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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과 인근 3개 시군지역 팸 투어를 다녀와서
글 : 조종안 (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5.05.01 13:12:0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1930
년대 군산 거리에서 맛본 일제식민지 아픔

새만금과 인근 3개 시군지역 팸 투어를 다녀와서

 

 

새만금 지역 사업시행자 지정 요건과 외국인 투자, 기업, 고용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새만금특별법개정안이 지난 47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전라북도와 군산시는 오랜 숙원이 풀렸다고 반기며 정부가 새만금사업 추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심의·의결함에 따라 투자 활성화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중 경제협력단지가 들어설 새만금지구 진입 장벽이 낮아짐으로써 외국인 기업 투자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번 개정안은 지난해 정부가 한·중 경제협력단지 조성 등을 통해 외국인과 민간 투자를 적극 유치하기 위해 새만금종합개발계획(마스터플랜)을 변경하자 전라북도가 이에 맞춰 제시한 효율적인 활성화 대책을 개정안에 담은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세계 최장을 자랑하는 새만금방조제(33,9km) 홍보와 창조경제 실현을 위해 본격적인 행보에 돌입한 전라북도는 지난 326~27(12) 한국 언론인총연합회(회장 이동구) 20여 회원사(대표와 기자)를 초청, 새만금 지역(군산시, 김제시, 부안군 일원)을 연계한 테마관광코스를 선정해 팸 투어를 진행하였다.

 

첫 코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첫 코스는 군산시 장미동에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아래 박물관). 입장하기 전 온갖 풍상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한 석조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은적사 삼층석탑(선종암 삼층석탑)이다. 은적사 뒷산기슭 선종암에 있었는데, 군산 제1수원지 공사(1912~1915) 때 절이 폐사되자 당시 수원지 관리사무소에 보관하다 지금의 월명공원 전망대 부근으로 옮겼다.

단정하고 정결한 모습의 은적사 삼층석탑은 군산에 몇 안 되는 소중한 고려 시대 유물이었다. 그런데도 철부지 아이들의 놀이기구가 되었고, 무지한 상춘객들은 함부로 훼손했다. 어느 날 신문에 '소중한 역사 보물 관리소홀'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1976년 은적사로 옮겼다가 2011년 박물관 개관과 함께 위탁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래는 박물관에 상주하는 군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설명이다.

 

박물관에 오시는 분들의 눈을 사로잡는 게 저쪽 어청도 등대와 19459월 어느 날 장항 쪽에서 항공 촬영한 대형사진입니다. 일제강점기 군산 모습 그대로죠. 일본인들이 만든 어청도 등대는 등록문화재 378호로 지정됐구요. 사진 오른쪽 깔끔한 시가지가 군산이 개항하던 해(1899) 지정된 조계지(외국인 전용 거주지)입니다. 외국인과 한국인 거주지가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구요. 조계지는 지금의 원도심권으로 군산시가 자원화하고 있고, 도시재생사업 지구로 선정된 지역이기도 합니다···.”

 

2011930일 개관한 박물관은 지하 1, 지상 4층 건물로 해상물류 유통 중심지이자 수탈의 도시였던 군산(群山)의 옛 모습과 미래를 한눈에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1층은 해양물류역사관으로 실물의 80% 크기로 재현한 어청도 등대를 비롯해 군산 지역에서 발굴된 석기시대 유물, 고려·조선 시대 조운·조창·객주 및 해양문화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고려 시대 전라도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곡(세금)을 군산 진성창에 보관했다가 개경(개성)으로 운반하던 조운선(漕運船)에 대해서도 해설을 들었다. 18세기 말 <각선도보>에 실린 기록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제작(1/3 크기)했다는 조운선에 올라 시뮬레이션을 작동하여 운항을 3차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서해안 일대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조선 세종 8(1426) 고군산 수군진을 옥구군 북면지역인 진포(지금의 군산)로 옮겨 군산진이라 하였다. 당시 군산진은 정6품 수군만호가 관리했다. 성종 18(1487)에는 지금의 박물관 인근에 군산창이 설치되고, 호남의 중심 조창이 된다. 조운선과 수많은 장삿배, 어선들이 왕래하던 군산창과 군산포는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진다.

 

1층 어린이박물관은 군산 바다여행’, ‘바닷가 친구들’, ‘바다 도시 군산으로 구성되어 호기심 많은 어린이에게 인기가 좋단다. 군산의 섬, 등대 만들기, 물고기야 놀자, 인포메이션, 서해안 어류, 산업 일꾼 크레인, 갯벌 생물, 영양 듬뿍 수산물 등 눈높이에 맞는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증진하는 데 목적을 둔 체험학습 공간이다.

 

일제 수탈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근대생활관'

 

1930년대 군산의 원도심권 모습을 재현해놓은 세트장과 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근대생활관(3)70~80년 전의 군산을 여행하는 느낌을 준다. 조선 빈민들이 살았던 움막집(토막집)을 비롯해 영동상가 입구에 있던 하나야 인력거 차방, 홍풍행(잡화점), 미두장(미곡취인소), 형제고무신점, 야마구찌 술 도매상, 부잔교(뜬다리), 군산좌(군산극장), 영명학교, 임피역, 군산역 등이 일제강점기의 짠한 향수를 자극한다.

 

땅을 파고 볏단으로 지붕을 씌운 움막집은 농토를 일제에 빼앗기고 빈민으로 전락한 조선 백성들의 비참했던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자료에 의하면 19349월 당시 군산의 토막집 거주자는 경성(서울)에 이어 2위이고, 인구 대비 전국에서 1위였다 한다. 당시 움막집에 사는 조선인 남자들은 부두와 거리 노동자로, 여자는 일본 집 식모나 미선공으로 생활을 근근이 이어갔다 한다.

 

군산역 건물도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 191236일 군산선이 개통될 때 북한의 평양역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졌다는 군산역은 외부에서는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1층과 2층이 트여 높고 넓은 대합실을 갖춘 큰 역이었다 한다. 군산역 광장에는 군용초소 모양의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고, 전자식 전화기가 한 대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 통화에 2전으로 통화시간은 제한이 없었단다.

 

1914년에는 군산에 전북 최초로 극장이 세워진다. 조선 총독부 철도국이 펴낸 <호남선>군산에는 군산좌와 명치좌 두 곳의 극장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중 명치좌는 도심지 명치통(중앙로 1)에 있었다는 것만 확인될 뿐 정확한 위치와 개관일은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죽성동 구 서해방송국 뒤에 있던 군산좌는 민족운동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과 강연회 등이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0년대 초 영화 전문 상영관 희소관이 개관한다. 1920~1930년대에는 서양 선교사 전킨(Junkin)이 설립한 구암교회(궁멀교회) 남녀 찬양대(합창단)와 양악대(밴드부), 군산 기독교청년회 등이 개최하고 후원하는 음악대회가 주악, 독창, 기타, 하모니카, 피아노, 가극 등의 부문별로 공회당, 희소관, 군산좌 등에서 열렸다. 당시 음악대회는 군산지역 서양 음악회 및 연극의 효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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