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무대에서는 꽃과 나비의 세레나데가 펼쳐진다. 조명을 받아 더욱 화려해진 나비가 전통 가락에 맞춰 춤을 춘다. 사뿐히 내려앉았다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들어올리는 몸짓이 가히 환상적이다. 꽃 주위를 맴돌듯 너울대던 나비가 조용히 날개를 접는다. 그리고는 두 팔을 대각으로 활짝 펴며 빙그르르 돌더니 살포시 잡아끌기도 하고, 선율을 따라 납신납신 발을 옮겨 디디다가 물을 튕기듯 가볍게 밀어내기도 한다.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멋들어진 춤사위. 신명난 춤사위 한판을 보고 있노라니 어깨와 엉덩이가 들썩들썩. '누워있는 미륵도 신명나면 벌떡 일어선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영감의 교류라 할까, 마치 블랙홀인양 빨려 들어가 나도 모르게 춤을 추고 싶어진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온다. 가냘픈 손끝과 발끝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춤 동작 하나하나에 전통 무용의 멋과 혼이 담겨있음을 느낀다.
지난 14일 오후 7시 서울 성암아트센터에서 열린 신명숙(56) 대진대학교 무용학과 교수의 제14회 작품발표회 감상 후기다. 이날 신 교수는 군산의 마지막 예기(藝妓) 장금도의 민살풀이와 부채춤을 선보였다. 민살풀이는 군산 소화권번(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조합을 이르던 말)에서 손에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췄던 살풀이춤을 일컫는다. 그동안 장금도 명인에 의해 군산에서 간간이 선보이다 1980년대 이후 몇 차례 공연과 무용축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2006년에는 프랑스 초청공연도 다녀왔다.
부채춤 역시 장금도(88) 명인이 열서너 살 때(1930~1940년대) 군산 소화권번에서 익힌 '권번 부채춤'으로 신 교수 공연이 처음이란다. 장금도 명인이 배울 때는 부채에 국화, 매화 등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장단은 굿거리, 자진모리였으며 가끔 타령 장단에 맞춰 췄다고 한다. 부채춤은 검무처럼 두 사람이 추는 춤으로 공간과 상대가 없어 긴 세월을 묻혀 있다가 1999년 신 교수가 장금도 명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연습하던 중 춤사위를 발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작품발표회 주제도 <장금도의 춤 재발견>으로 했다 한다.
객석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호호백발의 장금도 명인이 공연을 관람하여 의미를 더했다. 춤추는 해어화 장금도의 일생을 재조명한 동영상(김형관 제작)도 상영됐다. 장금도 명인의 부채춤을 주제로 이윤선 목포대 교수, 장광렬 무용평론가(춤웹진 대표), 신명숙 교수의 3자 토론회도 1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발표회가 끝난 뒤에는 미수의 장금도 명인이 즉석 살풀이춤 공연을 펼쳐 많은 찬사와 박수를 받았다.
이날 작품발표회는 신 교수 제자들(문지혜, 박은미, 진민지, 최원정)의 화관무 공연으로 막을 열었다. 화관은 여성들이 멋을 내기 위해 머리에 쓰는 장식품으로 신라 시대 중국에서 유입되었다 한다. 당시는 관모와 유사한 형태였으나 조선 시대부터 장식으로 머리에 썼다. 정조 임금 이후에는 일반 여성들도 특별한 날에 사용하였다. 종이나 옷감으로 꽃을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이런 춤을 '화관무', 혹은 '화무'라 하며 주로 권번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난과 역경의 춤쟁이 인생 50년
오로지 '춤쟁이'로만 살아온 신명숙 교수. 그는 어려서부터 춤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유치원 대신 무용학원에 다녔다. 학원에서도 기량이 출중한 아이로 인정받았다. 또래에서 나올 수 없는 성숙한 분위기와 고운 선을 표현해냈던 것. 한국전쟁 때 평양에서 월남한 부모가 '전쟁이 끝나면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서울역 근처 만리동에 자리 잡는 바람에 용산 미군부대 행사에 가끔 초대도 받았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태평한 성격 탓인지 저는 기억력이 별로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도 남아 있는 게 한두 개밖에 없어요. 지금도 선명한 기억은 유치원 대신 무용학원에 다닌 것, 그리고 가끔 미군부대로 공연 가서 맛있는 수프와 초콜릿을 먹던 일들입니다. 엄마가 들려준 얘기인데 어린 것이 춤을 앙증맞게 잘 추니까 미군들이 선물과 먹을 것을 많이 줬다고 그래요.(웃음)"
타고난 소질과 노력으로 1968년 리틀엔젤스무용단 오디션을 통과하고 정식 단원으로 들어간다. 전문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으면서 실력이 나날이 늘어간다.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해외공연을 다니며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경험과 안목을 키우며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소중한 시기이기도 했다.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세계를 누비며 우리 춤 공연을 했어요. 미국의 닉슨 대통령,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공연하고 악수도 했죠. 각 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행운이었어요. 그렇게 다양한 문화를 접하다 보니 춤의 근원적인 형태가 궁금해지더라고요. 나라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출발의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죠. 그때 궁금증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신 교수는 경희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업과 레슨, 그리고 개인연습이 끝없이 이어졌다. 개인 시간은 상상도 못 했다. 남들에게 낭만의 순간으로 기억될 대학 시절이 온통 땀과 눈물로 채워졌다. 그야말로 고행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포기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한국무용의 거목 김백봉 선생에게 혹독한 학습훈련과 애정 어린 가르침을 받으며 그렇게 성장해갔다
1988년 대학원 졸업 후 무용가로서 위상을 정립할 무렵 또다시 도전을 감행한다. 한국의 무용 예술 향상과 저변확대를 꾀하기 위해 1990년 창단된 무용단 <춤타래> 창단멤버로 참여한 것. 무용수는 20여 명. 거듭되는 순회공연과 이론, 실기를 연구하면서 더욱 발돋움한다. 이후 춤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화두가 하나 생겼어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무용이 우리 고유 춤의 완벽한 형태인지, 우리 조상들의 터전인 북방지역 춤은 알지 못한 채 반쪽짜리 춤만 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전통춤의 진정한 모습과 형태를 알고 싶고, 찾고 싶어 중국 유학을 택했습니다. 한·중 양국 문화교류가 체결되는 시점이었죠.
여자라서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지도교수 추천서를 들고 쓰촨성과 윈난성을 오히려 안전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어요. 그 무렵 중국은 소수 민족의 문화 활동이 문제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규모 활동이 가능해지는 시기였죠. 열악한 환경에서 되찾은 그들의 춤은 화려하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단순한 몸짓이었지만 춤의 생명력이 엿보였습니다."
장금도 명인, 지금은 친정엄마처럼 느껴져
신 교수는 1997년 베이징(北京) 중앙민족대학에서 박사 학위(무용인류학)를 받고 귀국한다. 이듬해 대진대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 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다. 1999년에는 <노름마치> 저자 진옥섭 추천으로 군산의 장금도 명인을 만났다. 그는 "검고 긴 머리카락을 핀으로 고정시킨 가냘픈 체구에 바지를 입고 나오신 선생님은 농촌에서 흔히 만나는 너무나도 평범한 시골할머니 모습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선생님은 춤을 배우겠다고 하면 한사코 '춤은 그냥 추면 돼. 뭐하러 춤을 배우러 오느냐?'라는 거절 같은 얘기만 하시곤 했어요. 얼마 뒤 여행 가방을 챙겨 무작정 선생님 집으로 갔죠. 골목 끄트머리 마당이 있는 집에 들어서니 강아지가 반겨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동네가 재개발된다고 해서 집도 고치지 않고 사는데 누추한 곳에 왜 왔어'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방을 내주시더군요.
그 후 종일 선생님을 따라 다녔어요. 계모임도 쫓아가고 은파호수공원도 산책했죠. 선생님의 절절한 흥타령을 들으려고 마이산으로 드라이브도 갔어요. 아들이 운영한다는 주유소도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선생님은 키도 크고 날씬해서 춤추면 이쁘겠다고 하시면서 춤을 춰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발 디딤과 손놀림을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거울이 없다는 핑계로 동네 무용학원을 빌려 선생님 춤을 따라 하기 시작했죠. 선생님 춤은 우리가 말하는 교과서적인 동작이 거의 없었어요. 춤의 갖춰진 동작은 물론 정해진 틀도 없이 항상 변하는 동작과 동선 때문에 나의 저장 능력이 고갈될 만큼 마치 처음 배우는 춤처럼 느껴졌죠. 참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쁘고 멋진 동작도 없고 동선마저 없지만 추면 출수록 거북스럽게 느꼈던 장식들이 서서히 걷히면서 자유로운 공간에 서 있음을 알게 하는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그해 겨울 선생님을 우리 집으로 모셨죠. 그리고 집에서, 학교에서 선생님과 춤을 추는 동안 조금씩 민살풀이춤이 정리되어 갔습니다. 부채춤 춤사위도 그렇게 배우면서 발견하게 됐죠."
신 교수는 "선생님은 군산을 벗어나면 늘 흥얼거렸고, 권번 시절 얘기도 들려주셨다"고 덧붙인다. 소화 권번에서 검무, 포구락, 화관무, 승무 등 여러 춤을 배웠지만 실제로 췄던 춤은 살풀이와 승무였고, 그 외의 춤은 써먹지 못했다고 하셨단다. 이유는 살풀이와 승무는 혼자서도 출 수 있지만, 기타 춤은 군무이고 삼현육각이 연주돼야 가능하여 공간이 필요하고 돈이 많이 들어 기회가 없었다는 것.
그는 요즘도 가끔 장금도 명인을 뵈러 군산에 간다고 한다. 지난 6일에도 다녀왔단다. 연말에도 찾아볼 예정이다. 이제는 스승이 아니라 친정엄마 같아서 만나면 스승이 좋아하는 짜장면도 사 먹고 산책도 하면서 사는 이야기로 '사제의 정'을 나누는 신명숙 교수. 그는 "내년 봄쯤 군산에서 스승(장금도)의 한 많은 일생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갖으려 한다"며 앞으로 계획을 넌지시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