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사진예술 뿌리 정착시킨 고 채원석
전북 출신 사진가 중 유일하게 문예진흥기금 받아
사진기(카메라)는 1839년 프랑스인 다게르가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기능을 보완한 각종 카메라가 개발된다. 1888년 조지 이스트먼(코닥 설립자)이 아마추어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소형카메라를 내놓으면서 대중화된다. 한국의 사진 역사는 신미양요(1871) 당시 미 해병 종군사진사가 조선 병사를 찍은 사진이 최초라고 기록은 전한다.
군산 사람들은 카메라를 언제 처음 봤을까. 궁금증은 1894년 봄 군산을 처음 답사했던 서양선교사들 자료에서 실마리가 풀린다. 그들이 지금의 구암동산에 군산스테이션을 개설하고, 보고서에 사진(필름)을 첨부해 본부(미국)로 보내기 시작한 것. 지금 우리가 보는 구한말 구암동 거리 모습, 초기 구암병원 건물 등이 당시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으로 알려진다.
<군산시사>(2000)는 '군산의 사진 역사는 홍건직(1920~1968)으로 비롯되었다'고 적고 있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 군산지부 50년사>(2012)도 '군산에서 처음 예술사진을 시작한 사람은 1951년 1·4후퇴 때 군산에 피난 차 정착한 화가 홍건직 선생님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이전에는 군산에 사진가가 없었다는 얘긴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군산 출신으로 평생을 사진 예술에 몸담았던 채원석(1918~2007)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작품에만 몰두했던 아버지, 예술가 본연의 습성인 듯
채원석(蔡元錫)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끊임없는 연구와 창작으로 1966년 호남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을 거쳐 1967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개최된 한일사진교류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는다. 1968년 동아국제사진살롱 입선, 1969년 제18회 국전 등에 입선한 그는 전주(1969)와 군산(1970)을 오가며 개인전을 여는 등 1970년대 이전에 지도자급 사진가로서 위상을 다진다.
그중 1969년 국전 입선작 <사투>(死鬪)는 동물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개미들과 애벌레의 전투 장면을 담았다. 당시 작가들도 호평한 수준작으로 1980년대 중앙지 신문들이 기사를 작성할 때 자료사진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채원석 장남으로 군산 화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양화가 채 억(56) 작가는 “지금도 사람들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알고 놀라면서 순간을 어떻게 포착했는지 궁금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사진이 나오는 과정을 역순으로 얻어낸 창작”이라고 귀띔한다.
1971년에는 현상소를 군산시 중앙로 1가(군산우체국 건너편 건물)로 이전한다. 이전과 함께 영화카메라 간판을 내리고 ‘채원석 사진 스튜디오’를 내건다.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채원석 사진연구소’도 그때 개설한다. 아래는 채 억 작가가 전하는 당시 스튜디오 분위기.
“스튜디오는 살림집이 딸린 2층이었죠. 비좁진 않았지만, 항상 사람들로 북적댔습니다. 술 담배를 전혀 안 하셨던 아버지는 손님들과 커피 마시며 대화하는 시간을 낙으로 삼았거든요. 그래서 누구에게나 커피를 권했고, 필름을 현상하러 오는 손님보다 사진을 배우러 오는 제자가 더 많았습니다. 주말에는 제자들이 스튜디오에 모여 아버지와 커피를 마시고 출사를 나갔죠.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예술가 본연의 습성인 듯싶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전시장에 갔던 추억들도 시나브로 떠오릅니다. 1960~1970년대는 전시장이라고 해봐야 기껏 다방이었죠. 개복동 예술의 거리에 있던 비둘기다방, 상공회의소 지하에 있던 김다방, 장미동에 돌다방, 제일다방, 군산우체국 옆 아담다방, 구 시청 옆 신세계다방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다방 마담들은 큐레이터 역할도 했어요. 마담들이 차만 파는 게 아니라 작품 관리도 하고, 소개도 하고, 평가도 했거든요. (웃음)”
전북에서 유일하게 문예진흥기금 받는 사진가 되다
1970년대 들어 국내 사진계는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다. 10년 동안 대립각을 세우며 활동하던 한국창작사진협회(창협)와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가 1971년 7월 하나로 통합된다. 군산에서도 ‘창협’에 소속됐던 채원석, 신철균, 문길수, 원제창 등 11명이 ‘사협’ 군산지부로 복귀하고 그해 12월 전시회를 개최한다.
1974년 채원석은 한국사진작가협회 군산지부장(중앙 운영위원)에 피선된다. 1975년 각종 공모전 및 교류전 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을 맡으면서 대학에도 출강을 나간다. 1976년 한국 사진문화상(공로상)을 수상하고, 1980년에는 선후배와 제자들의 축하를 받으며 군산 빅토리호텔 전시실에서 회갑기념전(11월 29일~12월 1일)을 연다.
채원석은 그해 송년 모임에서 “1980년은 감당하기 힘든 혼란과 격변, 그리고 고난을 헤치고 새 시대를 이루어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으로 가득 찼던, 우리 국민에게는 실로 벅찬 한해였다”며 “이러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에 더욱 정진하고 그 무한한 창조력을 사회의 거울로 제시하는 것이 창작인들의 의무일 것”이라고 말한다.
채원석은 한국창작사진협회 중앙운영위원(1964)과 대표위원(1969), 전북지부장(1969)을 지냈다. 전라북도 도전 사진부문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1969~1980),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1979, 1986),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운영자문위원과 국전(사진 부문)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리얼리즘 사진 발전에 한 획을 긋는다.
1968년 가을, 전북 최초 아마추어 사진클럽인 ‘군산일요사진동호회’ 창립을 시작으로 1970년 창작사진동인 ‘영 70’, ‘포커스’, 1982년에는 '군산 펜탁스 Family' 등을 만들어 고향의 사진 예술 발전과 후진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전북 군산·전주, 충남 서천군 지역에서 직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사진인은 수백을 헤아린다.
1992년에는 공적을 인정받아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정부로부터 문예진흥기금(사진연구비)을 지원받는 사진가가 된다. 초기에는 매월 40만 원씩 지급되다가 국민의 정부 출범(1998) 후 50% 인상되어 60만 원씩 받았다. 팔순을 넘겨서도 외출할 때마다 카메라를 손에 쥐고 다니며 창작에 몰두하던 그는 2007년 89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다.
채원석의 작품은 한 시대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사진이 주를 이룬다. 또한, 과거 기억을 되살려내고 반추하는,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이 없고 친근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대부분 작품이 생활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군산의 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특징이다.
원로 사진작가 문길수(86)씨는 “군산 사진인으로 아마추어 사진의 길목을 열어준 홍건직 선생과 인물을 주인공으로 거리 사진을 즐기시던 채원석 선생님을 존경한다”며 “특히 채 선생님은 사진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제자도 많이 배출하셨고, 복잡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서정적이고 리얼하게 보여준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자료출처: 채원석 회갑기념전 팸플릿.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