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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아펜젤러·노블선교기념관
글 : 이진우 /
2020.03.01 14:29:0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군산 아펜젤러·노블선교기념관

아펜젤러선교기념교회

임춘희 관장/목사

 

 


 

 

아무도 밟지 않은 툭 트인 바다 밑 묘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힌 무덤 속에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는 잠들어 있다. 그는 그의 품에 영혼을 안고 천국에 들어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놀라게 한 것은 큰 소리나 대포의 연기가 아니며, 폭풍 위의 거친 숨결도 천둥도 아니다. 다만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 그리스도의 목소리 뿐-아펜젤러 순직 기념비에서-

 

지금으로부터 135년 전인 1885년 부활절, 불과 27세의 나이에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찾아온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 H.G.아펜젤러. 그의 나이 44세 되던 해(1902), 인천에서 출발하여 목포의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타고 가던 배는 군산앞바다에서 일본 선박과 충돌하면서 침몰했다. 당시 조난당한 배에서 구조된 미국 광산업자 보울비에 따르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탈출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맨 아래 칸 3등 선실에 있던 한국인 조수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려고 내려갔다가 죽음을 맞았다고 회고했다.

 

1997년도 군산시 내초동 아펜젤러선교기념교회(구 내초교회 1972~1990)에 부임한 임춘희 목사가 아펜젤러기념관 건립에 뜻을 품은 것은 아펜젤러의 일대기를 알고 난 후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선진문물의 도래가 막히던 구한말,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 부부는 188545일 인천 제물포 앞바다로 한국 땅을 밟았다. 낯선 이방인의 나라에 도착한 자리에서 아펜젤러는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에 왔습니다. 이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순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이렇게 기도했다.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교육사업에 주력했다. 당시는 선교활동에 제약이 따랐던 시기였던 만큼 교육 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왕실의 큰 신뢰를 얻었다. 이에 따라 18858월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이 단 2명의 학생으로 시작되며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는 집이란 뜻에서 고종이 배재(培材)라는 교명을 하사하였다.

 

1887년에는 감리교 최초의 정동교회를 설립하고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평생을 교육선교사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는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아들 아펜젤러 2세는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이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을 역임한바 있다.

 

임춘희 목사는 전주 생으로 조부님이 기독교 장로였던 만큼 독실한 신앙적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목원대 신학과 및 서울감리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2년 대전 중앙교회에서 5년간 교육전도사로 사역한바 있으며 군산으로 이주한 것은 19934월로서 지역 목회활동을 하다가 19971월 내초교회 후신인 온누리교회 목사로 부임할 당시 신자는 50여명 내외였다.

 

아펜젤러가 무지하고 가난했던 동방의 이국땅에 찾아와 복음과 선진교육을 전파하기 위해 헌신하다가 군산앞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계기로 그의 일대기를 알고 난 임 목사는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이로써 2002년도 아펜젤러 순직 100주년이 되던 해 그를 기리는 행사를 가짐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기념관 설립의 의지를 굳히고 2006년부터 준비에 들어가 군산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각고의 노력 끝에 20076월 선교기념교회와 기념관을 준공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아펜젤러의 유품과 자료들의 전시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임 목사는 2010년도 미국에 건너가 아펜젤러의 후손들을 수소문하여 찾아가 만났다. 그는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정중히 유품의 기증을 부탁하였는데 이후 그 후손들이 내초도에 찾아와 기념관이 세워진 것에 큰 감동을 받고 유품 일부를 흔쾌히 기증하고 돌아갔다. 그 유품들은 아펜젤러가 부인에게 쓴 최초의 편지를 비롯하여 배재학당에도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아펜젤러와 동행했던 노블선교사는 후일 아펜젤러와 사돈의 관계를 맺은 인물로서 임 목사는 그 후손도 초청, 감동을 선사했고 그들 역시 유물의 일부를 증정해줌으로써 기념관의 면모를 갖추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들어와 신교육 창시와 더불어 삼문출판사를 설립, 독립협회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 최초 한글과, 영문, 중국어 등 3개 언어(三文)로 독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으며 한글 성경 출판에도 앞장섰다. 문맹률이 높던 당시 한글 성경은 기독신앙의 전파와 더불어 민중들의 한글 깨우침과 보급에도 큰 역할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적 이익에도 부합하는 공헌이 된 셈이다.

 

임 목사의 아펜젤러기념관 설립은 한국인을 위해 희생한 아펜젤러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함이었고 그러면서도 국가나 교단의 지원 없이 자율적 헌신으로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이에 공감한 뜻있는 분들로부터 후원금이 답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적으로 교회의 부채부터 청산했다. 그리고 건물 1층 전체를 기념관, 복지관, 교회로 조성하고 방문객 휴식 공간인 작은 카페도 마련했다. 그리고 아펜젤러와 노블 선교사의 숭고한 행적을 홈페이지 및 SNS 홍보와 더불어 스토리텔링으로 정리,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는 연 2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향후 방문객 수는 더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임 목사가 내초마을에 뿌리를 내리면서 가장 맞닥뜨린 문제는 지역의 공동체 회복이었다. 새만금 개발 붐으로 토지 및 어업보상금 등을 손에 쥐게 되면서부터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기 시작하고 이런저런 갈등으로 오랜 기간 경제공동체로서 평화롭던 마을은 이익에 따라 편이 갈리면서 쇠락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이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개발지가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내초마을 역시 지역의 환경문제와 맞물려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그는 지역공동체 회복 차원에서 아펜젤러를 모멘텀으로 보다 평화롭고 살기 좋은 마을 분위기 조성에 적극 주력할 생각이고 주민들의 협조도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내심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따라서 그는 환경문제에 관해 전문지식 습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환경공학도 전공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지구의 환경을 지키는 일은 목사로서의 양심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지역의 인간다운 생존추구와도 결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적으로도 전국 어디를 망라하고 환경과 개발과는 항상 대척 관계에 놓이기 마련이어서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시쳇말로 환경은 돈이 안 되고 개발은 돈이 되기 때문일 게다.

 

임 목사는 환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지역의 환경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발언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로부터 그의 진정성에 대한 일부 오해로 인해 갈등이 빚어진 탓에 안타깝고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풀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익이 아닌 공익, 나보다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종교인의 기본적 양심으로서 그 진정성이 외면 받지 않고 언젠가는 통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게다.

 



 

 

지난 220일 선교기념교회에서는 환경운동연합 군산지회의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날의 총회는 외지에서도 일부 회원이 참석하는 열의를 보여준 가운데 회원들 거수투표로 임춘희, 남대진을 공동대표로 선출하고 6명의 운영위원 임명과 함께 그간의 환경운동 경과와 회계내역을 보고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임 목사는 환경운동에 있어 특히 교회가 앞장서야함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해야 할 교회부터 녹색교회 실천운동을 펼친다는 의미에서 국내 모든 교회의 십자가부터 태양광 전기를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엄청난 에너지 절감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환경운동연합은 모든 환경단체와 더불어 시민운동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역량을 키워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됨을 역설하는 임 목사는 군산만 해도 당면한 문제인 새만금수질을 비롯하여 발전소, 미세먼지 등에 있어 각종 공해 모니터링 장비를 구축함으로써 환경 개선을 위해 관과 유기적 협력 체제를 갖출 예정이라는 말도 들려준다.

 

한적했던 시골 어촌마을이 아펜젤러·노블선교사를 테마로 역사와 문화를 접목함으로써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거듭나기까지 기울인 임춘희 목사의 노력과 헌신은 지금 이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있다. 종교마저 타락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그의 내면에 자리한 이웃 섬김과 사랑의 정신, 맑고 순수해 보이는 인상과 조용하지만 분명하면서도 올곧은 말투에서 이 시대 그리스도 종교인으로서 참다운 사역자라는 느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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