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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伽倻), 양지로 나오다” -전북가야는 백두대간 속 첨단과학-(1)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장 곽장근 교수
글 : 오성렬 /
2019.03.01 17:05:1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가야(伽倻), 양지로 나오다”

-전북가야는 백두대간 속 첨단과학-(1)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장 곽장근 교수

글 오성렬(主幹)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제국 ‘가야(伽倻)’가 무덤을 깨고 밖으로 나오고 있다. 한반도 남쪽, 지금의 경상도 남부와 전라도 일대에 터전을 잡아 서기 562년 신라에 멸망하기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약 500여 년 이상 존속되었던 가야는 그 자신의 주체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언급이 없거니와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잠깐 등장하는 기록들도 제각각이어서 우리 후대는 가야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지 못해 왔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4C후반 한반도 남쪽 지역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C중엽까지 약 200여 년간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였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部說)을 내세우는 일본 측 일부 사학자들의 억지 주장이 제기됨으로써 양국 간 역사 전쟁이 지속돼 왔는데 하지만 임나가 어느 지역인지 명확치 않고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어떠한 고증 자료도 발견되지 않는 반면에 금세기 들어 가야의 고분과 유물이 대거 발견되고 그 범위도 광범위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국정수행 100대 과제 안에 ‘가야’를 포함시킴으로써 지자체에서도 관련 예산을 편성하는 등 앞으로 이에 관한 연구가 본 궤도에 오를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듯 가야에 관한 실증적 조명사업은 역사 속 가야를 통하여 영,호남 간 통합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간의 가야 관련 연구는 거의 영남 학자들이 주도함으로써 관련 사료도 영남을 중심으로 축적되었고 학자 비율로만 보더라도 영남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호남은 거의 없을 정도로 호남 지방에서의 가야에 관한 연구는 걸음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다.  사학자인 곽 교수가 가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약 37년 여 전. 당시 아무도 가야에 관해서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가야에 매달렸다. 

 

그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갖는 학문적 갈증이기고 했고 무엇보다 가야의 실체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서였을 터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남원, 장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북도 일대와 충남 일부 지역까지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가야의 유적을 찾아 헤맸고 수많은 유적, 유물을 발견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가야의 영토와 세력권이 경상도지역 뿐만 아니라 호남일대에까지 미쳤음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규명에 천착(穿鑿)했는데 앞으로 남은 과제도 산적하여 관련 연구와 사업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곽 교수는 얼마 전 전주의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도립예술단원 대상 2시간에 걸친 가야 관련 특강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게 하는 감명과 함께 큰 박수를 받기도 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 강의 내용을 실어 독자들에게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1.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 기문국(己汶國) / 전북가야


2017년 남원시와 장수군을 중심으로 임실군, 순창군, 진안군, 무주군, 완주군, 충남 금산군에서 학계에 보고된 모든 가야의 유적과 유물을 하나로 묶어 ‘전북가야’라고 명명했다. 산경표(山經表/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조선의 산맥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속 전북가야는 가야의 지배자 무덤으로 알려진 중대형 고총 420여 기,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철유적 230여 개소, 횃불과 연기로 신호를 주고받던 100여 개소의 봉수로 상징된다. 

 

삼국시대 가야 왕국들이 백제의 중앙과 교류, 교역하던 간선교통로가 전북가야를 통과하거니와 전북 동부지역을 무대로 치열하게 펼쳐진 백제와 가야, 신라의 역학관계는 대체로 철(鐵)산지의 장악 및 간선교통로의 관할과 관련이 깊다. 그리하여 전북 동부지역에서는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물이 공존한다. 

 

요즘 고고학계의 이목이 온통 철산지인 운봉고원으로 쏠리고 있다. 2010년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에 위치한 남원 월산리 M5호분에서 중국제 청자인 계수호(鷄首壺)가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인데 백제왕의 주요 하사품으로 알려진 최상급 위세품(威勢品)의 하나로 종전에 공주 수촌리, 천안 용정리, 서산 부장리 등 백제의 영역에서만 나온 것이다. 

 


 

 

신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출토품과 흡사한 철제초두(鐵製鐎斗)를 비롯하여 금제 귀고리, 갑옷과 투구, 경갑, 기꽂이 등 가야의 위신재(威身財)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남원 유곡리·두락리 32호분에서는 공주 무령왕릉 출토품과 흡사한 수대경(獸帶鏡)과 금동신발이 출토됐는데 이는 모두 가야의 영역에서 한 점씩만 나온 최고의 위세품들이다.

 

고령 지산동과 합천 옥전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제외한 가야 최고의 위세품이 대부분 운봉고원에서 나왔다. 가야 고총에서 최초로 계수호와 철제초두가, 남원 월산리에서 금동신발과 청동거울이 남원 유곡리·두락리 32호분에서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운봉고원의 역사성과 함께 그 위상을 최고로 높였다. 

 

이것만으로도 백제가 대규모 철 산지이자 문물교류의 관문으로써 운봉고원을 얼마나 중요시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운봉고원 철의 생산과 유통이 담긴 물물교역, 즉 현물경제의 증거물이 아닌가 싶다. 이에 근거하여 운봉고원에 지역적 기반을 두고 가야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운봉고원의 ‘운봉가야’를 기문국(己汶國)으로 부르고자 한다. 중국과 일본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가야 소국이 기문국이다.

 

운봉고원의 기문국이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1982년이다. 그해 광주와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공사에 포함된 가야 고총에 대한 구제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백제의 대형고분일거라는 고고학자들의 당초 예상과 달리 그 조영주체가 가야로 밝혀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에 지역적 기반을 둔 가야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역사적인 명소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원 월산리에는 봉분의 직경이 20m내외 되는 10여 기의 가야 고총이 무리지어 있었는데, 1970년대 농지정리사업으로 3기의 고총이 유실되었고 1982년과 2010년 두 차례의 구제발굴을 통해 그 전모가 파악됐다. 남원 월산리 M5호분은 현재 매장주체부의 내부가 노출된 상태이고 M6호분은 원형의 봉분이 잘 정비되어 있다. 최근에는 월산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감은 산줄기 정상부에 10여 기의 가야 중대형 고총이 더 분포된 것으로 밝혀져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1,500년 전 기문국의 지배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신과 유물을 부장하기 위해 돌로 매장 공간을 만들었는데, 월산리 M5호분은 그 길이가 960cm로 고령 지산동 등 타 지역의 가야 고총들보다 상당히 크다. 

 

이토록 매장주체부의 길이가 큰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죽어서도 살아생전의 권위와 신분을 그대로 누릴 것이라 믿었던 당시 계세사상(繼世思想)이 널리 유행했기 때문인데 이는 운봉고원에서 철의 왕국으로 융성했던 기문국의 발전상을 뒷받침해주는 유일무이한 고고학적 증거로서 아직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하여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산줄기 정상부가 아닌 구릉지에 입지를 두어 다른 가야 분묘유적과 큰 차이를 보인다. 운봉고원의 아영분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풍천을 사이에 두고 아영면 월산리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인월면 유곡리, 아영면 두락리가 있는데 이곳에도 40여 기의 가야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면담조사 때 인월면 유곡리 성내마을 주민들이 “본래 고분들이 훨씬 더 많았는데, 1960년대 밭 개간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대부분 없어졌다”고 증언해 주기도 했다. 유곡리·두락리에는 봉분의 직경이 30m이상 되는 초대형급 가야 고총도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어 당시 철의 왕국이었던 기문국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융성했다는 발전상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리고 40여 기의 가야 고총이 한곳에 무리지어 있는 것이 운봉고원의 기문국이 상당 기간 존속했음을 방증해 준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가야 고총은 아영분지 한복판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 정상부에 그 입지를 두었다. 월산리가 구릉지에 입지를 둔 것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기문국 수장 층의 분묘 유적을 월산리에서 유곡리·두락리로 옮긴 이후 대가야 등과의 결속력이 더 강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사방에서 한눈에 보이는 산줄기 정상부에 자리한 것은 봉분이 마치 산봉우리처럼 거대하게 보이게 한 데서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나 권위를 극대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토록 고구려와 신라의 왕릉이 구릉지와 평지, 백제가 산봉우리 남쪽 기슭에 왕릉을 조성한 것과 다른 것은 삼국과 구별되는 가야만의 독자적인 장례문화와 풍습이 있었던 고고학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지표조사를 통해 운봉고원에서 발견된 말무덤과 가야 중대형 고총은 180여 기에 달한다. 남원 입암리 말무덤 발굴조사에서 마한의 지배층 분구묘로 밝혀진 말(몰)무덤이 운봉고원의 운봉읍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운봉읍 장교리 연동마을 입구 구릉지 정상부에 봉분의 직경이 10m내외되는 7기 가량의 말무덤이 있었는데 오래전 농경지 개간으로 대부분 유실됐고 현재 3기만 유구가 심하게 훼손된 채 남아 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교리 연동마을 입구 논 가운데에도 마치 섬처럼 한 기의 말무덤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말무덤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이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기문국이 등장하기 이전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기원전 84년,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71년 동안 철산개발로 힘을 키운 마한 왕의 세력집단이 백두대간 정령치를 넘어 운봉읍 일대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장교리 말무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남원 임리에도 가야 고총이 무리지어 있으며 백두대간 고남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정상부에 봉분의 직경이 15m내외 되는 40여 기의 가야 중대형 고총이 모여 있는데 마한의 말무덤과 가야 고총의 분포양상을 근거로 본래 운봉읍에 있었던 운봉고원의 중심지가 아영분지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중앙과 경남 서부지역을 이어주던 한성기 간선교통로인 백두대간 치재로가 아영분지 내 남원 월산리·유곡리·두락리를 통과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운봉고원 서쪽 섬진강유역에서 말무덤은 남원 도룡리·입암리·방산리, 순창 고원리, 곡성 주산리에서 그 존재가 확인 됐다. 본래 30여 기의 말무덤이 섬진강 중류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섬진강 상류 및 하류 지역에서는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말무덤이 자취를 감춘 이후 섬진강 유역에서는 수장층과 관련된 어떤 종류의 분묘 유적도 더 이상 조영되지 않고 있다. 

 

말무덤의 존재와 그 발전과정을 근거로 백제의 진출이 섬진강 유역으로 5세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운봉고원의 중심지가 운봉읍에 있었을 때에는 백두대간의 여원치가 섬진강 유역과 교류하는데 관문의 역할이 아니었던가한다. 

 

그러다가 5세기를 전후하여 기문국의 등장과 함께 운봉고원의 중심지가 운봉읍에서 아영분지로 이동하게 된 것은 이 지역으로의 백제의 진출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이 무렵부터 백제의 중앙과 가야를 이어주던 한성기 백제의 간선교통로가 치재를 통과하면서 치재가 운봉고원의 관문으로 그 몫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백제와 가야를 하나로 묶는 문물교류의 교섭창구이자 내륙교통망의 허브역할을 담당하면서 줄곧 교통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운봉공원은 대규모 철산지로 사통팔달했던 교역 네트워크를 갖춘 곳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가야 소국으로 발전했던 철의 왕국 기문국은 세 가지 점에서 강한 지역성을 보였다. 하나는 봉분의 중앙부에 하나의 매장주체만 배치된 단곽식이고, 다른 하나는 봉분의 가장자리에 호석시설을 두르지 않았고, 또 다른 하나는 매장주체부가 지상식 혹은 반지하식이라는 점이다. 남원 월산리·유곡리·두락리를 중심으로 한 함양 상백리·백천리, 산청 생초·중촌리, 장수 삼봉리·동촌리 가야 고총은 봉분의 가장자리에 호석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장수 삼봉리·동촌리를 제외하면 다른 가야 고총군은 모두 남강 중류지역에 집중되어 하나의 분포권을 형성한다. 아마도 운봉고원을 중심으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일대에는 서로 긴밀한 교류관계를 바탕으로 동일한 문화권 및 생활권을 형성했던 가야 소국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천 봉계리 등 고령 지산동 서쪽의 가야 고총은 대가야 양식 토기가 주종을 이루는 단계에 접어들면 자취를 감춘다든지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철의 왕국으로 융성했던 운봉고원 내 남원 유곡리·두락리의 경우만 유일하게 봉분의 규모와 매장주체부가 축소되지 않거니와 그 이전 단계의 발전 속도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대형화 되었다. 

 

아울러 가야 고총에서 최초로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철제초두를 비롯하여 철기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철기류가 운봉고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동시에 기문국 지배자의 시신을 모신 목관에 사용된 꺽쇠는 가야 영역 출토품 중 그 크기가 가장 크다.

 

그런데 운봉고원 가야 고총은 매장주체부의 내부구조가 수혈식에서 횡구식 또는 횡혈식으로 바뀐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2호분은 매장주체부가 횡혈식 석실분으로 남쪽 기슭 맨 하단부에 자리한다. 봉분의 중앙부에 축조된 석실은 아래쪽이 수직에 가깝고 그 위로 올라가면서 모든 벽석을 같은 비율로 좁혀 1매의 천정석으로 덮었다. 

 

연도의 위치를 제외하면 유구의 속성은 대체로 공주 송산리 3호분과 상통한다. 급기야 가야 중대형 고총의 내부 구조가 백제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에는 수혈식에서 횡구식 및 횡혈식으로 바뀜을 알 수 있다. 이는 기문국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5호분에서 나온 은제목걸이와 은제구슬, 유리구슬, 탄목구슬에서 무령왕릉 출토품과의 관련성도 입증됐다. 가야 고총에서 무령왕릉 출토품과 흡사한 백제계 유물이 상당량 나왔기 때문에 백제 웅진기 이른 시기부터 백제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운봉고원에 강하게 미쳤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운봉고원을 통과하던 백두대간의 치재로를 따라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본격 진출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치재로는 백제의 중앙과 경남 서부지역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던 삼국시대 문물교류의 고속도로이자 대동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운봉고원의 기문국에서 만들어진 니켈이 함유된 양질의 철(鐵)도 백두대간의 치재로를 따라 널리 유통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원 임리에서도 백제묘제의 수용이 확인됐다. 백두대간 고남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줄기 정상부에 입지를 둔 임리 1호분은 봉분의 중앙부에 주석곽이 배치됐고, 그 동북쪽에 2기의 순장곽이 자리한 다곽식이다. 주석곽은 산줄기와 평행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그 출입구가 남쪽에 마련된 횡구식이다. 

 

수혈식에서 횡구식으로 주석곽의 내부구조가 바뀌었고, 유구의 장축방향에서도 백제묘제와의 친연성이 확인됐다. 백두대간 산줄기 동쪽, 즉 가야의 영역에서 백제묘제가 가장 일찍 수용된 곳이 운봉고원이다. 그만큼 운봉고원의 기문국은 백제의 선진문화와 선진문물이 가야 영역으로 전파되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운봉고원의 일대가 6세기 전반 이른 시기 백제 무령왕 때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됨으로써 철의 왕국 기문국은 521년 이후부터는 더 이상 문헌에 등장하지 않게 된다. 백제는 기문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함에 따라 그 주도권을 일시에 상실하고 만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2호분, 아영면 봉대리 2호분에서 나온 신라의 단각고배를 근거로 6세기 중엽 경 운봉고원이 신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562년 대가야를 비롯한 백두대간 동쪽 가야 소국들이 모두 신라에 정치적으로 복속되면서 마침내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형성됐다. 그러다가 이후 무왕 때 20년 이상 백두대간에서 지속된 신라와의 아막성 전쟁도 운봉고원의 철산지를 탈환하기 위한 ‘철의 전쟁’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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