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는 가까운 지인이나 직장동료 부모가 돌아가시면 하루쯤은 상가에서 밤을 새우며 상주를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했다. 그런데 기자는 친구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사흘을 꼬박 밤새우면서 부의금도 접수하고, 장지까지 알선해 주었던 경험이 몇 차례 있다.
상여도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보면서 자랐다. 군산 시내에서 성산, 나포를 지나 금강 상류의 강경 논산으로 나가는 길목이었던 고향집 골목 앞 신작로는 항상 북적였다. 구경거리도 많았다. 상여도 사흘이 멀다고 지나갔다.
상여가 나갈 때 좌우에 액운과 악귀를 막고 퇴치한다는 '雲'이나 '亞' 형상을 그린 판을 막대기에 달아 세우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운삽(雲?) 또는 아삽(亞?)이라 하며, 한국인의 근본을 나타내는 형상이라 한다.
요령잡이가 상여에 올라 요령을 흔들며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만가를 구슬프면서도 흥겹게 선창(先唱)하면 상두꾼들은 "어~어, 어허~어 어~허~어야, 어야로 노가 어허야~"로 답했다. 이러한 상엿소리는 외롭게 저승으로 향하는 망자를 위로하는 가락으로 거듭나 하나의 예술로 승화한다.
요즘엔 볼 수 없는 광경인데, 상여를 뒤따르는 아들 상주가 많거나, 초서와 행서체로 망자를 추모하는 시(詩)가 적힌 만사(만장) 행렬이 길게 이어지거나, 귀엽게 생긴 기생이 요령을 흔들며 이끄는 꽃상여가 지나갈 때는 사람들이 망자를 부러워했다.
굴건제복 차림에 짚신을 신은 상주들은 대나무로 만든 상정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고개를 숙인 채 곡을 하면서 상여를 따라갔다. 어쩌다 부인이나 딸이 상여를 붙잡고 애처롭게 울부짖어 구경꾼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하였다.
요즘처럼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에는 상여가 2-3회씩 지나가는 날도 있었다. 동네 아저씨·아주머니들은 물론 지나가는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상여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누구네 상여간디 저렇게 쓸쓸허댜!"
"누구는 누구여, 징그랍게 일수놀이 혀서 2층 집도 짓고 부자 됐다가 중풍으로 자빠져가꼬 고생만 허다가 죽은 장씨지. 돈도 좋지만, 사람은 인심을 얻음서 살어야 혀, 그르케 떵떵거림서 살었는디도 죽응게 사람이 없잔여!
"그릉게 말여, '정승 집 개가 죽으믄 문상객이 넘치고, 정승이 죽으믄 사람이 없다'고 허지만, 부잣집 상여치고는 너무 허전허네··· 저기 상여 붙잡고 우는 게 큰며느리 같은디 눈물은 하나도 흘리지 않네 그려, 남의 자식은 다 소용 없당게!"
돈만 알아봤지 사람은 몰라봤던 망자는 그렇다 치고, 친정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며느리가 시부모와 정이 들면 얼마나 들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딸들과 비교해가며 슬프게 울지 않는 며느리를 탓하던 시절을 살아왔다. 그러니 '고추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 하더라!'라는 말이 유행했을 수밖에.
군산 지역에서는 '만장'을 '만사'라고 했다. 만사는 망자와 가깝게 지내던 추모객들이 비단에 5언 절구와 5언 율시, 또는 7언 절구와 7언 율시를 써서 가져오면 긴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두었다가 출상하는 날 동네 아이들이 하나씩 들고 상여를 따라갔다. 만사는 형형색색이어서 많을 때는 그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
"누가 죽었간디 만사 행렬이 저렇게 길댜, 끝이 없고만, 사람은 죽드라도 저렇게 죽어야 허는 것인디!
"이 사람은, 사윈가 아들인가가 군대 가가꼬 별 달았다는 아리랑고개 넘어 주조장 주인이잖여. 공마당(공설운동장)서 노제 지내고 떠난다고 허는디, 보통 구경꺼리가 아니 것고만 그려. 시장이랑 경찰서장이랑 높은 사람들도 다 온댜!"
상여는 망자가 이승을 하직하고 북망산 갈 때 타고 가는 가마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구경꾼들은 만사 행렬과 상여를 따라가는 추모객 숫자를 헤아리면서 망자의 일생을 평가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상여를 구경하며 주고받는 대화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말로만 듣던 어느 아저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고 나쁜 사람이었는지, 누구네 아버지 대인관계는 어떠했고, 누구와 척을 지고 살았는지 등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어 흥미를 끌기도 했다.
상여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
배고픈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상여 뒤를 따라가 가을햇살이 따사하게 내리쬐는 잔디에서 씨름도 하고, 누가 혼자 상여집에 다녀올 수 있는지 대담성을 겨루기도 했다. 돌아올 때는 귀신이 잡아당긴다는 소문 때문에 맨 뒤에 서는 것을 꺼렸는데, 글을 쓰면서도 당시 장면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진다.
요즘은 달라졌지만, 며느리 친정에 상이 나면 대부분 시아버지가 대표로 다녀왔다. 그런데 딸의 시부모가 돌아가시면 오빠들까지 조문을 다녀오는 게 상례였다. 이러한 관습은 남존여비 사상과 딸의 시집살이를 걱정하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애틋한 마음으로 이해된다.
아버지나 형님이 상가에 다녀오면 어머니가 소금을 뿌리고서야 대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는 재앙이나 귀신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상가에 다녀와서 아팠다고 하는 이들을 종종 봤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화투를 쳤으니 후유증으로 감기나 몸살에 걸릴 수밖에.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임산부는 상가 근처에도 못 가게 했다. 미신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임신을 하면 첫째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하고, 태교 음악, 태교 음식 등에 관심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택시나 트럭 기사들이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상여를 만나면, 상서로운 일로 받아들여 아무리 바빠도 차를 세우거나 옆으로 비켜 상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운전석에서 내려와 망자 노잣돈을 상여 줄에 걸어주는 기사도 있었다. 육신은 죽어도 정신은 소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사람들은 상여를 메고 가면서 무겁다고 하면, 망자가 노해서 더 무겁게 누르니까 말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친구 아버지 상여를 매고 가면서 무겁다고 하니까 더 무거운 것 같더라'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정신적인 문제로 보인다. 손에 든 물건도 무겁다고 투정하면 할수록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남편을 잃은 아내는 "아이~고 아이고~, 이 야속허고 무정헌 양반아, 갈라믄 나를 데리꼬 가야지, 새끼들 허고 어치케 살라고 혼자만 간단 말이요. 술 마신다고 구박혔든 내가 죄인이요. 죄인. 아이~고 아이~고오"라며 음률의 높낮이를 맞춰가며 애절한 시를 읊듯 곡을 했는데,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장송곡이라 하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집 밖에서 생을 마감하는 ‘객사’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부모가 생명이 위태로우면 숨을 거두기 전에 집으로 모셨다. 그런데 요즘엔 모든 절차가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진다.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장례문화의 변화로 받아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