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역 사람들이 군산을 얘기할 때 '세계 최장 새만금',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빵집 이성당', '채만식의 <탁류>' 이상 넷 중 한두 개는 꼭 꼽는다. 놀랍게도 10명 중 3~4명은 '역전의 명수'를 앞세운다. 그들에게 '역전의 명수 누구를 아느냐'고 물으면 '스마일피처'(송상복)는 꼭 들어간다.
재미있는 것은 송상복은 몰라도 스마일피처는 기억한다는 것이다. 송상복은 1972년 황금사자기 부산고와 결승에서 아리송한 미소로 9회까지 마운드를 지켜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해 가을 건강 악화로 웃음을 잃었다. 졸업 후에는 건축현장 막노동꾼, 모교 야구감독, 뒤늦은 대학진학, 트럭 조수, 군산시 의원 등 험난한 인생 역정을 걸어왔다. 요즘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기자말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성장
송상복(宋相福)은 1953년 봄 군산시 서흥남동 산동네에서 막내(3남 2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목선(木船) 한 척을 부리는 어엿한 선주였다. 그럼에도 살림은 항상 쪼들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까,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어머니는 영세민 취로사업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노임 대신 받아오는 밀가루에 5남매가 매달려 살았다.
"(혀를 차며)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숨을 고른 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벌어서 여섯 식구가 먹고살았는데요. 쌀밥은커녕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보릿고개 시절이었다고 하지만, 유달리 어렵게 살았어요. 밀가루 한 봉지가 하루 식량이었거든요. 물을 흥건하게 부어 수제비나 국수를 끓여 먹었는데, 그것도 성찬이었죠. 끼니를 거르는 날도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사진으로도 뵌 적이 없어요. (한숨)"
막내둥이 송상복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성장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난 빈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느껴졌다. 외로움과 가난의 음습한 그림자는 어린 상복을 괴롭혔다. 가난에 시달리다 보니 성격도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순을 넘어선 지금도 어린 시절 추억은 신문지로 둘둘 말아 부뚜막에 올려놓은 칼국수 다발밖에 없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생각할 때마다 이 모습 저 모습으로 바뀐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와 인연
1962년 봄 군산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잘못된 호적을 서둘러 정정해준 형수 덕이었다. 이듬해 집에서 가까운 남초등학교로 전학한다. 새로 사귄 급우들과 시멘트 종이를 접어 동네야구를 시작한다. 4학년 때는 해병대 야구팀 멤버였던 김용태 야구부 감독의 눈에 띄어 처음으로 배트와 글러브를 착용한다. 야구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야구가 밥보다 좋았다. 얼마나 좋은지 하늘로 날아가는 공도 점프를 해서 잡을 것 같았다.
"신문지는 귀했고, 비료 포대나 시멘트 포대로 글러브를 만들어 '종이 야구'를 했는데요. 흥남동 산동네 아이들, 오룡동 말랭이에 사는 아이들, 미원동 피난민촌 아이들, 삼학동 모시산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모여서 시합을 했습니다. 모두 가난한 동네 애들이었지만 실력은 대단했죠. 게임도 프로야구처럼 돌아가면서 했구요.(웃음) 그렇게 하다가 김용태 감독님 눈에 들었던 것이죠."
처음 포지션은 1루수였다. 몇 달 후에는 감독 제의로 투수로 바꾼다. 그해 가을 전남 여수에서 개최된 영호남 초등학교 야구대회에 출전해서 우승한다. 다음 해에도 같은 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한다. 어린싹들의 기량을 눈여겨본 당시 전북 야구협회 이용일 회장과 군산 남중·상고 김병문 교장은 송상복, 김일권, 양종수, 조양연, 김기철 등 남초등학교 선수 11명을 특기생으로 군산남중에 입학시켜 1968년 야구부를 창단한다.
군산남중 야구팀은 첫해부터 전국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우승기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래도 4강 대열에는 몇 차례 올라 전국 수준으로 인정받는다. 특히 송상복, 김일권, 양종수는 그때부터 군산상고 야구팀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꼽힌다. 3학년이 되자 다른 지역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졸업을 앞두고는 더욱 잦아졌다. 하지만 남초등학교 출신 11명은 스카우트 손길을 마다하고 1971년 군산상고(야구부 4기)에 진학한다.
고교 1학년 때 미래 유망주로 인정받아
지긋지긋한 가난은 고교에 진학해서도 송상복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았다. 아침저녁 끼니를 국수와 수제비로 때웠다.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지만 고마운 급우들이 있어 용기를 잃지 않고 연습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집안 형편을 아는 급우들이 번갈아가며 도시락을 두 개씩 준비해왔던 것. 맛이나 보라며 간식용 빵을 건네주는 친구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감을 얻은 송상복은 1학년(1971) 때부터 릴리프로 등판, 야구인들로부터 미래 유망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무리한 역투로 오른손 중지와 엄지발가락에 상처를 입고 슬럼프에 빠진다. 2학년 때는 최관수 감독 제의로 투구자세를 바꾼다. 최 감독이 지금까지의 오버스로는 몸에 무리가 따르니 사이드스로나 언더스로로 바꿔보라고 권했던 것. 그 후 대회 때마다 날카로운 커브와 사이드스로로 상대 팀 타자들을 제압했다.
1972년 7월 황금사자기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한 군산상고는 대회 3일째(14일) 경기에서 치열한 난타전 끝에 경북지역 예선 우승팀 영남고를 8-6으로 물리친다. 준결승전(18일)에서는 영남 최강팀 경남고를 만나 송상복이 완투승(3-1)을 거두면서 결승에 진출한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는 이변이었다. 중앙 무대에서 기지개조차 제대로 켜지 못하던 호남 야구가 강팀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는 순간 관중석은 아우성에 가까운 함성으로 가득했다.
다방과 거리의 전파상 앞에 삼삼오오 모여 TV 중계를 통해 군산상고의 결승 진출을 지켜본 군산 시민 100여 명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고속버스를 빌리고 동아일보 군산지국에 서울운동장 야구장 입장권 예매를 부탁해 상경했다.
기적 같은 역전우승... 영광 뒤에 오는 상처
결승전(19일)이 열리는 서울운동장. 부산고는 역시 강했다. 군산상고는 9회까지 1-4로 끌려갔다. 그리고 9회 말. 선두타자 김우근이 산뜻한 안타로 역전의 전주곡을 울린다. 이어 고병석, 송상복이 볼넷으로 나가면서 1사 만루. 김일권이 몸에 맞는 볼로 밀어내기 1점을 얻어 2점 차로 좁힌다. 계속되는 기회, 양기탁의 2점 적시타로 동점이 되면서 운동장은 광란의 도가니가 됐다. 이어 등장한 김준환. 그의 기적 같은 끝내기 좌전 안타는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응원단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면서 '역전의 명수'를 탄생시켰다.
그날의 명승부는 군산상고를 호남야구 중흥의 선봉장으로 떠오르게 했다. 그때부터 송상복에게 스마일피처란 애칭이 따라다녔다. 선수들에게는 각지에서 팬레터가 날아들었다. 팬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프로야구 원년 도루왕 김일권은 "동료 중 송상복이 가장 많은 팬레터를 받았다, 팬들의 열기는 부러울 정도였다"고 귀띔한다. 그럼에도 그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저를 가리켜 위기에 처해도 웃으면서 투구하는 스마일피처라고 하는데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평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끝까지 침착하게 던지려고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진 것이지, 미소를 짓거나 웃으면서 투구를 하지 않았거든요. (고개를 갸웃거림)
팬레터는 여학생에게 많이 받았는데요. 그게 화근이었어요. 팬과 선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괴소문 때문에 두고두고 시달렸습니다. 그해 한일고교 야구가 끝나고 오른쪽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하더니···.(한숨) 결국 '늑간신경통' 진단을 받았죠.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여자 때문'이라는 괴소문이었습니다. 특히, 남이 해도 말려야 할 야구 관계자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참담하더군요. (한숨)"
가슴에 태극마크 다는 것이 꿈이었던 송상복은 낙심하지 않고 양·한방 치료를 계속했다. 3학년 여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건강이 회복됐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대학과 실업팀으로 진출하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비애감을 느껴야 했다. 진로는 막히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졸업 후에는 건축업을 하는 친구 아버지 권유로 주택건축현장 막일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채소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보며 빈둥빈둥 놀고먹을 수는 없었다.
모교 감독으로 야구지도자 생활 시작
송상복은 1974년 6월 모교인 남초등학교에서 야구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오전에는 공사판에 나가고, 오후에는 꼬마 후배들을 열심히 지도했다. 가난한 동네이다 보니 운동화 한 켤레 값이 없어 야구를 포기하는 학생이 많았다. 야구부 운영이 어렵게 되자 교장 선생님(채규거)은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고물 타이어를 불에 녹여 닳아 해진 야구공을 땜질해주는 등 선수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교사들은 형편이 어려운 학부모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열의를 보였다.
현재 LG트윈스 수석코치 조계현을 비롯해 장호익, 백인호 등이 송상복 감독이 지도했던 선수들. 그는 자신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연습에 집중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꼬마 후배들이 한해(1976)에 전국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따낸 것. 그러나 6월 대회 우승 소식은 선수들이 출전하는 날 입대하는 바람에 군대에서 받아봐야 했다. 조계현, 장호익 등이 깨알같이 적어 보낸 편지는 기쁨의 눈물과 함께 지도자의 보람을 안겨줬다.
1979년 1월 제대와 함께 남초등학교 감독으로 복귀한다. 조촐하나마 지금의 아내(최막래)와 결혼식도 올렸다. 삼학동 단독주택에 딸린 자그만 셋방을 얻어 보금자리를 꾸몄다. 최씨는 전국체전 준우승의 전적을 가진 군산여고 연식정구 선수 출신으로 고교 때부터 사귀어오다 결혼에 골인한 것. 1972년 옥구군(군산시) 보건소에 취업한 최씨는 결혼 전부터 송 감독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노환으로 병약해진 시어머니도 극진히 모셨다.
아내 도움으로 만학의 향학열 불태워
체육에 관심이 많았던 김삼룡 부총장 추천으로 1981년 원광대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긴다. 1983년에는 코치직을 계속 맡으면서 원광대 사범대 체육교육과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 늦게나마 향학열을 불태운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체육 지도자상에 심취하며 1987년 3월 졸업장을 받았다. 만학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에는 결혼 후에도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살림을 도맡아온 아내의 도움이 컸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전남(광주)의 모 중학교에서 감독초빙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일은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급하다고 해서 원광대 코치직을 사임했는데, 지역 출신이 아니어서 동문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감독초빙이 철회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백수건달이 되고 말았던 것.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내를 대할 면목도 없었다. 무엇을 하든 수입을 올려야겠기에 화물트럭 조수와 운전기사로 2년여를 보냈다.
1989년 늦가을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을 맡았다. 절치부심의 자세로 팀을 재정비, 이듬해 전국대회에 4회 출전하여 제45회 청룡기대회 3위에 오르는 등 전년보다 훨씬 나은 성적을 거두었다. 창단 이래 최초로 연세대 2명 고려대 1명, 원광대 1명을 특기생으로 진학시켰다. 그럼에도 전국대회 전적 부진을 이유로 부임 13개월 만에 해임되는 쓰라림을 맛봐야 했다. 처음엔 분하고 억울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야구부 운영권을 놓고 철없는 어른들이 벌인 파워 싸움의 희생양이 됐음을 알았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군산 시의원 출마... 당선 후유증
배신감에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야구 선후배 몇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1991년 3월 26일 치러지는 군산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했다. 정치에 관심도 없고, 기초의회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 사양해도 막무가내. 군산상고 야구선수 학부모들까지 찾아와 "선거 비용은 우리가 부담할 터이니 야구 지도자로서 명예회복도 하고, 지역 체육 발전에 앞장서 달라"는 진지한 권유에 용기를 얻어 출마의 뜻을 굳힌다.
왕년의 야구 명문 군산상고 '스마일피처' 송상복 후보(36)와 군산시 야구협회장 강선국 후보(57) 등 2명의 야구인이 경합을 벌여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전북 군산시 오룡동 지역 선거에서는 송상복 후보가 강선국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이 확정. 송씨는 개표결과 총 투표자 수 2천 5백78명 가운데 64.6%인 1천 6백66표를 획득. 8백45표를 얻는 데 그친 강씨에 거의 더블스코어차로 압승(이하생략) -1991년 3월 27일 자 <경향신문>
야구의 도시에서 송상복-강선국 두 후보의 대결은 시민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 송 후보는 야구 선후배와 친지, 군산상고 학부모까지 자원봉사자로 나서줘 강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의원 배지는 그냥 달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품위유지비'가 발목을 잡았다.
"청첩장, 초대장, 부고 등이 일주일에 5~6건씩 날아오는데 정신이 없더군요. 생소한 이름도 있지만, 대부분 지역구 주민들이어서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찾아다녔어요. 수입은 없고, 아내가 부조금을 대느라 고생을 많이 했죠. 임기를 마치는 해에 남은 것은 빚뿐이더군요. 어떻게 하겠어요. 공직생활 26년 4개월 만에 퇴직한 아내 퇴직금으로 빚을 청산하고 선거와는 인연을 끊었습니다. 지금도 선거 얘기가 나오면 벌레처럼 징그럽게 느껴집니다.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아내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1996년 자그만 공장에 취직했다.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7~8년 전 독립해서 지금은 자그만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종업원은 7~8명, 경제적으로 여유를 찾을 만하니까 이번에는 가슴 부위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작년 12월 초 심장 수술을 받고 약을 복용 중이라 한다.
올해 환갑인 스마일피처 송상복은 "4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하겠습니까. 아내와 오순도순 지내는 것이 가장 큰 낙이자 희망이죠!"라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덧붙이는 글 | 자료출처: 동아일보,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