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군산역(아래 군산역)은 제3차 축항공사(1926~1933)가 시작되는 1920년대 중반부터 장미동 세관 부근(현재 한국전력 군산지점 뒤편)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1926년 10월 7일 자 <동아일보>는 군산~장항을 잇는 여객선 취항에 대비해 도선장 부근으로 역사 신축 이전과 부근에 호텔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6년 군산부(군산시)는 그해 12월 조사에서 인구 2만 2천 537명에 물자 집산액 2억 원, 무역액 7천만 원, 적출미(積出米) 1백50만 석으로 집계되자 군산역 이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1927년 8월 ‘부역확장 조사 위원회’를 설치한다. 이어 타당성 조사와 현장 답사를 마치고 공사를 시작, 1931년 8월 1일 군산항역 역사가 준공되어 개통식과 함께 영업을 개시한다.
군산항역이 영업을 개시하는 날 충남선(장항선) 전 구간이 개통된다. 이에 군산지역 일본인들은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길을 잇고자 군산~장항 철교 가설을 총독부에 청원한다. 청원서 요지는 군산 발전과 전북, 전남, 충북, 충남지역 산업발전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라북도 내무국 토지과에서 1932년 10월 현지 조사까지 마쳤으나 과다 예산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한다.
군산역은 처음부터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으나 군산항역은 간이역으로 개찰구만 있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이용객은 물론 화물량도 이전하기 전보다 훨씬 많았다. 부둣가인 데다 군산~장항을 잇는 도선장과 이웃하고 있고, 일본인 거주지(영화동, 장미동, 월명동, 금동)와 가까웠으며 관공서, 금융 기관, 각종 회사와 대형 창고가 밀집된 도시 심장부였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군산항역~전주 구간을 오가는 열차는 ‘경전철’이라 불리는 협궤열차였다. 편도 1시간 40분 소요됐고, 요금은 1원 40전(당시 부두노동자 쌀 한 가마 운반비 1전)이었으며, 하루 왕복 4회 운행하였다.
1935년 2월 28일 군산부는 지금의 해망동까지 철도 연장 사업을 추진한다. 일반 사설철도에 비해 특이한 점은 조선에서 유일한 부영(府營) 철도라는 것. 철도 궤간도 군산항역까지는 협궤였으나 연장되는 구간은 표준궤로 부설한다. 이러한 계획은 더욱 많은 화물, 더욱 많은 쌀을 신속하게 반출하기 위함이었다.
철도는 표준궤(중궤·1.435m), 광궤(1.520m), 협궤(1.067m) 등으로 구분한다. 표준궤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중국, 미국, 유럽 대부분 국가가 사용한다. 러시아, 핀란드, 포르투갈 등은 광궤다. 일본은 고속열차와 몇몇 사설 노선(표준궤)을 제외한 철도가 협궤다. 건설비용이 싸고, 섬나라여서 다른 나라 열차가 운행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일제는 조선의 철도를 만주와 일본을 잇는 중간 고리로 삼았다. 드넓은 소비시장이자 물산공급지인 만주를 일본과 연결하는 것이 조선 철도의 첫 번째 사명이었으며 승객과 물자 유통은 그 다음이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 사방으로 뻗어 나간 경인선, 경부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등 주요 철도 종착역은 항구나 국경도시였다.
특히 일제가 서둘러 개설한 군산선은 곡식을 실어 나르기 바빴고, 군산 부두는 정미된 쌀을 선적하느라 밤낮없이 분주했다. 군산항은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전진 기지였던 것. 거리에는 현물 없이 쌀 투기를 일삼는 미두꾼이 넘쳐났고, 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에 홀린 일본인들은 ‘고메노(쌀) 군산!’을 외쳐댔다.
물류와 이용객이 증가하자 각종 시설의 필요성을 느낀 군산부와 군산상공회의소는 몇 차례 회의를 열고, 1935년 11월 제2기 축항공사 실현을 비롯해 소형기선 잔교축조, 부유(艀溜) 설치, 화물취급소 증설, 군산항역 개축, 군산 우편국 개축 이전, 측우소 설치, 방송국 설치, 군산-여수 직통전화 가설 등 아홉 개 항을 총독부에 진정하고 촉진운동을 전개한다.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했던 군산항역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는 1943년 12월 1일 모든 화물운송 기능을 군산 부두역(지금의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주차장 부근에 있던 화물역)에 넘겨주고 문을 내린다.
군산 부두역은 일제강점기 미곡검사소 부근에 있었으며, 일제가 쌀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군산항역 대안으로 개설한 화물역이었다. 사무실도 갖추고 있던 화물역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폐쇄됐으나 마루보시(丸星), 미창(米倉) 등이 미곡 및 수하물 작업장으로 사용하다가 1970년대에 중단되고 건물이 헐렸으며, 2012년 주차장 공사로 선로 시설이 모두 철거된다.
마루보시와 미창의 태동
앞에 등장하는 마루보시 공식명칭은 ‘조선운송주식회사’이다. 일제강점기(1931) 임금착취에 시달리던 인부 70여 명이 동맹파업을 일으킬 정도로 악명 높은 ‘트럭회사’였다. 1928년 민영 운수업자들이 총독부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권익단체인 ‘전 조선자동차협회’를 조직하자 총독부 철도국이 1930년 초 자본금 1백만 원으로 기차역의 화물수송을 관장하는 ‘조선운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전국의 물동량 수송을 독점해나갔다.
미창의 공식명칭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이다. 총독부는 본토의 유휴자본을 투입, 조선을 장기적인 식량 기지로의 개발을 목적으로 1930년 11월 15일 경성(서울) 남대문통에 자리한 경성전기 빌딩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조선 미창)를 출범시킨다. 설립 초기 부산, 인천, 군산, 목포, 진남포 등에 지점이 있었고 창고보관과 하역업을 맡았다.
일제의 미곡수탈 증가에 따라 조선 미창 군산지점이 관리하는 창고와 쌀 보유량도 늘어난다. 1939년 1월에는 1백20만 3000가마라는 개항 이후 최고 보관량을 기록한다. 당시 언론은 ‘소화 8년(1933) 기록을 돌파한 군산 미증유의 미(米)의 대홍수’로 표현하였다. 경마장 부근 창고까지 만재된 상태로 복전(福田) 미창 지점장이 처치에 부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1953년 1월 25일 오후 3시 30분 금강 하류 10km 지점인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앞에서 적재량 초과로 전복, 100여 명의 익사자를 냈던 강경-군산 정기여객선 행운환(幸運丸)도 한국 미창(조선 미창) 군산지점 소속이었다. 행운환은 정원이 90명임에도 200여 명에 쌀 50여 가마를 싣고 당일 오후 1시 전북 성당을 출발하여 군산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마로보시와 미창은 1962년 합병, 대한통운(大韓通運)이 된다. 대한통운은 빚더미 속에서도 기구개편과 장비 현대화, 경영 개선 등으로 5년 후에는 전국에 620여 개 지점망을 갖춘 방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도로사정이 열악했던 1967년 9월 당시 차량 1400대, 선박 123척, 각종 중기 77대 등을 보유하며 국내 화물운송과 창고보관업체의 대종을 이룬 것.
따라서 60~70년대에는 외딴 시골역이나 작은 항구에서도 ‘원형에 마름모꼴 모양’의 대한통운 마크가 선명한 창고를 볼 수 있었다. 군산에도 구 군산역과 내항 부둣가에 사무소가 있었으며 금암동, 신영동, 죽성동, 장미동, 금동 일대에도 일제 때 지은 대형 쌀창고가 즐비했다. 근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 나가사키(長崎) 18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372호) 건물이 대한통운 군산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