘.”
“싫어요. 영화 볼 거예요.”
“심부름 좀 해 줘. 커서 요리하겠다는 사람이 그 정도는 해야지.”
“밥하잖아요. 엄마가 좋아하는 샐러드도 만들고요. (나를 보며) 엄마, 나 안 가도 되지요?”
무릇 집안의 절대 권력은 부엌에서 나오는 법. 제굴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말로는 안 가겠다고 하면서도 스마트폰 충전기를 챙겼다. 자동차로 20분 만에 도착하는 시댁.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도 막 와서 생선 찌는 거야”라고 말하는 형님이 있었다. 그 전에 큰시누이는 제사 음식 장을 다 보고, 간장게장을 담가 놓고, 방앗간에 가서 떡도 해 놓았다.
남편은 전을 부쳤다. 제굴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할아버지와 아빠가 시키는 심부름을 했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내가 이따가 온다고 했잖아요. (사촌)누나들도 안 왔는데...”라고 불평했다. 음식 장만을 지휘하며 같이 했던 아버지는 넓적다리뼈가 부러져서 3개월 만에 퇴원했다. 올해는 조금만 할 거라는 당신의 막내아들에게 “부족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댁에서 세 끼를 먹었다. 설 전날 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님 부부와 조카 셋, 그리고 우리 식구 넷이 먹었다. 설거지는 남편이 했다. 설날 아침에는 친척들이 많이 와서 제사 지내고 밥을 먹었다. 아주버님이 상을 걷고 설거지는 남편이 했다. 낮에는 큰시누이와 큰조카네 식구 넷, 작은조카네 식구 셋이 왔다. 설거지는 남편이 했다.
친정에 가서도 세 끼를 먹었다. 엄마 아빠와 우리 식구 넷, 그리고 동생 지현네 부부. 남편은 ‘밥걱정의 노예’ 신분에서 풀려났다. 밥을 먹고 나면, 제굴이랑 작은 방에 가서 스마트폰으로 장기를 두거나 텔레비전을 봤다. “새끼들한테 해 줄 것이 있가니? 보일러나 틀어 놔야제”라는 장인어른 덕분에 남편은 덥다고 창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나와 동생 지현은 친정 동네를 산책했다. 아침 먹고는 엄마와 함께 친정 아파트 뒷산에 있는 ‘인의산 둘레길’을 걸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체육시설이 있었다. 운동 트레이너처럼 절도 있게 근육운동을 하던 엄마는 “오메! 우리 사우(사위)들 배 고프겠씨야” 라면서 혼자 앞서 가 버렸다. 지현과 나는 돌담이 있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배지영! 제굴아! 내 머
리 속 좀 봐봐.”
낮밥 먹고 난 뒤에 남편이 작은 방에서 말했다. 돌아앉은 남편의 뒤통수 머리를 들춰 본 순간, 가슴이 쿵! 나는 남편을 ‘백 허그’ 하고 말았다. 흰머리 많이 났다고 보라고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떻게 해!”라는 말이 그냥 나왔다.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원형탈모였다. 남편도 나흘 전에 미용실 가서 알았다고 했다.
“아빠! 왜 그래요? 뭐 때문에 그래요?”
“스트레스 때문에 그래. 너랑 꽃차남이랑 하도 싸우니까 아빠가 힘들어서.”
2월 9일 저녁,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처자식 먹일 밥상을 차리고는 일하러 나갔다. 하루에 10회 이상 동생과 싸우며 체력 단련을 하는 제굴은 고요했다. 친구 성헌이의 전화를 받고는 정중하게 “엄마, 나갔다 와도 돼요?” 라고 물었다. 성헌이는 제굴에게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엄마한테 만들어드리고 싶다면서.
제굴과 성헌은 재료를 사러 동네 마트에 갔다. 꼭 사야 할 파마산 치즈가루가 없었다. 둘은 20분간 걸어서 대형 마트에 갔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신기한 식재료가 아주 많은 곳. 대형마트에 안 다니는 제굴은 ‘여기서 물건 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토마토 퓨레와 발사믹 크림, 파마산 치즈가루를 사고 말았다. 게임 아이템 사야 할 세뱃돈으로.
“그날 밤에 엄마랑 아빠랑 나랑 텔레비전 봤잖아요. 어떤 사람이 굴튀김 만드는 거 보면서 아빠가 ‘맛있겠다’고 했어요. 나도 만들어보고 싶었고요. 사실 나는 아빠한테 원형탈모 온 거 보니까 너무 슬펐어요. 그런 건 스트레스 때문이잖아요. 집에서 아빠가 힘든 일은 나랑 꽃차남이랑 싸우는 것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안 싸워요. 결심했어요.”
2월 10일 아침, 제굴은 아침에 놀러 나가면서 “아빠! 바빠도 저녁밥 드시러 집에 오세요. 맛있는 것 해 놓을게요.”라고 했다. 남편은 오후 6시도 안 됐는데 집으로 왔다. 친구들이랑 놀던 제굴은 석류, 레몬, 굴, 치즈, 우유를 또 세뱃돈으로 사 왔다. 같이 놀던 친구 주형이한테 “우리 집 가자. 밥 해 줄게”라면서 데리고 왔다.
제굴은 토마토 퓨레를 써서 토마토 파스타 소스를 만들었다. “유레카!” 목욕하다가 왕관의 무게 재는 법을 알아낸 아르키메데스처럼 흥분했다. “우와! 이거 쓰니까 훨씬 맛있어”하며 기뻐했다. 주방보조가 되어 채소를 씻던 주형은 덤덤했다. 제굴은 다시 평온한 자세로 토마토와 치즈를 썰어서 샐러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전날 본 굴튀김을 했다.
“생굴에 후추랑 소금을 조금 뿌려서 밑간을 해요. 밀가루, 달걀 물, 파슬리 가루를 섞은 빵가루를 접시 세 개에 따로 준비하고요. 생굴을 거기에 차례대로 묻혀요. 그때 나무젓가락에 튀김옷이 좀 묻거든요. 그걸 살살살 긁어서 기름에 넣어요. 그게 온도계에요. 튀김옷을 기름에 넣고 가열하잖아요? 튀김 옷 주변에 거품이 생기면, 180℃ 정도 된 거예요.”
나는 마음이 바빴다. 남편은 밥상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항상 “뭐 볼 게 있다고 그래!”라고 한다. 원형탈모가 생긴 남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줘야 한다. 제굴이가 차린 밥상을 몇 컷만 후딱 찍고 밥을 먹었다.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많이 먹어본 주형은 굴튀김이 맛있긴 한데 “아직까지는 (제굴) 아빠 밥이 더 맛있어요”라고 했다.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부엌을 정리하는 것도 제굴 일. 남편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나는 약초로 만든 발모 스프레이를 남편 뒤통수에 뿌려주었다. 톡톡톡 두드렸다. 남편은 “봐봐. 머리카락 좀 나?”라고 물었다. 음하하하! 나는 노안이 오지 않은, 남편보다 네 살이나 젊은 아내. 뚫어져라 봤다. 휑한 자리에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돋아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