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인덕씨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을 광주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들었다. 나고 자란 고창을 떠나는 날이었다. 결혼도 안 한 딸에게 양장 기술을 배우라고 권해 준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남달랐다. 인덕씨네 세 자매는 명절이나 학교 행사 때마다 돋보였다. 입고 있는 옷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근동에서 자자했다.
인덕씨는 ‘뉴스타일 학원’ 에서 1년간 패션을 공부했다. 함께 배운 동기들은 대개 서울로 갔지만 그녀는 광주 법원 통에 있는 한 의상실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사람들한테 맞춤옷을 해주며 실전 디자인을 익혔다. 한 남자와 교제하고 결혼을 했다. 곧바로 남편이 사는 군산으로 와서 의상실을 열었다. 1969년, 인덕씨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키티 의상실’. 애칭 같지요? 느낌이 좋잖아요. 제가 지었어요. 손님들이 줄 설만큼 잘 됐어요. 1970년에 큰아들을 낳았는데 젖 줄 시간도 없었어요. 엄마로서 항상 미안했죠. 그래서 ‘애기 또 낳으면 안 돼’라는 자기 암시가 있었나 봐요. 계속 유산이 됐어요. ‘이렇게 바빠서는 안 돼. 질적으로 수준을 높이자’ 고 결심하고는 둘째를 낳았어요. 둘이 9년 터울 나죠.”
패션은 항상 변한다. 옷감 일을 하는 남편은 “당신은 파리에 가야 해”라고 강조했다. 외국에는 특별한 사람만 가던 때였다. 인덕씨는 전라북도에 사는 여자 중에서 최초로 파리에 가는 사람. 여권을 발급 받고는 반공회관에 가서 따로 교육도 받았다. 비행기 타면 몸의 수분이 증발 돼서 껍질만 남으니까 내릴 때까지 물을 계속 마시라는 말도 들었다.
1983년, 인덕씨는 알래스카를 경유해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패션디자이너 13명과 같이 갔다. 이름이 알려져 있던 진태욱씨와 이신우씨도 동행이었다. 달나라에 발 딛는 것만큼이나 파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덕씨는 바로 패션쇼를 보러 갔다. 유럽 문화와 역사에 대한 책을 모조리 찾아 읽고 갔지만 충격을 받았다. 몸이 떨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패션을, 서울도 아닌 지방에 가서 손님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죠. 처음에는 쁘렝땅 백화점 옆에 있는 샵에서 패턴(옷감을 재단하기 위해 종이로 만든 옷 본)을 무지 많이 샀어요. 그 패턴을 연구하면 기가 막혀요. 감탄이 나와요. 움직이는 사람의 체형에 맞게 옷을 만드는 게 중요한데, 그 거를 패턴으로 잡을 수가 있어요.”
그 뒤로 매년 파리에 갔다.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때부터 전속 패션디자이너 개념이 생겼다는 프랑스. 오랜 역사 속에서 패턴은 얼마나 정확하고 근사하게 발전했겠는가. 인덕씨는 파리 시내를 걸으면서 사람들 옷을 봤다. 오래된 성당을 만나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움에 압도되어서 자신이 작게 느껴졌다.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유인덕 선생님, 서울로 오실 생각 없으세요? 제가 (의상실) 대드릴게요.”
패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덕씨를 몇 번이나 유혹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 있었다. 대한민국 패션의 선두주자는 지방에 사는 사람도 할 수 있다고. 더구나 아들이 둘인 그녀는 서울로 갈 바에는 차라리 미국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통 크게 세계를 보며 일하고 싶었다. 그편이 아이들 교육에도 좋겠다고 여겼다.
미국 하와이에는 아는 동생이 살았다. 인덕씨의 남편이 먼저 하와이에 갔다. 영주권까지 딴 남편은 몇 달 만에 "나는 미국에서 못 살아”라고 했다. 지상낙원이라는 하와이에서 못 살 이유가 무엇인가. 인덕씨는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 날씨가 좋았다. 여자들은 외출복으로 롱 드레스를 주로 입고 다녔다. 백화점 입점을 생각해 볼만 했다.
“나는 거기서 살고 싶었어요. 이민 서류까지 다 썼잖아요. 애들 교육도 좋고요. 그런데 남편이 도로 가겠대요. 한 달 넘게 서로 사느니 못 사느니 갖고 싸웠어요. 결국, ‘한국 가서 이혼해!’ 하면서 왔어요. 한 달간 기도했지요. 어느 날, 주어진 이 자리가 최고라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떠올리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군산에서 더 열심히 살게 된 거예요.”
세상은 바뀌었다. 기성복은 점령군처럼 와서 빠르게 맞춤옷들을 잠식해갔다. 수많은 패션디자이너들이 기성복을 만드는 대기업으로 들어갔다. 날마다 초조하게 매출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지방의 의상실들도 거의 문을 닫았다. 인덕씨는 여전히 ‘키티 의상실’만 하면서 파리에 갔다. 사람들이 “뭐 하러 자주 와요? 10년에 한 번씩 와도 되겠네요”라고 했다.
파리에서는 매년 옷감 쇼도 열린다. 그 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중에서도 인덕씨는 샤넬, 디올, 발렌시아의 옷을 만드는 옷감에 끌렸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 패션업계의 사람들은 "(지방 의상실 하면서)뭐 하러 자주 와요? 10년에 한 번씩 와도 되겠네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패션은 항상 새로웠다. 지방에서 의상실을 하고 있어도 파리에 와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다녀오면 시차 적응도 없이 열심히 옷을 디자인하고 만들었다.
“이 옷 ‘키티’ 거지?”
사람들은 인덕씨가 만든 옷을 알아봤다. 싸고 편한 기성복이 자리 잡고 나니까 ‘키티’의 진가는 드러났다. ‘키티 의상실’에서 만든 옷을 해체해서 그대로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비슷할 뿐, 똑같지 않았다. “키티 옷은 특별해”라고 여기는 고객들은 딸이 자라면 의상실로 데리고 온다. 그래서 칠순이 된 인덕씨는 지금도 세계 4대 패션쇼 자료를 보며 연구한다.
“나는 패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요. 옷을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완벽하고 싶죠. 가끔은 제가 만든 옷을 손님이 맘에 안 든다고 해요. 그러면 다시 해드린다고 말해요. 그 옷을 매장에 놓으면 다른 손님이 예쁘다고 구입하시니까요. 진열된 옷은 전부 내가 만들어 놓은 거예요. 비수기(여름, 겨울) 때 해 놔요. 유행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아름다운 옷들이죠.”
패션 디자이너 반백년. 인덕씨는 내면의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한다.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얘기하기 위해 <안나 카레리나>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소환한다. 백석의 시를 읊는다. 해마다 이상 문학상을 찾아 읽는다. “염색을 안 해서인지 제가 눈이 좋아요. 돋보기 없이 읽어요”라면서 최근에 읽은 최진기의 책을 보여주었다.
한 때는 인덕씨도 디자이너로 일하는 자신의 나이를 의식한 적 있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노라노(우리나라 패션의 선구자) 선생님을 보았다. 여든이 다 됐는데 “죽을 때까지 옷을 만들 거야”라는 말에 감동했다. 인덕씨도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자”고 생각했다. 수십 년간 똑같은 의상실에서 옷을 만드는 일이 감사하다.
“엄마, 나는 집에 있는 여자가 좋아요. 일하는 여자는 싫어. 무조건 싫어요.”
인덕씨가 젊을 때, 그녀의 두 아들은 말했다. 아이들이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나 학예회를 해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들이 동네가 쩌렁쩌렁해질 정도로 큰 상을 받는 날에도 파리 패션쇼에 가야 했다. 인덕씨의 남편은 항상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는 패션 하는 사람이야. 보고 배우고 와야 해.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해주자"라며 달랬다.
장성한 두 아들은 각자 서울에서 산다.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일한다. 시대보다 앞선 생각으로 아내를 외조해 준 남편은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 여전히 그녀에게는 ‘키티 의상실’이 있다. 날마다 솟는 열정 덕분에 옷 만드는 일이 좋다. 가끔은 ‘딸이 있었다면, 조카딸이 가까이 살았다면, 디자이너 일을 권했을지도 몰라’ 상상을 해본다.
현역 디자이너 인덕씨는 군산 제일중학교 직업체험 강사로 갔다. 청소년과 만나는 일은 처음, 긴장 됐다. 인터넷으로 찾아봤더니 ‘중2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란다. 인덕씨는 ‘아이들을 최대한 감싸주자. 존중하는 자세로 다가가자’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이들에게 우리 삶은 다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오늘 하루도 디자인 해 보라고 말했다.
“결국, 패션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에요. ‘이 옷은 저 분한테 어울리겠다’는 마음, 보는 사람이 패션에 공감하지 못하면 힘든 일이지요. 다른 사람한테 옷 입히는 걸 즐거워하면 일을 오래 할 수 있어요. 장사가 잘 되네 못 되네 따져서는 오래 못 가요. 디자이너는 살아있는 모델이에요. 아름다운 옷도 많이 입어봐야죠.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계속 가는 거예요.”
‘키티 의상실’에는 파리 쁘렝땅 백화점 앞에 서 있는 30대의 인덕씨 사진이 있다. 지금처럼, 그때도 패션을 생각하는 마음은 대단했다. 그래서 패션쇼를 보러 먼 길을 다녔다. 사람들은 “자기는 돈 벌어서 다 뭐했어?”라고 묻는다. 그것은 파리에 오고간 인덕씨의 눈 속에 있다. 머릿속에 들어있다. ‘키티’라는 이름을 달고 제 주인을 찾아간 옷으로 남아있다.
“파리에 처음 갔을 때는 두려웠어요. 거기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박물관 가고, 미술관 다니면서 안목이 길러졌어요. 거대한 문화예요. 근데 이렇게 근사하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면, 군산 사람이 알아줄까?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죠. 충분히 알아주셨어요. 그게 너무 고마워요. 그래서 지금까지 ‘키티’가 한 자리에서 47년간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