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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된 우크라이나 음악가
글 : 이진우 /
2020.02.01 13:37:2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한국인이 된 우크라이나 음악가

군산시립교향악단

샤샤 & 따냐 부부

 


 

 


고품격의 음악 제공으로 시민의 정서함양에 기여하고 지역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1990년도 창단된 군산시립교향악단(이하 시향). 당시 불과 37명의 단원(초대 지휘자 박판길)으로 출발한 시향이 어느덧 30년의 연륜을 쌓으며 지금의 10대 지휘자(백정현)에 이르기까지 70여명의 단원을 거느린 수준 높은 연주단으로 성장했다. 시향의 매 공연 때마다 유독 시선을 끄는 이국적 용모의 남성 바이올린 연주자인 샤샤(47), 미모의 여성 비올라 연주자인 따냐(44), 외국인으로서 군산시향의 단원인 그들에 호기심을 갖는 이들도 많아 한국 하고도 군산에 둥지를 튼 지 어느덧 18년에 이르는 그들을 만나 군산 정착기를 들어본다.

 

국적이 우크라이나로서 본명이 꼬냐힌 알렉산드로인 샤샤와 스키바 테타냐인 따냐가 서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키예프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대학 음악과 재학 중이었다. 당시 4학년이던 샤샤는 어느 날 연습실에서 2학년생 따냐를 보는 순간 그 미모에 첫눈에 반했다. 이후 샤샤는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폈고 따냐 역시 음악 실력도 출중하면서도 꾸밈없이 순박해 보이는 그 청년의 진심을 확인하고 차차 마음의 문이 열려 교제가 시작되었다.

 

사실 샤샤는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 전문 코스를 밟은 재원으로 5형제가 모두 음악가일 정도로 음악적 분위기에서 성장함으로써 일찍이 남다른 재능을 보였기에 따냐도 그 점을 인정했던 듯하다. 졸업 후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기에 이른다. 이후 샤샤는 본격적으로 연주 활동을 시작, 우크라이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부악장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고, 따냐는 키예프 국립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당시 지휘자는 파가니니 콩쿨에서 수상 경력을 지닌 뛰어난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습득하게 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따냐가 전공으로 비올라를 택한 것은 학생 시절 우연히 어느 비올리스트의 연주를 보게 된 순간 그 아름다운 소리에 반했기 때문이라는데 자신의 팔과 손가락이 긴 것도 비올라에 적합한 장점으로 여겼던 듯하다.

 

제주도에서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

샤샤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002년도, 당시 제주도에서 페스티벌이 있어 연주차 왔다가 당시 군산시향 6대 지휘자인 신현길 씨의 눈에 띄게 된다. 신 지휘자는 유럽에서 온 그 청년의 뛰어난 기량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 지휘자의 거듭된 입단 제의를 받은 샤샤는 결국 객원악장으로 군산시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시향에서 차차 심신의 안정을 찾고 자리를 잡게 되면서 샤샤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아내 따냐에게 거듭된 연락으로 입국을 설득했다. 그에 따라 남편과 떨어져 첫아들과 함께 살고 있던 따냐도 이듬해인 2003년도 군산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생전 처음 와보는 동방의 이국땅에서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군산시향 단원으로 제2의 인생 구가

클래식의 본 고장에서 정통 음악 코스를 공부한 그들의 연주 실력은 샤샤의 경우 시향의 악장을, 따냐는 비올라 수석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공인받았다. 군산은 자연 환경이 잘 갖춰진 여유롭고 편안한 도시였으며 단원들도 친절하게 대해줬다. 화이트칼라인 샤샤의 어머니는 2007년부터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군산에서 18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들에게는 세 아들이 출생, 우크라이나에서 낳았던 첫째까지 아들만 넷을 두었다. 샤샤에 따르면 그 모친의 한국 방문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들이 눈에 밟혀서라는데 그러다보니 이제는 모친의 식성이 한국 음식에 익숙해져 김치를 비롯한 매콤한 음식을 특히 즐길 정도로 변했다면서 웃음을 보인다.

 

귀화 결정으로 한국인이 된 따냐

따냐는 지난 2017년도 귀화 시험에 합격,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샤샤는 언어 문제 때문인지 통과가 안 돼 차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하루 생활을 거의 음악인들 사이에서만 지내다 보니 환경적으로 언어 습득에 한계가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따냐의 경우 자고로 언어 구사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들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인데, 이제 법률적으로는 한국인 아내가 외국인 남편과 동거하고 있는 것이라서 자신이 남편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라며 웃는다.

 

그렇다고 샤샤가 의사 소통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만큼 한국어에 유창하지는 못하지만

어려운 단어나 어휘만 아니라면 웬만한 대화는 가능한 수준으로서 이제는 백반과 청국장도 즐길 정도로 한국인이 다 되었다. 큰 아들은 올해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외국어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러시아어, 중국어 등에 능통한 차남은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아직 초등생인 셋째, 넷째까지 4남을 둠으로써 인구 절벽에 직면한 지금의 대한민국 출산 장려 정책으로 볼 때 그들이야말로 국가 정책에 적극 동참하는 최고의 애국자 가정이 아닌가 한다.

 

이제 그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음악적 환경이 좀 더 개방되어 보다 폭 넓게 연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자신들도 이제 명실상부 한국인이 되었으므로 제약 없이 좀 더 시민들 곁으로 다가가 음악을 제공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들을 따뜻이 받아준 한국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에도 구암동의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근대역사박물관, 쌍천 이영춘 박사 추모제 등에서 기꺼이 수준 높은 연주로 재능기부를 펼친 그들의 연주를 앞으로도 좀 더 다양한 공간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민들 모두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공연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연주 간간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주고받는 그들의 다정스런 눈 마주침과 열정적 연주 호흡은 금슬 좋은 부부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확인 같다. 군산 생활 어언 스무 해에 이르는 동안 많은 공연 무대에서 시민들을 만나다 보니 이제는 자신들을 알아보고 친절히 대해 주는 사람도 많아 감사한 마음을 갖기도 하지만 따냐의 경우 때로 지나친 관심 표명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고 귀띔해주기도 하는데 이는 정이 많은 한국 사회와 사생활을 존중하는 서구문화와의 다름에서 오는 관념의 차이로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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