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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와 필름에서 최고 메커니즘 찾았던 아버지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5.02.01 15:50:0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군산 사람들은 카메라를 언제 처음 봤을까. 그 궁금증은 1894년 봄 군산을 처음 답사했던 서양 선교사들이 남긴 자료들에서 실마리가 풀린다. 그들이 지금의 구암동산에 군산스테이션을 개설하고, 보고서에 사진을 첨부해 본부로 보내기 시작한 것. 지금 우리가 보는 구한말 구암동 모습, 초기 구암병원, 영명학교 건물 등이 당시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으로 알려진다. 

 

<군산시사>(2000)는 ‘군산의 사진 역사는 홍건직으로 비롯되었다’고 적고 있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 군산지부 50년사>(2012)도 ‘군산에서 처음 예술사진을 시작한 사람은 1951년 1.4후퇴 때 군산에 피난 차 정착한 화가 홍건직(1920~1968) 선생님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이전에는 군산에 사진가가 없었다는 얘긴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군산출신으로 평생을 사진 예술에 몸담았던 채원석(1918~2007)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기자말

  

 


 

한국 리얼리즘사진 1세대를 대표하는 채원석(蔡元錫). 그는 1918년 군산시 성산면 도암리에서 장남(1남 2녀)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군산시 선양동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다. 집안이 부유해 어렵잖게 서울로 유학,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이웃집 아저씨가 어깨에 메고 다니는 카메라를 보며 일찍이 사진에 관심을 둔다. 그는 1932년 일본 동경 아트사진공업사 실버 카메라회가 주최하는 공모전에 입상(가작)한다. 나이 열다섯에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 

 

채원석은 조선 왕족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사진 예술 초창기 텃밭을 일군 이해선(1905-1983) 선생의 지도로 사진 수업을 쌓는다. 그의 불타는 창작 열기는 1947년 대한사진예술연구회가 주최하는 제2회 사진공모전 입선으로 빛을 발한다. 그는 해방정국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3회(1948)와 4회(1949) 연거푸 입선한다. 당시 입선은 회원 추천을 받은 것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1949년 서울인상사진연구회가 주최한 제1회 전국 어린이사진콘테스트에서 입선한다. 이듬해(1950) 4월에는 제2회 콘테스트에서 입상(가작)하는 기염을 토한다. 

 

예술사진이 걸음마 단계 시절이었고, 전쟁 후유증으로 가난까지 겹쳐 대중에게 ‘작품사진’이라는 말이 생경하게 느껴지던 1950년대 초. 그는 전국규모 사진공모전과 콘테스트 수상 경력을 바탕으로 1953년 봄 군산시 선양동(구 신호약국 자리)에 자그만 셋집을 얻어 영화카메라(DP-E점)를 개업한다. 

 

영화카메라는 필름도 팔고 현상·인화를 전문으로 하는 사진현상소였다. 그는 선양동에서 중앙로(구 조흥은행 옆), 개복동 남도극장(국도극장) 부근 등으로 이사 다니면서도 1952년 11월 출범한 군산아마사우회(초대회장 김종열) 연구부장으로 북에서 내려온 홍건직 홍보부장과 투톱을 이루며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56년 전국 백화(白花)사진콘테스트 특선을 비롯해 한국사진작가협회 공모전에 2년(1957~1958) 연속 입선한다. 

 

“동네 아이들에게 큰소리치던 기억 새로워”

 

아래는 채원석 장남으로 군산 화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양화가 채 억(56)씨 추억담이다. 

 

 

 

“제가 어렸을 때는 선양동 산동네에서 살았죠. 집이 가난했거든요. 늘 생활 속에서 주제를 찾으셨던 아버지는 외출할 때마다 수동식 소형카메라 '롤라이 35'를 챙기셨죠. 출사와 공모전 심사 등으로 출장도 잦았고요. 현상, 인화, 트리밍 등을 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느껴지면서 뇌리에 저장된 사진 관련 숫자들 5,6/60, 8/250···. 동네 아이들과 싸울 때 셔터스피드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것들이 까분다고 큰소리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웃음)

 

아버지는 현상소를 차려놓고도 수입보다 작품에 열정을 더 쏟았어요. 거리의 빛, 피사체와 피사체 사이 공간이용, 그리고 휴머니즘. 당시 사진전문가와 작가 선생님들은 아버지를 2호 인화지의 우리나라 최고 사진가라고 평하셨죠.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빛 조절 테크닉이 감각적이었어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작품을 만드셨는데, 열 번 실패해도 포기를 모르는 분이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아졌고, 암실에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어요. 부자였던 할아버지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이유도 사진가가 ‘환쟁이’로 멸시받던 시절 사진에 빠졌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셋집을 전전해야 했고, 어머니와 자주 싸우셨죠. 손님이 사진을 찾아가야 쌀을 살 수 있는데, 아버지는 작품사진에만 몰두하시니···.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결국 어머니가 사진을 배워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죠.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 학교나 유치원 입학식, 졸업식장 등을 찾아다녔는데 누나는 어깨에 자그만 수금가방을 둘러메고 영수증을 끊어주고, 어머니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죠. 저는 옆에서 보초병처럼 지키고요. (웃음)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오면 방바닥에 10원짜리 100원짜리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일 년 내내 졸업식만 있으면 좋겠다며 돈을 셌는데, 라면 하나에 10원이던 그때는 세상 부러울 게 없었죠.” 

 

학창시절 아버지 작품 디스플레이도 하고, 액자 만드는 작업을 도와드렸다는 채 억 작가는 “어두컴컴한 암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과 역겨운 약냄새,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을 준비하는 아버지 모습 등을 지켜보며 사진과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면서 “결코 포기를 몰랐던 아버지는 수동카메라와 흑백필름에서 최고의 메커니즘을 찾았던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계속)

 

 

 

◇채원석은 1968년 가을, 전북 최초 아마추어 사진클럽인 ‘군산일요사진동호회’ 창립을 시작으로 1970년 창작사진동인 ‘영 70’, ‘포커스’, 1982년에는 '군산 펜탁스 Family' 등을 만들어 고향의 사진 예술 발전과 후진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한국사진학연구회 중앙이사, 전라북도 예술회관 이사(1970년대)를 지냈고 한국창작사진협회 중앙운영위원(1964) 대표위원(1969), 전북지부장(1969)을 지냈다. 전라북도 도전 사진부문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1969~1980),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1979, 1986),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운영자문위원과 국전(사진 부문)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92년부터 유명을 달리하는 2007년까지 전북에서 유일하게 정부로부터 문예진흥기금(사진연구비)을 지원받은 사진가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채원석 회갑기념전 팸플릿.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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