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디서 오래 살아본 적이 없어요. 태어나서 가장 오래 산 곳이 군산이에요. 근 10년간 실거주지로 살고 있어요.”
종배씨는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에 부모님은 이혼했다. 어린 종배는 할머니가 살고 있는 경기도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생이 된 그는 어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강릉으로 갔다. 이 사춘기 소년은 우연히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흑인 가수 ‘MC 해머’를 봤다.
“우와!”하며 감탄했다. 소년은 ‘MC 해머’ 생각만 했다. 머리에 잔상으로 남은 춤을 따라했다. 그가 열다섯 살 때부터 브레이크 댄스를 춘 이유다. 따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배울 수 있는 학원도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소년에게 꼭 들어맞는 말. 거리에서 춤추는 형들과 가까워졌다. 그이들은 서울 이태원까지 가서 춤을 배워왔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그냥 춤이 좋아서 춘 거예요.”
스물한 살, 강릉에서 비보이로 활동하던 종배씨는 서울로 갔다. 한 레코드사의 전속댄서로 발탁이 됐으니까. 여섯 명이 함께 지내는 숙소는 어느 빌라의 지하. 소속사에서는 일주일에 쌀 10kg과 달걀 한 판만 지원해줬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고 했다. 종배씨와 동료들은 끓는 물에 조미료와 달걀을 풀어서 국을 끓여 먹었다.
다들 “춤을 출 수 있는 게 어디야?”라고 했다. 결국 숙소에는 종배씨 혼자 남았다. 가수 박진영씨의 친구인 오해성씨가 종배씨에게 춤 출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그래서 백댄서가 된 종배씨. 그룹 지오디의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와 양현양하의 ‘춤이 뭐길래’의 뮤직비디오에 나왔다. 연습하면서 컵라면, 우유, 초코바를 먹는 게 포식이었다.
“연습실 나와서 삼촌이랑 이모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도 춤을 포기 안 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강릉으로 갔어요. 비보이만 하려고요. 지금은 버스킹 문화(길거리 공연)가 자연스럽지만 그때는 장판 한 장 들고 나와서 공연하면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항의도 많이 했어요. 경인방송의 ‘댄스불패’ 프로그램 피디가 요청해서 텔레비전 출연도 했어요.”
2002년, 군에서 제대한 종배씨는 어머니가 이사해서 살고 있는 군산으로 왔다. 모든 것이 낯선 도시였지만 춤추는 젊은이들을 금방 알게 됐다. 종배씨는 그이들과 팀을 만들었다. YMCA 정건희 선생님이 연습공간을 내어주었다. 국회에서 청년문화의 장을 여는 행사를 할 때, 국회의사당에서 비보이 춤을 춘 사람은 종배씨. 우리나라 최초였다.
오로지 춤만 알던 삶. 그는 군산 제일중학교에서 춤을 가르치는 방과후 강사로도 일했다. 정식으로 출연료를 받는 공연도 많아졌다. 종배씨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연습실 겸 스튜디오를 차렸다. 독립된 공간에서 팀원들과 연습하고, 땀 흘려 만든 춤을 무대 위에 올리는 일. 살 것 같았다. 그러나 벅찬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습하려면 팀원들 밥을 먹여야 하잖아요. 수입보다 지출이 커졌어요. 안 되겠더라고요. 친동생처럼 지내는 신우한테 ‘네가 애들 좀 가르치고 있어라’ 하고는 저는 서울과 청주를 오가면서 활동했어요. 근데 신우도 나중에 다른 팀의 제안을 받아서 가게 됐어요. 제가 다시 왔죠. 팀원이 많이 빠져서 공연은 다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끝나고 돈을 정산해야 하는데 누군가 공연비 나오는 통장이랑 옷을 들고 가 버렸어요. 춤을 딱 놓게 됐죠.”
그 뒤에 종배씨 삶 속으로 치고 들어온 것은 그래피티. 어릴 때부터 만화 그리기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미군들이 자주 오는 군산의 한 클럽에 다녔다. 힙합문화와도 통하는 그래피티를 그곳에서 처음 봤다. 종배씨는 벽에 그림을 그리는 미군을 붙잡고 노트를 내밀었다. “A부터 Z까지 써 주세요”라고 했다. 그는 수 없이 글자를 따라 써 봤다.
2006년, 종배씨는 군산 서해대학 광고디자인과에 진학했다. 춤추던 시절부터 공연 섭외와 디자인까지 담당했던 그는 대학에서 하는 공부가 새롭지 않았다. 그동안 몸으로 깨치며 배운 것들을 몇 백만 원 들여서 다시 배우는 셈이었다. 종배씨는 한 학기 다니고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부족한 것은 혼자 배우기로 했다.
“저는 ‘커스텀’을 했어요. 모자나 티셔츠, 자동차나 트럭에 소장하고 싶은 그림을 그려주는 거예요. 관광버스에 그려진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도 커스텀이에요. 그걸로 돈을 벌고 있는데 서울의 한 극장에서 ‘스카이워크’라는 작품의 (디자인) 디렉터로 일해 달래요. 근데 공연 끝나고 돈을 못 받았어요. 다른 공연들도 해주고 못 받고요. 노동부에 신고했죠. 그래도 힘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가요. 그러면서 가진 돈마저 다 까먹었어요.”
종배씨는 아버지가 사는 강원도 횡성으로 가서 유리온실 일을 도왔다. 가슴에서 불덩이가 꿈틀대는 것 같아서 6개월 만에 군산으로 돌아왔다. 그때 사귄 여자친구가 지금의 아내 혜영씨. 두 사람은 일터를 찾아 서울로 갔다가 광주로 이사했다.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일용직 잡부, 중국집 배달원, 퀵 배달원, 유리창 닦이를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래피티스트 이종배씨.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종배씨는 조선대학교 미대 조우현 교수의 작품을 담양 죽녹원에 옮겨 그렸다. 비보이 팝핀현준의 건물에도 그림을 그렸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을 돌며 일했다. 2년 전 5월에는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리는 충장로 행사에서 광주항쟁 판화작품을 합판 벽에 옮겨서 그렸다.
“광주에서 전세 아파트도 얻고, 아기도 낳고, 잘 살고 있었어요. 근데 저한테 친동생 같은 후배 신우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길 가다가도 막 눈물이 났어요. 마음 둘 데가 없어서 저희 동네 강가에 있는 벽에다가 신우를 그렸어요. 고인의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래피티 문화 중 하나거든요. 저는 신우 어머니도 아들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군산사람들이 모이는 한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어요. 그림을 무료로 그려 주겠다고요. 대신에 제 동생을 추모할 수 있는 벽을 좀 내달라고 했죠. 우리가 은파에서 춤 공연을 많이 했는데 거기에 있는 ‘구름공방’ 카페에서 답을 주셨어요. 저는 카페 주인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고 나서 신우를 그렸어요. 어머니랑 친구들이 볼 수 있게요.”
그래피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남의 것을 파괴하면서 희열을 얻는 쪽과 거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쪽. 종배씨가 처음 스프레이를 잡고 그래피티를 할 때는 원래 있던 것들을 덮어버리는 그림을 그렸다. 홍대에서는 그래피티 하는 사람끼리 기 싸움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딸 소율이의 아빠로 살면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으려고 한다.
“신우 보내고는 그림 그리고서 꼭 슬로건을 써요.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을 사랑하며 살자고요. 그래피티 하면서 저도 누군가에게 희망과 사랑을 주는 거예요. 원래 그래피티에는 매력이 많아요. 첫 번째가 속도죠. 스프레이로 하니까 빨라요. 요즘에는 스프레이가 좋아져서 엄동설한에도 그릴 수 있어요. 여름에는 더 쉽고요. 금방 마르니까요.”
군산 은파 유원지나 월명 공원에는 종배씨가 그린 그래피티가 있다. 군산 비응항 아트거리는 그가 최근에 작업한 곳이다. 종배씨는 아무 것도 없는 벽을 앞에 두고 오래 생각했다.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비응항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지 않았다. 새만금 가다가 내려서 잠깐 바람 쐬는 곳,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군산을 보여줘야 할까. 이미 구시가에는 일본에게 수탈당한 역사를 알리는 근대문화가 자리 잡았다. 종배씨는 “비응항 오니까 재밌네”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팝 아트를 활용했다. 군산 출신인 연예인 김수미, 김성한, 박명수, 송새벽을 그렸다. 아이들이 그 앞에서 즐겁게 뛰어놀 수 있게 슈퍼히어로와 재밌는 캐릭터들도 그렸다.
“항상 어떤 구도로 벽을 채워 넣는가가 고민이죠. 그래피티는 스프레이를 쓰니까 얼굴이 무조건 손바닥보다는 커야 해요. 이목구비가 나와야 하니까요. 전국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받아서 그리니까 작업량이 많으면 혼자 하기 벅찰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후배들을 불러서도 해요. 커스텀도 계속 주문이 들어오고요. 아내랑 아기 키우고 살 만큼은 돼요.”
종배씨는 연습장을 갖고 다니면서 항상 스타일을 공부한다. 돈 주고 배운 적은 없다. 인터넷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작품을 본다. 그래피티가 나오는 영화 <와일드 스타일>, <선물 가게 지나야 출구>도 몇 번씩 봤다. 혼자 하다 막히면, 다시 다른 사람의 작품을 연구한다. ‘이걸 어떻게 했을까?’ 의문이 드는 부분은 강좌도 찾아 듣는다.
평균수명 18세가 안 됐던 석기시대 사람들. 그이들이 동굴에 그린 벽화는 변화를 거듭해서 그래피티가 되었다. 체제에 저항하며 스프레이로 그리던 구호는 거리의 대중미술로 변신했다. 방치된 벽, 인적 뜸해진 골목길, 특색을 가진 가게, 축제의 현장 곳곳. 사람들은 종배씨가 그린 그래피티 앞에서 멈춘다. 환하게 웃는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