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공의 어우러짐이 아름다운 전북 군산시 성산면 금강하굿둑 유원지(철새도래지). 그곳 주차장에서 금강호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돌비석 하나가 눈에 띈다. 살벌했던 5공 초기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오송회(五松會) 사건’ 주동자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92년 위암으로 타계한 고 이광웅 시인 시비(詩碑)다.
소나무 한 그루를 지붕 삼아 외롭게 서 있는 시비에는 이 시인이 4년 8개월의 억울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해서 지은 시 <목숨을 걸고>가 음각되어 있다. 간결하면서도 섬뜩함을 준다. 그는 ‘술꾼도, 연애도, 선생도 뭐든 진짜가 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부당한 권력과 시대를 일갈한다.
뒷면에는 “여기 이 시비 앞에 서는 이들은 맑은 눈빛으로 올곧은 양심의 시를 쓰던 시인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좋다”로 시작되는 추모글이 새겨져 있다. 애절하면서도 당당한 글귀는 맑고 투명한 시 세계와 양심의 시인으로 평가받아온 이 시인의 52년 짧은 생애가 어떠했는가를 암시한다.
국어 교사로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섰던, 그래서 학생들에게 존경받았던 이광웅. 그의 이름 석 자를 가슴에 새기며 삼가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발길을 돌리는데 문득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특별법 제정)과 재발방지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단식하다가 병원으로 실려간 김영오씨 등 세월호 실종자 가족, 유가족들의 참담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성회’에서 ‘오송회’로, 코미디 같은 용공조작사건
이광웅 시인 시비는 1997년 6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회에서 건립문제가 발의되어 이듬해 5월 17일 제막식을 가졌다. 16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아래쪽 비문은 비바람에 깎이고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고개를 돌아보니 나들이 나온 가족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기에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저기 잔디밭에 세운 돌비석 있잖아요. 어느 시인 추모비라고 하는데, 왜 저곳에 세워놓았는지 아시는지요?”
“(70대 아저씨, 겸연쩍어하며)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 이 나이 먹드락 건성건성 살아왔는디, 그게 뭔지, 뭐라고 써놨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시원한 막걸리나 한잔 하쇼.”
“(60대 아주머니) 잔디만 심어놓으믄 허전하니께 째로(멋으로) 세워놨겄쥬. 오메, 자세히 보니께 묘에다 소나무랑 심어놨네!”
“(60대 아저씨, 한참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 맞다! 옛날에 군산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간첩단사건. ‘오성회’인가 ‘오송회’인가 헷갈리네. 하이간 선생님들 친목모임이었는데 간첩으로 몰려 고문당하고 옥살이했던 그 양반들 말하는 모양이네요. 그때는 아무나 잡아다가 조지면 간첩이 만들어지던 시절이었응게 허허···.”
폭압적인 권력과 군홧발에 숨죽이고 살아가던 소시민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던 32년 전 용공조작 사건. 60대 아저씨 말마따나 군산을 발칵 뒤집어 놓고 전국을 긴장시켰음에도 오래돼서 그런지 기억하는 분도 있고, 못하는 분도 있었다. ‘오성회’인지 ‘오송회’인지 헷갈린다는 대목이 자꾸 읊조려지면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1982년 가을, 군산 시내에 ‘오성회’로 소문이 돌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오송회’로 바뀌어 사람들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경찰은 이리(익산) 남성고(南星高) 출신 제일고 교사 다섯 명이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에서 불온서클을 결성했다 해서 ‘오성회’로 지었다. 그러나 얼마 후 한 명이 다른 학교 졸업생인 것을 확인하고 ‘성’(星)을 ‘송’(松)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니 헷갈릴 수밖에.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는 없었다.
26년 만에 재판부가 사과한 어처구니없는 사건
오송회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집권 초 공안정국을 강화하면서 교육계 젊은 지식인들을 간첩·이적행위 및 보안법 위반 사범으로 몰아 처벌한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이다.
1982년 11월 군산 경찰은 4·19 위령제를 지내고, 김지하 시인의 시집 <불귀>와 해방 후 월북한 오장환 시인의 시집 <병든 서울>을 읽었다는 혐의로 군산 제일중·고 교사들을 연행하였다. 사건을 넘겨받은 전북 도경은 이들을 대공분실과 여인숙 등에 10일~23일씩 불법감금하고, 가족과 변호사 접근을 막은 채 고문과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전북 도경은 '교사들은 이적단체를 결성해서 북한을 고무·찬양했고, 일부는 모임 결성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당시 연행자들은 이광웅(42), 박정석(37), 전성원(27), 이옥렬(28), 황윤태(30), 강상기(35), 채규구(30), 엄택수(30)(이상 제일중·고 교사들), 조성용(45·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 등 모두 9명이었다.
1982년 12월 8일 방송과 신문에 <고교교사 학생들 선동>, <좌경의식교육>, <평양방송 청취, 불온서적 탐독> 등의 제목으로 보도되어 전국을 긴장시켰다. 당일 문교부는 전북도 교육감을 경고, 도 교육위원회 학무국장은 직위해제, 중등과장은 견책, 담당 장학사는 감봉 처분하였다. 한편 군산제일고 재단이사회도 책임을 물어 교장과 교감을 파면했다.
1983년 5월 전주지방법원은 오송회 관련자 9명에게 실형과 자격정지를 선고했다. 교사들은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에 의한 허위진술임을 주장하며 항소했지만, 2심(광주고법)은 1심보다 더 높은 형량을 부과했다. 대법원 역시 상고를 기각하고 2심 판결 그대로 확정해버렸다. 결국, 관련자 9명은 모두 실형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 ‘오송회 사건’을 '불법 감금과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으로 규정하였고, 교사들은 2008년 11월 광주고법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 본인과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사법부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 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린다.”라며 장문의 사과문을 낭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로 배려하고 약자를 돌봐주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오성회 사건에 연루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박탈당했던 아홉 교사들. 그중 이광웅 시인은 억울한 누명을 벗기도 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고, 일곱은 군산을 떠났으며, 채규구 교사 홀로 남아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얼굴이 공개되는 것은 꺼렸다. 무죄 선고 후 보상까지 받았음에도 차가운 시선은 여전해서 조심스럽다는 것.
“5·18 민주화운동 이후 선생들이 독서그룹을 만들어 토론도 하고 그랬죠. 이광웅 시인이 어렸을 때 베껴둔 <병든 서울>을 박정석 선생이 복사해서 보관하다 제자에게 빌려줬던 모양인데, 그게 화근이었어요. 그 제자가 버스에 놓고 내리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전북대 철학과 교수에게 자문했고, 그 교수는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대목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고 했답니다. 지난 얘기지만, 경찰이 국문과 교수를 찾아갔더라면 흐지부지됐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철학과 교수는 이념적으로 해석했지만, 국문과 교수는 문학적으로 접근했을 것이니까요.”
어느덧 환갑을 넘긴 채규구 교사는 아직도 고문과 빨갱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지쳐 보였다. 그는 “일제가 망하고 해방이 되는 줄 알았는데 민족이 분단됐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다. 형제끼리 한쪽은 미제 앞잡이라 맹공하고, 한쪽은 ‘불구대천지수’라 목에 핏줄을 세워 외치고 있다”면서 “하늘 아래 함께 지낼 수 없는 원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서로 배려하고 약자를 돌봐주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이광웅 시비에 새겨진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