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로 다져진 21세기 진정한 글로벌 리더
성광문 아주실업 회장, “미래 꿈은 장애인들과 동행하는 것”
미국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리더십이 없는 사회에서 시대는 제자리걸음을 한다. 나라의 발전은 용기 있는 뛰어난 리더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의 기회를 잡을 때만 이루어진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 ‘용기 있는 뛰어난 리더’는 국민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한국은 지금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진정한 리더를 목말라 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자신의 분야에서 큰 업적을 쌓고 최고가 되어 이웃과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배출된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십을 지닌 리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진정한 리더십은 개인의 신념을 집단에 종용시키는 것이 아니다. 추종자들을 모아 진로를 디자인하거나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상대의 장점을 칭찬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배려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성광문 회장이 주목받는 이유
군산시 옥구농공단지 소재 친환경생활용품 제조업체인 아주실업 성광문(65) 회장. 그는 군산인쇄소와 <군산미래신문> 회장도 겸하고 있으며,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이자 대한민국 봉사활동의 대부로 알려진다.
성 회장은 지난 4월 11일 국제 와이즈멘 클럽(Y's Men Club) 한국지역 제5대 총재에 취임, 국제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국제 와이즈멘 클럽은 미국가정재판소 창설자인 알렉산더(Alexander·1888~1967)에 의해 1920년 미국 오하이주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창시됐다. 인구 28만을 힘겹게 턱걸이하는 지방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국제봉사기구 한국지역 총재가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개인의 영광이자 군산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는 총재 취임식에서 “한국지역이 국제 와이즈멘에서 선두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도록 임기 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지구촌 봉사의 선두에 서는 일에도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회원 증강, 클럽 확장, 학교폭력 예방, 와이즈멘 이해를 돕기 위한 홍보, 와이즈멘 기본인 봉사활동 등을 강화하겠다고 의지를 피력했다. 그의 행보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에게 봉사활동은 생활의 일부가 된 지 이미 오래라는 것.
장애인이 능력껏 일하면서 누릴 수 있는 세상 만들고 싶어
성 회장은 산수(山水)가 뛰어난 전북 진안이 고향이다. 1982년 군산인쇄소 대표로 사업가(CEO)의 길을 걷는다. 1985년 지장회에 입문하고 군산불교 청년연합회장이 되면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인도의 마트마 간디의 말을 인용, “보상을 구하지 않는 봉사는 남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행복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봉사는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이 기회”라고 덧붙인다.
장애인 일자리 창출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가 경영하는 아주실업은 여성가족부로부터 여성친화기업으로 인증을 받았으며, 직원의 40%가 장애인으로 채워졌다. 창업 때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2명을 고용하고 조금씩 체계적으로 늘려나갔다. 이후 전국 장애인 사업장으로 선정되면서 정기적으로 채용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꿈은 장애인이 능력껏 일하면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성 회장은 법무부 교정위원 중앙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다. 그가 대표로 몸담았거나 현재 활동 중인 민간단체와 봉사단체는 군산경실련, 재단법인 환경사랑, 군산성폭력상담소, 북한이탈주민지원 지역협의회, 사단법인 아름다운 가게 전북 공동대표 등 스무 개가 넘는다. 성 회장은 “50대까지만 해도 봉사활동을 선거 출마를 위한 사전작업쯤으로 의심받았는데, 예순을 넘기면서 오해가 풀렸다”며 허허롭게 웃는다. 다음은 성 회장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아주실업, ‘전국 장애인 표준사업장’으로 지정받아
◇ 일하는 시간보다 봉사하는 시간이 더 많다고 들었다.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나?
“새벽 5시에 일어나 걷기운동을 1시간 30분쯤 한다. 전에는 은파호수공원 산책로를 돌았는데, 요즘엔 경암동 강변 로터리에서 강심을 따라 철새조망대 방향으로 걷는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실컷 들여 마시고 집에 오면 지장부처를 모신 2층 작은 기도방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 3배를 하면서 어제를 감사드리고 오늘도 어제처럼 건강하고 유익하게 지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아주실업 창업 시기와 생산제품 종류, 규모 등이 궁금하다.
“군산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주)‘옥시’에 납품을 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1991년 가내 수공업으로 출발했다. 1996년 (주)‘애경산업’으로 거래처를 바꾸고 이듬해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 있는 농공단지로 확장 이전했다. 지금은 제1공장, 제2공장을 갖추고 방충제, 세정제, 방향제, 소취제(냄새 제거) 등 실생활용품 130여 종류를 생산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수출도 해오고 있다. 처음엔 일본 시장을 개척하였고, 수출량이 꾸준히 증가해 시장을 유럽으로 확대했다. 2009년 1백만 불 수출, 2011년 3백만 불 수출을 달성했다. 작년에는 5백만 불 수출을 목표로 세웠는데 아깝게도 460만 불에서 그쳤다. 요즘 판로는 일본 30%, 애경산업 납품 33%, 나머지 37%는 수출과 내수로 나뉜다. 이 모두가 품질관리, 납기 준수, 노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가족처럼 뭉치는 화합의 열매가 아닌가 싶다.”
성 회장은 “제1공장 부지는 주변에 저수지도 있고,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등 풍광이 뛰어나 노후에 아내와 텃밭도 가꾸면서 조용히 지내려고 30년 전에 장만했는데, 새로 시작한 사업이 예상외로 큰 수익을 내고, 이곳에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용도를 바꿨다”면서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라며 여운을 남겼다.
◇ 아주실업은 ‘전국 장애인 표준사업장’으로 지정받기도 했다. 어떻게 장애인을 고용하기 시작했나?
“외환위기로 모두가 어려웠던 1998년부터다. 그해 가을 군산명화학교 교장에게 지체장애인 두 명만 써달라는 부탁받은 게 계기가 됐다. 그때 고용한 남자 직원은 지금도 근무하고 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은 직원 60명 중 24명이 장애인이다. 지난 2월에는 군산교도소에서 출소한 여성(3급 지체장애)도 고용했는데, 앞으로 계속 늘려갈 방침이다.”
◇ <군산미래신문>은 언제 어떻게 창간하게 됐나?
“1996년 4월 <진포신문>으로 창간했다. 처음엔 지인의 권유로 이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3개월쯤 지나 대표발행인이 못하겠다며 그만두는 바람에 엉겁결에 대표를 맡게 됐다. 당시엔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었는데, 2006년 주식회사 <군산미래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70%를 지금의 대표, 부사장, 편집국장 등에게 나눠주고 나는 30%만 가지고 뒷전(회장)으로 물러나 있다. 현 제작진이 도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운영을 잘하고 있어 든든하다.”
탈북 새터민 부부들 합동결혼식 주례, 기억에 남아
◇ 대한민국 봉사활동의 대부로 알려진다, 학창시절 성광문은 어떤 학생이었나?
“타고난 성격이 적극적이었다고 할까, 4H 운동도 리더를 맡는 등 자그만 일에도 정성을 다하고, 앞장서는 스타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커서 그런지 시비를 거는 친구도 없었다. 그 덕에 급우들과 싸움한 번 해보지 않았다. 나는 인덕이 있는 것 같다. 학창시절 좋은 친구도 많았고, 금방 깨질 것 같았던 모임도 가입하면 다시 활기차게 살아나고...(웃음)”
◇ 봉사활동에 관심 있는 분들을 만났을 때 인용하는 격언이나 사자성어는?
“어려운 사자성어나 격언보다 현장에서 겪은 경험담과 평소 가슴에 담고 있는 나의 생활신조를 얘기해준다. 특히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시간이 나면 봉사를 하겠다’는 분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젊은 날의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봉사도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좋은 찬스를 놓친다고···.”
◇ 많은 사회봉사단체를 이끌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은?
“군산에 정착해 살면서 경제적 사정으로 혼례를 치르지 못한 탈북 새터민 부부 4쌍의 주례를 섰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들에게 합동결혼식 비용과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우리 회사 직원으로 채용해서 그런지 더욱 기억에 남는다. 북한이탈주민지원 지역협의회에 참여한 것도 생활이 어려운 새터민을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미래 통일을 선도할 소중한 자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법무부 교정위원으로 교도소 재소자들을 만나면서 가슴이 찡해졌던 경험도 있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남자 중학생과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군산교도소에 들어왔다. 죄가 무거워서 그런지 누구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사연이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 외할머니를 설득 끝에 겨우 화해를 시켰는데, 면회하고 두 달 만에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 할머니가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을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