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Fighter) 정치인으로 알려진 함운경은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본인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이고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지금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가?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도전정신.
함운경 하면 따라다니는 꼬리표 같은 이력
서울대 삼민투위원장(1985),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주도(1985. 징역 6년6개월 선고), 통일관련 강연과 저술활동으로 구속(1989 징역10월 복역),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2001.11, 징역 3개월 복역 중 보석으로 석방). 1996년 33살 나이로 재야추천후보로 국회
의원 출마. 화려한 이력으로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군산에서 2000년, 2002년, 2006년 군산시장, 국회의원 선거에 내리 낙선했다. 김민석 전의원, 허인회 위원장과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아직은 잘 안 풀리는 ‘386정치인’.
아침저녁으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일교차가 커지는 계절, 이제는 50이 넘은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버린 모습. 그 역시 세월을 비켜내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간다. 정치인으로 그를 만나기전에 그저 평범한 시민의 한사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사업체인 파인파크,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야외 운동기구를 개발하여 판매하는 회사란다. 수송동에 위치한 야외운동기구 전시장도 있는데 이곳에는 개발한 운동기구를 설치해놓고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다고.
“여기 있는 야외운동기구 5종은 자체개발하여 조달등록까지 마친 제품입니다. 다른 회사에는 없는 제품입니다.” 그의 설명이다. “이 운동기구는 손 자전거입니다. 자전거를 발이 아닌 손으로 돌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손 운동하는 기구가 아니라 실은 어깨운동기구입니다. 대부분 야외에 설치된 기구들은 같은 위치에서 돌리는 운동기구죠. 그에 비해 이 제품은 한쪽으로 돌리면 위로 올라가고 반대로 돌리면 아래로 내려옵니다. 어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근육을 사용하게 되고, 50대를 넘어가면서 어깨 때문에 힘들어 하게 됩니다. 이 운동기구가 다시 건강한 어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한 번 해보시면 높이에 따라 사용하는 근육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품 하나하나 상세한 설명을 하는 함 대표에게서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전해진다.
“제가 2006년 시장선거에서 낙선한 후 시작한 것이 조경사업입니다. 그게 어떤 사업인지 내용도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장인어른이 나무농장을 크게 하셨죠. 적극 권유해서 배워가면서 한다는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친구들이 건설과 관련된 일을 말렸습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지금은 살점이 하나도 없는 뼈다귀를 준다고. 그러나 도전해서 하는 일이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냐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죽을 고생했습니다. 보람아파트 조경공사를 하고 4억여 원을 못 받은 적도 있고, 그저 군산업체라고 무보수 하자공사도 했습니다. 한번은 14억짜리 큰 공사를 한 적이 있는데 준공 전 원청업체 부도가 나버리는 바람에 돈 받는데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제가 줘야할 돈을 받지 못해 못주고 있을 때 온종일 전화 받는 게 일인 날도 3달 정도는 되었습니다. 한강다리를 전철로 넘어가는데 이럴 때 중소기업 사장들이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했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더라고요.”
정치인인 그가 야외운동기구를 하게 된 계기는 뭘까? “건설 관련 공사는 사실 마진이 별로예요. 경쟁업체보다 싸게 공사를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장기가 없으니 사업에 재미가 없지요. 그래서 무엇을 하면 괜찮을까 열심히 연구했죠. 남들이 안하는 것을 해야 산다, 똑 같은 것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찾은 것이 야외운동기구입니다. 전국에 야외운동기구 제조업체는 100여 곳에 이릅니다. 하지만 고령화시대에 필요한 노인전용운동기구 전문 제조업체는 없었어요. 작년부터 준비해서 올해 3월에 조달청에 등록하고 관공서에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정당에 있던 사람들이 놀래요. 제가 이런 것을 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고 짧은 시간에 조달등록까지 해냈다고. 저는 남들이 안하는 것을 하고 어렵다고 하는 것을 해야 직성이 풀리나 봐요.”라며 웃는다.
그가 가담했던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도, 무모했던 33살 국회의원 도전도, 그의 인생은 쉽지 않았다. 서울미문화원점거 농성사건을 회고해본다.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 서강대 등 5개 학교가 참여했고 참여인원은 73명이었다. 3박4일간 농성과 폭력과 물리적 행사 없이 자진해산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사건으로 법무부장관이 물러나고 서울대 총장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으로 6년6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나가면 통일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2년9개월 만에 나왔다. 하지만 88년 2월에 출소한 뒤 전국적으로 통일운동을 하러 다니다 1년이 지나 다시 구속되었다. 당시는 통일이야기를 자칫 잘못 꺼내도 국가보안법에 위반될 때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하라고 정부에 덤볐던 때이고 그 뒤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가 89년에 방북했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국을 누비며 통일운동하고 강연을 다닌 그가 온전했을까? 당시 그는 26살이었다.
“자칫 통일운동도 법에 위반될 때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선각자들이 앞장서 깨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지요. 태권도의 힘이었을까요? 전 삼학동 중앙체육관 초창기 관원입니다. 2단 옆차기를 보고 집에 달려가서 태권도를 하겠다고 해서 시작했죠. 초단까지 따고 더 못했지만 그 때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투지와 배짱이 생긴 것 같아요. 물론 중 고등학교 때 많은 사건 사고가 생겼지만요. 하하.”
20대는 혁명가로 살았다. 전두환 독재정권을 뒤집어엎고 이상사회를 만들자고 시작한 일이다. 그런 생각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가졌다. 그의 멘토인 이광웅 선생과 고1때 만나서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30년 가까이 그 꿈을 가지고 도전해왔다. 하지만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두환 독재 타도투쟁에 앞장섰던 것은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소망에서 시작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후에도 각박하고 힘든 세상이 이어지고 있으니 평등한 사회와는 거리가 먼 한국이니까.
“야당은 재벌개혁을 못한 게 문제라고 합니다. 또는 박근혜대통령이 잘못해서 경제가 엉망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그런 주장이 일면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당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진영논리에만 갇혀있으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제해결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아요. 오늘날의 야당은 무능합니다. 격렬하게 싸우기를 원하는 게 국민여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싸울 때는 잘 알고 싸워야 합니다. 정치란 말로 싸우는 것이잖아요. 최근 공무원연금개혁과 관련하여 국민연금에도 포함되지 않아 노후를 길거리 종이 줍기에 내몰려 있는 국민들은 고려하지 않고 공무원 편만 들었습니다. 노동개혁과 관련해서는 무조건 노동개악이라면서 재벌개혁, 사내유보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겁니다.”
그는 기업을 경영하면서 세금 내는 사람들 입장에 서있다. 세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입장에 있는 정치인들과는 다른 경험을 한 것이다. 비정규직을 가장 많이 쓰는 건설업에 8년째 종사하고 있었고 이제는 제조업을 시작하며 고용관계와 산업현장의 경험을 쌓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똑같은 일을 해도 똑같은 급여를 받는 게 아닙니다. 인간도 노동시장에 나오면 노동력이란 상품입니다. 동일상품에 동일가격이 매겨지듯이 동일 노동 동일임금이 맞습니다. 우리 같은 중소기업 노동자에게는 말도 안 되는 급여가 지급됩니다. 대기업이던 공기업이던 같은 일을 하면 같은 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 대공장 중심의 민주노총이 성벽을 쌓으면 쌓을수록 중소기업노동자와 중소기업은 죽어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골고루 같이 잘사는 사회! 이걸 만드는 게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는 숙연해진다. “제 인생에서 포기란 없습니다. 그런데 아픔이 많네요. 가장 아픈 것은 유언비어와 그것을 믿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재혼한 이력을 이용하여 헛소문을 뿌리고 다닙니다. 2006년 시장선거에는 전처가 아기를 업고 장모와 같이 시내에 출현했다는 소문을 만들어냈습니다. 나중에 다 밝혀졌지만 사람을 사서 그렇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그게 사실인양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소문 듣고 안 찍었다는 이야길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구칩니다.”
그는 불굴의 투지를 갖고 사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동시대의 사람들이 투사(Fighter) 함운경이라고 했을까? 그는 투사라기보다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혁명가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는 일에 따라 통일운동가로서 청년운동가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데 앞장서고 4번의 선거를 치룬 정치인으로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사업가로서 역할을 성실히 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다. 정치는 그 열망을 이루는 도구가 될 것이다.
도전하는 청년정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카피가 생각나게 하는 사람. 기성정치의 틀에 아직 진입하지 않은 순수한 청년정신을 지닌 함운경 대표에게 언제나 처음처럼 아름다운 청년정신을 갖고 사는 정치인으로 곁에 남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