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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親日論爭에서 채만식을 물고 늘어지는가?
글 : 이진우 /
2020.08.01 17:35:2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親日論爭에서 채만식을 물고 늘어지는가?

 


 

 

이따금 우리 역사교육의 대대적인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특히 역사소설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이다. 필자는 과거 조선시대 서자출신 유자광(柳子光)의 피 터지는 생애를 그린 <그을린 後孫>, 중종시대 조광조(趙光祖) 개혁정책의 허와 실을 냉철하게 파헤친 <그을린 改革> 소설을 각각 발표한 바 있다. 내친김에 숙종시대 비련의 중전 <장희빈> 소설을 하나 더 써볼까 고심하다 말아 버렸다. 당초 계획해왔던 다른 주제의 소설 집필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이 역사물을 다루면서 조선왕조실록 등 모든 관련 자료들을 빈대 잡듯 샅샅이 뒤졌었다.

 

언젠가부터 역사평가에서 Anti-Anthropocentrism(-人間決定論)이라는 신조어가 돌연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거 역사는 그 시대의 절대군주나 영향력 있는 인물을 위주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첨단과학 시대인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 정확한 역사를 도출하기 위해선 그간 소홀히 다뤄졌던 민초 등 수많은 기초 자료들이 대거 요구되게 된 것이다. 그 취지는 역사평가 오류를 최대한 줄여보자는데 있다. 그래서 그런 신조어가 생겨나게 됐던 것이고, 지금은 선진국에서 거의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만은 아직도 구시대적 역사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연·지연의 틀에서 탈피하지 못한 측면도 있고……. 나도 역사소설을 집필할 때 이 새로운 이론에 입각해 쓰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현재 집필중인 단행본 <민중미술사, 900쪽 이상>도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중략)

 

화제를 바꿔, 채만식 작가 친일논쟁(親日論爭) 발단은 전북시민연대가 지난 2002910일 발표한 <채만식 100주년 기념행사를 규탄한다.> 제하의 성명서부터였던 것 같다. 이에, 전북문화원과 한국문인협회 군산지부등이 반박하면서 과열됐다가 잠잠해진 상태지만,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이 성명서 파문은 고창의 서정주 문학관에도 일파만파 번졌었다. 한편, ** 원광대 국문과 교수도 <협력과 저항, 소명출판> 저서에서 채만식 등을 親日 확신범이라고 단정지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어떤 판단으로 그런 극단적인 단정이 내려진 것일까? 그런데 교수는 그의 저서(백석전집, 실천문학)에선 시인 백석과 한 때 그의 연인이자 대연각 기생(妓生)이었던 자야(본명: 김영한)에 대해 찬미일변도……. 즉 용비어천가를 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오판한 것일까? 이 하나만으로도 교수의 문학적 분석 및 비평 성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여하튼 필자는 자야를 아무리 곱게 봐주려 해도 교수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다. 즉 기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오해 말라. 기생의 사랑이라고 해서 애써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단편소설 <>로 유명한 알퐁스 도데의 <사포오>나 알렉산더 뒤마의 <동백꽃 아가씨> 등 그 보다 몇 배나 순수하고 감동적인 사랑을 그린 문학작품은 비일비재하다. 백석과 자야간의 사랑을 너무 미화한 느낌이 들어 하는 말일뿐이다. (필자의 <길상사(吉祥寺)> 제하 글 참조.)

 

다시 Anti-Anthropocentrism 이론으로 되돌아와, ‘전주 시민단체는 성명서 발표에 앞서 채만식 작가의 친일주장과 관련해,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까지의 시대 상황을 얼마만큼 객관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일본은 2주 만에 끝낼 것으로 오판하고 중국침략을 감행했지만, 결과적으론 그것이 일본 패망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중국침략이 2주는커녕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일본에게 있어 당면과제가 연료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산 목재 확보였다. 그러나 필리핀 주둔 美軍(사령관: 맥아더)이 하나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 일환으로 대대적인 진주만 폭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항공기가 기술적 한계로 재급유 없이 본토에서 필리핀까지 직항할 수 없었다. 일본은 중간 급유지인 진주만을 폭격하면 자기네들 계산대로 될 줄 알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가한 강제징용과 탄압 만행은 거의 발광수준이었다. 이 기간 중 모든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시인 윤동주등도 잡혀가 옥사했다. 그런데 그건 아는가? 윤동주가 일본 도시샤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히라누마'창시개명 했다는 사실을……. 그에 반해 같은 일본 유학파인 채만식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 결과로 후반기 그의 작품에서 친일성향이 좀 나타난 것 뿐이다. 조선인 탄압 그 대표적인 피해사례 중 하나가 태평양 마리아나 제도 노스필드 비행장공사현장에 투입된 조선인 강제동원 등이다. 조선인 탄압피해는 정말 참혹했다. 이 비행장은 나중에 일본 히로시마 원폭투하 발진지로도 유명하다.

 

** 교수가 극에 달한 일제의 시대적 만행사실은 고려치 않고 채만식 등 문인들이 자진해서 親日글을 썼다고 분석했는데, 과연 그랬을까? 유감스럽지만, 나는 이를 달리 해석하고 싶다. 당시 조혼(早婚)관례 때문에 대부분의 문인들은 가정을 이룬 고도의 지식인들에 속했다. 저명 문인들 가운데 일본 유학은 필수코스이기도 했다. 그래야 문인으로서 필력을 날릴 수 있었고……. 그들에게 있어 의무적으로 짊어져야 할 과제는 누가 뭐래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즉 먹고사는 문제가 급선무였다는 뜻이다. 당시 용정 등 중국 땅에서 살았던 유명 문인들과 비교하지 말기 바란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일제의 눈치를 안 보고도 입에 풀칠하며 살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 문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생계형 親日대신에 똥지게라도 날라 가족들을 연명시켜야 했다고 주장해야만 옳은 것일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제 하반기 문인들은 윤동주 등의 처참하고도 끔직한 옥사를 분명 전해 들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누구나 친일이라고 말하긴 쉽지만, 당시로선 생명권을 담보로 한 일제의 강압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도 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채만식 親日주장 단체나 학자가 당시에 살았다면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할 각오로 맞설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99%는 절박하고 처절한 심정으로 親日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역사가 수없이 말해주고 있다. 혹여 이런 반박도 나올지 모른다. 광복군은 만주 등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싸웠다고……. 천만의 말씀! 문인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못지않게 싸웠을 것이다. 문인들에게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만 똑똑히 인식해주었으면 한다. 우리 이제 선진경제 진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아집어린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 합리적인 역사평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볼 때도 됐다. 필히 징벌해야할 친일 대상자는 누가 뭐래도 창씨개명을 뛰어넘어 천황께 혈서로 충성맹세한 사람과 악질경찰 노덕술을 비롯한 당시 극렬분자 등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승만은 자기 집권 욕에 눈이 어두워 그런 노덕술을 반공인사라고 극찬했었다.

 

게다가, 채만식은 <레디메이드>, <태평천하>, <탁류> 등 걸작들에서 풍자와 해학인 간접수단으로 抗日정신을 불태운 사람이다. 1930년대 중반 이전 그의 작품들에서 그 어느 누구도 親日성향이 배어있다고 꼬집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채만식은 분명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정신이 강했던 작가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30년대 말 이후 그의 일부 작품들에서 친일로 오해받을 만한 문구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교수의 지적처럼 이런 문구들을 정말 자발적으로 썼을까? -人間決定論에서 지적됐듯이, 색안경을 벗고 그 당시 불가피한 악조건 상황과 연계해 객관적으로 면밀히 바라본다면, 오히려 親日이라고 지적하는 그 자체가 語不成說 아닌가? 아니면 역사인식을 잘못하고 있을지도……. 재차 강조한다. 국민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는 윤동주는 창씨개명 했으나, 우리의 채만식은 이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래서 되묻고 싶다. 누가 더 지조 있는 작가였는지를?

 



 

 

북한인민군이 19506월 말 서울을 함락하기 직전, 이승만 등 고위관리들은 라디오방송으로 거짓 선동하면서 자기들만 살자고 한강다리를 폭파한 후, 서둘러 대전으로 줄행랑쳐 버렸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순진한 시민들이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절박한 심정으로 발만 동동 굴러야 했고 죽어나갔는가? 여기에는 천재시인 노천명도 포함돼 있었다. 그 도도하고 황소고집인 노천명은 카프문학 선구자 중 한명인 임화를 비롯한 북한인민군 총부리(the muzzle of a rifle) 위협에 어쩔 수 없이 굴복, 3개월간 부역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녀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재탈환한 국군에 붙잡혀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녀가 부역을 하고 싶어 했는가? 물론 여기서 그녀의 친일논란은 별개다.

 

종전 후에도 오랫동안 노천명과 같은 마녀사냥 식 부역피해자가 陸士를 비롯해 주요 공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등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가?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문인들의 親日도 부역문제 선상에서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 때 抗日투사였던 김구선생도 빨갱이로 낙인 찍혔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도산 안창호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때 이승만의 멱살을 쥐어 잡고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너는 없는 나라도 팔아먹을 X이다라면서 육두문자를 퍼부었었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그런 사람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는 점이다. 그거 아는가? 여운형과 박헌영이 한 때 상해 임시정부 요원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항일(抗日)은 뒷전이고 벌어지는 권력암투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뛰쳐나와 사회주의 노선을 걸은 것이다. 원래 박헌영의 로망은 영어공부에 매진하며 미국 유학길에 오르는 것이었다. 결론은 상해임시정부를 너무 미화하지 말라는 뜻이다. 2차 대전 후, 프랑스 드골정부가 자국 나치부역자들에게 가했던 것처럼 가혹하게 처벌할 시기는 이미 실기해 버렸다. 우리는 죽기보다 싫지만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젠,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지혜로운 차선책을 찾아야 할 때다.

 

당시, 일제가 극도로 경계한 대상은 사회주의 사상이 깃든 카프문학이었다. 그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 임화도 일제의 회유협박에 끝내 굴복, 카프문학 지도자 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일제 경찰에 잡혀가 받는 그 고문들 상상이라도 해봤는가? 우리의 과거 중앙정보부나 경찰들의 고문기술도 그들로부터 답습한 것이다. 그래서 이한열열사사건이 벌어진 것이고……. 특히 일제에 잡혀간 여성들은 제일 먼저 옷 벗겨지고 강간당하기 일쑤였다. 제한된 지면에서 이에 대해 어떻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중략)

 

한 때 이 지역을 대표하는 **’ 국회의원도 부친의 친일전력 논란에 휩싸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분들은 자비를 베풀어 그 분을 국회로 입성시켜 영광스러운 대통령 후보까지 만들었다. 우리 이제 좌/우 논쟁 때처럼 서로 헐뜯지 말고, 친일인사들 단죄에 있어 경중(輕重)을 가리는 등 지혜와 중지를 모아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은 좀 조용해졌는데, 최근까지만 해도 정치권에서 특히 미필자들이 유난히 반공·애국하며 게 거품 물곤 했다. 나는 이런 것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이중성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34편이다.

 

필자는, 그간 시민단체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전문성이 떨어진다 할 수 있는 시민단체를 순수단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함께 하나의 이익단체로 보는 측면도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시민단체는 때에 따라 자기가 보고 싶은 나무만 보지 말고 숲도 둘러보는 혜안을 가졌으면 한다. 거두절미하고, 시민단체는 채만식을 제2의 장발장으로 만들어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그의 위대한 문학적 업적이 입시지옥 등으로 허덕이는 청소년들에게 미칠 정서함양에 대한 반사이익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필자는 감히 그의 문학적 업적과 비교해 친일논쟁을 조족지혈(鳥足之血)로 보고 싶다. 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일개 시민단체의 주장이나 성명에 이상하리만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지역 정치인들이나 일부 관계자들의 용렬한 태도다. 군산을 포함한 전북인들은 똑똑히 기억해두셨다가 다음 선거에서 이런 영혼 없는 정치인들을 반드시 도태시켜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지역발전, 나아가 국가의 밝은 미래가 담보될 것이다. 백번 생각해도 채만식 친일논란은 어불성설이다. (다음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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