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명문 군산상고는 2003~2010년까지 8년 동안 사령탑이 일곱 차례나 바뀐다. 1년에 한 번 꼴의 감독 교체는 안팎으로 혼란을 불러왔다. 그사이 '역전의 명수'였던 군산상고 선수들은 전국규모대회에서 준우승 세 번, 3위 두 번을 차지했다. 우승을 못 해 그렇지 절망할 수준의 성적은 아니었다. 감독이 자주 바뀐 것은 학교와 학부모, 동문회 간 갈등의 골이 깊었음을 의미한다.
명조련사가 절실하던 그때 '역전의 해결사'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석수철 감독이다. 군산상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한 그는 1차 지명으로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으나, 시즌이 끝나고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데뷔 1년 만에 은퇴하는 '불운의 선수'가 됐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그는 성균관대 코치를 11년 맡았다. 2011년 10월 감독대행으로 제92회 전국체전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선수들에게 헹가래까지 받았다. 같은 해 12월 모교 총동문회 추천을 받아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한다.
심기일전, 새 감독의 지도 아래 혼연일체로 뭉친 군산상고 선수들은 2013년 제41회 봉황대기와 제94회 전국체전에서 우승, 그해 2관왕에 오른다. 군산시와 시민들은 27년 만에 2관왕을 차지한 역전의 명수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시청에서 군산상고까지 카퍼레이드도 벌였다. 그날의 주인공 석수철 감독을 지난 9월 말경 만났다.
“지금도 쌍방울 레이더스 팬들은 감독님을 '비운의 선수'라고 하던데요.”
"그래도 이만하면 출세한 거죠. (웃음) 야구장 구경 한 번 못했던 옥봉리 촌놈이 군산상고에 들어가 쟁쟁한 선배들 덕에 '역전의 명수'라는 영광의 닉네임도 얻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동료 중 유일하게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니까요. 현역에서 은퇴하면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모교 감독을 맡고 있어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도 생깁니다."
석수철 감독과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듬직한 체구에 예리한 눈빛, 검은 피부에 우락부락한 얼굴 등 처음 대하는 순간 해태 시절 김응용 감독이 떠올랐다. 쇠말뚝처럼 무뚝뚝하게 보이면서도 여유와 위트가 넘쳤다. 고대 전사의 카리스마도 느껴졌다. 평탄치 못했던 선수생활과 지도자 경력이 10년 넘게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아우라가 있었다.
초등학교 선수 시절 별명은 '미련 곰탱이'
석수철(42)은 1973년 군산시(당시 옥구군) 옥서면 옥봉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착했고 주관이 뚜렷했다고 한다. 성격은 매사에 신중하고 꼼꼼한 편이었다. 1980년 군산비행장 부근 옥봉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야구에 재미를 붙였으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서둘러 시내 중앙초등학교로 옮겨주는 바람에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조계현, 장호익, 백인호, 고장량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전국을 호령하던 때였죠. 야구는 하고 싶은데 시골학교라 야구부는 없고···. 마침 중학교 때 야구선수였던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전학을 시켜주셨어요. 아버지와 마음이 통했던 것이죠. 처음 포지션은 3루수였고, 릴리프로 마운드에 서기도 했어요. 시합도 여러 차례 나갔는데 성적은 별로였어요. 그래도 야구가 좋았고, 유니폼 차림의 제 모습이 자랑스러웠던 것을 생각하면 팔자에 타고난 모양입니다. (웃음)"
타고난 노력형이었던 석수철의 초등학교 선수 시절 별명은 '미련 곰탱이'였다. 야구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타력과 주력이 앞선 동료들을 따라잡기 위해 달리기도, 타격연습도 열심히 했다. 감독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미련한 곰처럼 연습한다고 해서 붙여졌단다. 친구들의 놀림에도 연습이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는 그는 "몸도 생각했어야 하는데 성장기에 너무 무리해서 프로선수 생명도 짧았던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군산중학교 야구부에서 유격수와 3루수를 번갈아 봤던 그는 1989년 군산상고에 진학해서 2학년 때 3루수로 자리를 굳힌다. 그가 졸업 때까지 전국규모대회에서 거둔 성적은 제45회 청룡기대회 3위(2학년)와 제72회 전국체전 3위(3학년)가 전부였다. 그는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을 무척 힘들게 보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전국대회에서 4강에 들어야 대학진학 자격이 주어지던 때였는데, 입학하던 해에 성적을 못 내니까 어린 마음에 불안감이 밀려오더군요. 주위 시선은 따갑고, 훈련은 훈련대로 고되고···,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았어요. 야구를 계속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하다가 새로 부임한 나창기 감독 제의로 3루수를 맡으면서 안정을 찾았죠."
전력투구 정신으로 무장한 석수철은 군산상고 3학년 가을에 열린 전국체전 고등부 야구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두고 성균관대로 스카우트된다. 1992년 대학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는 그해 5월 6일 벌어진 제26회 대통령 배 대학야구대회 첫날 1회전 경기(성균관대-서울대)에서 9회 말 통쾌한 두 점짜리 홈런으로 신고식을 대신한다. 그날 경기결과는 14-4로 성균관대 승리.
1992년은 한양대 2학년 때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를 비롯해 조성민, 염종석, 정민철, 임선동 등 한국야구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을 유망주가 많이 배출된 해였다. 석수철도 그들과 함께 기대주로 떠올랐고, 국가대표 시절에는 해태 왕조의 마지막 감초로 불리는 김종국(고려대)과 키스톤콤비를 이루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는 성균관대 선수 시절 춘계리그, 추계리그, 대통령배 등 각종 대회에서 기회가 올 때마다 짜릿한 동점 홈런도 날리고, 통쾌한 승리 타점을 때려내는 등 야무진 타격과 안정된 수비력을 보여준다. 2학년 춘계리그부터는 주전 3루수 자리를 꿰찬다. 그러나 야구는 아홉 명이 하는 경기다. 그의 맹활약에도 팀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당시 성균관대 야구부는 한 시즌 통산 3승을 따내는 게 보통이었고, 약체팀인 서울대를 만나야 4승을 올리는 정도였다. 그처럼 부진한 팀 성적에도 석수철은 3학년 때 대학선발팀으로 활약했고, 가을에는 국가대표 3루수로 발탁된다. 당시 야구부 동료들과 학생들은 모교에서 11년 만에 국가대표 선수가 나왔다며 축하해 주었다.
사상 첫 올림픽 본선... 그리고 쌍방울과의 인연
석수철은 성균관대 4학년(1995) 때 조성민(고려대), 임선동, 이정길(이상 연세대), 차명주(한양대) 투수를 비롯해 포수 최기문(원광대), 내야수 김종국, 홍원기(이상 고려대), 박재홍(연세대), 외야수 강영수(연세대) 등과 함께 대학선수 10걸에 든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티켓이 걸린 제18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를 앞둔 시기였다.
대부분 국가대표팀 멤버인 이들은 프로팀의 1차 스카우트 대상자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출전자격 획득 여부에 따라 영향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중 일본 진출을 결정한 조성민과 프로야구 해태 입단이 확실시되는 김종국, 쌍방울 레이더스로 굳힌 석수철 외에는 진로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9월 18일 일본 구라시키 마스카트 구장에서 열린 예선리그 1차전에서 한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준우승팀 대만을 상대로 석수철의 2루타 등 장단 15안타를 몰아치며 8회 콜드게임 승(15-5)을 거둔다. 첫 경기에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한국은 19일 벌어진 2차전에서도 활발한 타격을 보여주며 허약한 태국 마운드를 맹폭했다. 결과는 7회 콜드게임(27-0) 제압이었다.
대회 최종일이었던 1995년 9월 23일. 구라시키 마스카트 경기장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결승리그에서 한국은 1회 말 한 점을 내주고 5회 초 조경환의 투런 홈런으로 2-1 박빙의 리드를 지키다가 9회 말 일본에 두 점을 내주면서 2-3 역전패, 아시아 정상의 문턱에서 아깝게 주저앉았다. 그러나 한국은 이 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 진출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프로야구 쌍방울은 12일 96년 1차 지명 신인 석수철과 총액 1억 7천만 원(계약금 1억 5천만 원·연봉 2천만 원)에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군산상고-성균관대 출신으로 1m 78, 73kg인 석수철은 지난 9월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2루수로 출전, 애틀랜타 올림픽 티켓을 따내는 데 기여했다." - <경향신문> 1995년 12월 13일 기사
대학 시절 안정된 수비와 짜임새 있는 공격력을 보여줬던 석수철은 팬들의 기대 속에 '떠오르는 샛별'로 평가받으며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다. 그해 프로로 진출한 신인은 모두 106명. 그중 억대 계약자는 42명이었다. 그나마 시즌을 앞두고 열린 시범경기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선수는 석수철을 비롯해 한화의 홍원기, 임수민 등 10여 명에 불과했다.
1996년 3월 31일, 그해 프로야구 시범경기(쌍방울-한화)가 열리는 청주구장. 쌍방울은 4회 구원 에이스 조규제가 3점 홈런을 허용하는 등 마운드가 난조에 빠져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1-4로 뒤진 7회에 석수철의 싹쓸이 3타점 2루타 등 7안타를 집중 시키면서 7득점, 단숨에 8-4로 뒤집는다. 이날 경기는 쌍방울이 8-7 재역전승을 거뒀다.
시범경기에서 맹타를 휘두르며 타력을 인정받은 석수철은 1996년 통산 114경기에 출장, 289타수 77안타(0.266)에 2루타 16개, 3루타 1개, 홈런 3개, 32타점을 기록한다. 그는 그해 신인왕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6월에는 3할이 넘는 타율로 팀의 8연승을 견인했고,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일조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석수철' 이름 석 자를 연호하는 팬도 생겨났다.
1990년 창단한 쌍방울은 매년 하위권에 머물렀다. 1996년에는 설상가상으로 구단 매각설까지 나돌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시즌 초 중심타자 김기태의 부상으로 5연패의 치명타를 입으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승부사 김성근 감독의 용병술과 신인들의 신들린 플레이로 그해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하여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가장 가슴 아팠던 1996 플레이오프 4차전
쌍방울이 돌풍을 일으키며 10월 7일부터 전주에서 열리는 1996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산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쌍방울의 꼴찌행진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사촌격인 해태를 응원하던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쌍방울의 선전을 화두로 삼았다. 당시 만년 꼴찌팀 쌍방울의 선전은 전북도민에게 운동 경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플레이오프 1차전(쌍방울-현대)이 열리는 전주구장은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표가 매진, 전북 팬들의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그들의 소망은 내친김에 현대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팬들의 열기 때문인 듯 한국시리즈가 아님에도 유종근 당시 도지사가 1차전에 나와 시구했고, 경찰력도 여타지역보다 많이 지원했다.
쌍방울은 팬들의 응원에 화답하듯 1, 2차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한다. 그러나 내리 3연패를 당해 대망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특히 5차전은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다 4회와 5회 초 각 1점씩 내줘 0-2로 뒤진 상황에서 5회 말 선두타자 석수철이 좌전안타가 터졌다. 그가 1루에 진루하며 추격의 기회를 잡았으나 후속타 불발과 작전 실패로 무득점에 그쳤다. 7회 1사 만루 기회도 살리지 못하고 1-3으로 패한다.
"그때 쌍방울의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원인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큰 경기에 강한 에이스가 없었다는 의견, 투수 로테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견, 선수들의 타격 부진을 꼽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나 저는 4차전(인천 경기)을 잊지 못합니다. 8회 말 3루 쪽으로 굴러오는 평범한 땅볼을 제가 놓치는 실책을 범하고, 그 실책이 안타로 이어져 2-4로 패했거든요. 그 4차전이 평생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경기로 남습니다."
조기은퇴 후 '지도자의 길' 걸어... 야구만 가르치라면 자신 있어
신인임에도 붙박이 내야수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석수철. 그는 1997년 1월 초 전년도 연봉 대비 80%가 오른 3600만 원에 구단과 재계약한다. 함께 입단한 신인들 중 가장 높은 상승률이어서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호사는 거기까지였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환자 신세가 됐다. 결국,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엔트리에서조차 빠진다.
1997년 4월 1일, <연합뉴스>는 그해 프로팀들 전력을 점검하는 기사에서 "지난해 기적적인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한 쌍방울의 올해 목표는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며 "만년 꼴찌 후보 오명을 벗고 어느 팀도 쌍방울을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됐지만 빈약한 선수층으로 대변되는 객관적인 전력의 절대열세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다. 고질적인 내야 불안은 주전 3루수 석수철의 부상으로 오히려 악화됐다"라고 평가했다.
석수철은 고관절 수술을 두 차례나 받고 치료 중임에도 그해 6월 1일 쌍방울-삼성 경기가 열리는 군산 월명야구장에 목발을 짚고 나왔다. 팀 동료들을 응원하는 그의 모습이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즌 내내 부상과 사투를 벌이던 그는 쌍방울이 악조건 속에서도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그리고 복귀를 앞두고 있을 때 대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저는 선수로는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복귀를 앞두고 있을 때 대만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2억 원에 계약했는데, 대만에 지진이 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거든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남보다 먼저 지도자 생활을 하자고 마음먹고 1999년부터 성균관대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죠. 그래도 지도자 운은 좋은 것 같아요. (웃음) 해마다 우승 및 준우승을 거머쥐면서 2000년대 대학야구를 '성균관 시대'로 열어놨으니까요. 2009년에는 5개 대회에서 23승 1무 4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올렸죠.
제가 대학과 고등학교 야구지도자 생활을 15년 가까이하면서 이끈 우승과 준우승을 합하면 30회 가까이 됩니다. 엄청 많은 횟수죠. 2005년 국제야구연맹(IBAF) 주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36회 야구월드컵 준우승을 비롯해 2010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5회 세계대학야구 선수권대회(4위) 등 국가대표팀 코치로도 여러 차례 선임되어 좋은 성적을 거뒀고, 그 과정에서 이기는 야구를 배웠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야구만 가르치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미련 곰탱이'처럼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왔고, 최종 목표는 프로구단 지도자라는 석수철 군산상고 감독. 그는 "후배들 지도에 모든 역량을 쏟아 선배들이 일궈놓은 역전의 명수, 그 영광을 되찾고 더 큰 무대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며 "선수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