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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개복동 일대, 1930년대 모습은 어땠을까 일제강점기 군산 개복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글 : 조종안 / chongani@hanmail.net
2016.03.25 17:38:5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전북 군산(群山)은 일제 식민 지배를 전국의 어느 도시보다 처절하게 겪었다. 따라서 탄압과 저항, 수탈의 생채기도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근대사의 축소판 같은 도시 군산. 그 도시 중앙의 개복동(開福洞)은 토막집과 불량주택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빈민촌이었다. 채만식은 소설 <탁류>에서 조선 사람들이 어깨를 비비며 옴닥옴닥 모여 사는 달동네로 묘사한다. 저항과 쓰라린 수탈사가 공존하는 그 공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기자말-


 

“보라! 개복정(개복·창성동), 약송정(개복·선양동), 산상정(선양동), 둔율정(둔율동·둔뱀이) 일대를! 그 중에도 고지대를! 다시 말하면 조선인 빈민지대를! 거리마다 오물이 산적하여 있으며, 변소의 분뇨가 도로에 일류(溢流)하여 통행인으로 하여금 코를 들지 못할 지경이오. 눈으로 그것을 볼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고 몸소름이 나게 될 때에 정신적으로 얼마나 손실이며 위생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아래 줄임)” 1936년 8월 20일 자 <동아일보> 지방논단에서 


 

<탁류>가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1년 전, 군산의 조선인 빈민촌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구구절절 가슴을 후빈다. 악덕 일본인 대농장주의 횡포에 시달리는 어느 소작농의 절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사가 말하듯 당시 개복정 고지대는 토막집 수백호로 메워져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하였다. 옛 노인들 전언에 따르면 구정물이 튀기는 것은 예사이고, 가로등도 없어 달빛이 없는 음력 초순이나 그믐밤에는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한다. 그 같은 현상은 십 년, 이십 년 후에도 개선되지 않는다. 

 

일제가 민심 회유책으로 설립한 군산 도립병원 통계도 눈물겹다. 1935년 상반기 도립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받은 조선인 환자가 3만9412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그중 위생이 불결한 빈민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아병과 피부병 환자가 수위를 차지한 것. 당시 군산의 빈민촌 조선인들은 실업자 아니면 부두 노동자, 지게꾼, 매갈잇간(도정공장) 인부, 정미소 미선공(米選工), 인력거꾼 등 하루 벌어 끼니를 겨우 연명하는 하루살이 인생들이었다. 

 

전의용(1897~?) 군산부 의원은 1938년 3월 24일 의회에서 ‘조선인 주거지역(지금의 개복, 둔율, 창성동 등)의 도로와 하수구 시설을 절실히 희망하였음에도 철저히 외면하고 예산을 편성한 것은 부청의 무성의를 보여주는 것이며, 소등된 곳곳의 가로등을 1년이 넘도록 방치하고 있어 통행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조선인 동네에 병원이 없는 것을 지적하며 행려병자 구호소에는 조선인 의사를 발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전의용은 군산 야구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광복 후 대한야구협회 회장(1964~1966)을 지냈다. 

 

일본인은 3~4명, 조선인은 10명에 집(宅) 한 채

 

전북지역 7개 고을(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세곡(稅穀)을 뱃길을 이용해 서울로 올려 보내던 군산창(群山倉)이 고종 32년(1895) 폐지된다. 이후 한적한 어촌으로 전락한 군산은 개항(1899) 후 미곡 이출항으로 발전을 거듭하며 번영을 누린다. 그러나 일본을 위한 잔치에 불과했음이 여러 통계자료가 말해준다. 일본인들에게는 천국이자 ‘쌀의 엘도라도’였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지옥보다 더한 고통의 세계였던 것. 



 

일제는 군산 개항 35주년(1934)을 맞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른다. 후손들도 자신들처럼 이 땅에서 영원히 번영하길 염원하며 지금의 월명공원 대사산 중턱에 기념탑을 세운다. 각종 전람회와 품평회, 체육대회를 개최한다. 군산의 역사(1899~1934)를 정리한 <군산부사>(356쪽)도 발간한다. 행사기간(10월 11일~17일)에 군산을 찾은 방문객은 10만 여명. 그처럼 ‘호남의 웅도’ 소리를 들으며 약진하는 군산의 이면에는 인간생활권에서 축출당한 대다수 조선인들의 참담한 생활상이 늘 존재하였다. 

 

1934년, 그해 군산 인구는 3만6959명(조선인 2만7144명, 일본인 9408명, 기타 407명)으로 세금에서도 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엿보인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1935년 군산의 호별세(戶別稅·일제가 집집이 물리던 지방세) 총액은 3만9369원 20전. 그중 일본인 납부액은 2만8626원 80전(2270호)으로 호(戶)당 평균 12원 60전이었다. 반면 조선인 납부액은 1만0742원 40전(2940호)으로 호당 3원 60전에 불과했다. 인구비례 일본인은 3~4명, 조선인은 10명에 집 한 채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막만한 지붕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개복동 고지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 <탁류>는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의 주택 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언덕 비탈을 의지하여 오막살이들이 생선 비늘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상상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님(明姙)이네가 도통 오 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 가지고, 건넌방은 따로 '먹곰보'네한테 이 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 대지가 일곱 평 네 홉이니, 안방 세 식구, 건넌방 세 식구, 도합 여섯 사람에 일곱 평 네 홉인 것이다.”

 

글을 몰라 집을 압류당하기도

 

개복정이 가장 가난한 동네였음은 땅값에서도 잘 나타난다. 1924년 군산상업회의소가 조사한 군산부 지가(地價) 조사에 따르면 개복정 희소관(전북 최초 영화 전문 상영관) 부근은 한 평에 5원~40원, 개복정 서부 지역은 3원~15원으로 신흥동(8원~15원)과 함께 가장 낮았다. 반면 명치정 경찰서 부근은 55원~100원, 일본인 상가(商街)가 즐비했던 전주통은 75원~100원이었다. 채만식이 <탁류>에서 ‘군산의 심장부’라 칭했던 본정통(관공서 거리)은 100원을 웃돌았다. 같은 도시임에도 평당 30배 이상 차이가 났던 것.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1934년 9월 현재 군산의 불량주택(가는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얽어맨 기둥에 담 대신 가마니로 둘러막은 가옥) 거주자는 1만8586명(5000호)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토막집 거주자는 1214명으로 전국 2위) 1937년 10월 조사에서도 불량주택 거주자가 1만 3552명(3637호)으로 3년 전보다 조금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전국 1등이었다. 2등은 경성(1만1967명), 3등은 부산(2549명) 순이었다. 당시 전라북도 불량주택의 80%가 군산에 몰려 있었고, 그 가긍할 정경은 참으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다.

 

1934년은 군산항을 통한 일제의 쌀 수탈이 200만 석을 넘어선 해였다. 그러나 이듬해(1935) 군산의 실업자는 2000명에 달하였다. 끼니때마다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유리걸식’하는 조선인도 500명을 넘었다. 그해 군산의 보통학교 취학적령기(7~8세) 아동은 1689명. 그중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329명이 입학하였다. 1930년대 군산은 조선인 문맹자가 80%에 육박했으며, 수백, 수천의 아이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눈물겨운 참상이 해마다 연출됐다.

 

글을 몰라 건물을 압류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개복정 1정목에 사는 이다래씨는 1935년 4월 28일 주택을 1100원에 구입하고 부동산취득세 7원을 내지 않았다. 이씨는 군산 부청(府廳)이 보낸 건물 차압 통지서를 받았으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고지서를 본 이웃이 6월 14일 오후 2시까지 납부하면 된다고 하자 허겁지겁 돈을 마련해 부청에 갔다가 이미 520원에 경매로 넘어간 사실을 알았다. 개복정 2정목에 사는 이춘식씨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이를 지켜본 주민들의 불만이 높았으나 일본인 부청 직원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식민치하의 서러움이라 하지만, 너무도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빈민촌이자 조선인 교육 중심지였던 동네 

 

피난민촌 같았던 개복정. 그렇다고 전체가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형제화가로 널리 알려진 황씨 4형제(우석 황종하, 우청 황성하, 청몽 황경하, 미산 황용하)가 운영하는 서화연구소도 있었다. 그들은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1924년 군산으로 이주, 개복정에 연구소를 개설한다. 그리고 공회당에서 3년(1925년, 1926년, 1927년) 연속 전람회를 열었다. 1930년 12월에는 <동아일보> 후원으로 시내 횡전정(신창동) 서본원사(일본식 절)에서 전람회를 가졌다. 회비를 받았음에도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소화통, 명치정, 횡전정 등과 인접한 개복정 1정목에는 영화관이 두 개(군산극장, 희소관)나 있었다. 병원, 악기점, 양복점, 사진관, 여관, 음식점 등의 간판도 보였다. 일본식 절 대음사(군산사)를 비롯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군산지국, 공설질옥(공설전당포), 보성권번(예기조합)도 있었다. 대부분 고지대인 2정목에는 미선조합(米選組合) 사무실, 영신여학원(영신유치원 전신), 적성야학교, 계화여학당, 양영학교(청년야학교) 등 조선인 야학들이 자리했다. 

 

그중 영신여학원은 1923년 여름 군산을 방문한 하와이교포 야구팀 환영식을 비롯해 불우이웃돕기 음악회, 가극회 등 다양한 행사로 반향을 일으켰다. 적성야학교(교장 한상계)는 시내 정미소 미선공들 단체인 미선조합이 800여 조합원의 성금과 개인, 사회단체 지원으로 1921년 설립한 야학이었다. 적성야학은 1922년 한상계 교장이 따로 설립한 계화여학당과 교육활동 사진대를 조직해 전남북 지역을 순회하며 계몽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양영학교(養英學校)는 경술국치(1910) 이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추진된 교육구국운동의 결과로 1918년에 설립된 무산아동 교육기관이었다. 초창기 교명은 ‘군산청년야학교’. 문맹률이 80%를 웃돌던 시절, 보통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한글, 수학, 일어 등을 가르쳤다. 초기엔 3년제였으나 1933년 9월 수업을 2부제(주간 여학생, 야간 남학생)로 개편하고 교명을 양영학교로 변경하면서 4년제가 된다. 

 

옛날 신문은 양영학교 교사들이 여름방학 중에도 매일 오전 8시~10시까지 산술법과 조선어 서간문 작성 등을 중심으로 보충수업을 시행해서 시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고 전한다. 대부분 고학생이어서 취업과 계몽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던 이 학교는 1936년 재정난으로 폐교된다. 당시 잔여학생 100여명과 학부모들이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한다. 

 

콩나물고개를 경계로 이웃한 둔율정(둔율성당 부근)에는 1907년 ‘옥구 군산항 민단’이 설립한 금호학교(今湖學校)가 있었다. 금호학교는 을사늑약(1905)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근대교육의 전당이었다. 군산항 민단 설립에 앞장섰던 옥구 부윤 이무영을 주축으로 세워졌으며 초기에는 ‘군산항 민단강습소’로 불리다가 1908년 학부대신이 다녀간 뒤 ‘금호학교’로 개칭하였다. 

 

금호학교(교장 조병승)는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중등교육기관으로 유수한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가 수학했으며, 조선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김철수도 이 학교 출신으로 알려진다. 호남에서 유일한 민족 교육기관이었던 금호학교는 대한제국 국권이 일제의 손아귀로 완전히 넘어가는 1910년 폐쇄되고 학교 재산은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흡수된다. 

 

개복정의 조선인 야학들은 문화·체육 공간 역할도 하였다. 중앙 언론사들이 유명한 요리연구가를 초빙하여 주부들 대상으로 서양요리강습회(양식, 중국식, 간이요리와 양과자 만드는 법 등)를 열었다. 영신유치원에서는 팬들의 뜨거운 응원전과 환호 속에 도시 대항(군산 농구구락부-전주ABC팀) 농구 경기가 펼쳐지기도. 그 외에 군산을 방문하는 외지 손님 환영대회와 간담회 등이 열렸다. 일제강점기 개복동은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빈민촌이자 조선인 교육 중심지였던 것.

 

게다짝 소리 사라진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것 없어 

 

개복·창성·선양·둔율동 일대는 월명산(105m)에서 뻗어 내려온 야트막한 산줄기를 등지고 옹기종기 들어선 초가들이 고즈넉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능선이 끝나는 지점은 지금의 평화동 부근으로 중간에 고개가 네 개나 됐다. 서낭당고개(형무소고개), 선양동고개(산 끊어진 고개),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 군청고개(둔율동고개) 등이다. 그중 서낭당고개와 콩나물고개는 조선 시대부터 있었고, 군청고개와 선양동고개는 일제가 산을 절개해 도로를 내면서 고갯길이 만들어졌다. 

 

‘개복정 말랭이’의 본래 지명은 노서산(老鼠山)이었다. 산기슭에는 ‘빙주대신부처’(憑主大神夫妻)와 삼신(李公, 吳公, 趙公)을 모신 신당(神堂)이 있었다고 한다. 해마다 정월에 당제를 지냈으나 민속 행사를 통한 주민들의 결집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제의 방해로 1930년대에 그 맥이 끊긴다. 조선 숙종 27년(1701)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도 신당이 표시된 것으로 미루어 200년 넘게 내려왔던 전통 문화행사로 여겨진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근대식 건물, 위생시설 등 제법 문화도시 모습을 갖춘 본정통, 전주통, 군산공원 아랫동네(금동), 월명산 아래 주택단지(월명동) 등에 빗대면 개복동, 둔뱀이는 한 세기나 뒤떨어져 보인다고 논한다. 한 세기라니, 100년이 지난 뒤라도 이 동네 사람들이 그 지역만큼 문화생활을 영위하게 될지 의문을 품는다. 그의 우려대로 80년이 지난 오늘의 개복동 거리는 하오리(羽織) 차림의 일본인과 게다짝 소리가 사라진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게 없다. 

 

1900년대 초 산수정(명산동)에 대규모 유곽단지가 들어서자 개복정 2정목(지금의 창성동)에 조선인을 상대하는 ‘은군자 마을’(주점 골목)이 만들어진다. 소설 <탁류>에서도 명님이와 남승재를 통해 1930년대 술집골목 풍경이 애잔하게 그려진다. 은군자 마을은 광복을 전후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윤락가(집장촌)로 변신한다. 1948년 공창제도 폐지와 함께 명산동 유곽에 있던 조선 여성들이 옮겨오고 한국전쟁(1950~1953)을 거치면서 더욱 확장된다. 

 





 

지대가 높아 ‘오백고지’로, 밤이면 불야성을 이뤄 ‘꽃집’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곳의 윤락업소 여성들은 1970년대 후반 당시 유신정부가 달러 획득을 명분으로 도선장 부근에 설치한 세일러하우스(선원 상대 윤락업소)로 대부분 옮겨간다. 남은 업주들이 불법영업을 해오다 꽃다운 여성 14명이 생죽음을 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2002년 1월 29일의 ‘군산 개복동 성매매업소 화재사건’이 그것이다. 그 후 산을 일부 깎아내고 2006년 임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오늘에 이른다. ‘예술의 거리’도 조성된다고 한다.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옛날신문(1920~1940), <군산시사>(2000), <군산부사>(1935), 한국향토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군산야구 100년사>(2014) 

사진제공: 군산시/ 동국사(주지 종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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