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나는 꿈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지하의 무덤으로 내려갔다가 차마 놓고 올라올 수가 없어 다시 안아들고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몹시 통곡을 했는데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꿈이었지만 잠결에 내가 몹시 통곡하는 소리에 나를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실제로 내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이 꿈은 어쩌면 동족 살상의 비참함과 나의 생애의 여러 가지 잘못을 회개하는 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이한 꿈이었다. 그날부터 이 꿈을 꾼 사내는 <예수의 생애>를 그리기 시작했고, 1년여에 걸쳐 수태고지부터 승천까지 30장의 대작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예전의 그 어떤 성화와도 달랐다. 아름다운 한국화로 그려졌으며, 예수도, 그의 아버지 요셉도, 어머니 마리아도, 12사도와 뭇 백성들도 다 갓 쓰고 한복 입은 조선 사람들이었다. 흰 피부에 콧날이 오뚝한 서양식 예수와는 판이했다.
이 성화를 그린 사내가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4-2001)이다. 운보는 8살에 장티푸스로 인하여 청각을 상실하고 평생 농아로 지냈다. 그렇지만 미술에 소질이 있어서 이당 김은호에게 사사하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벌써 선전(조선미술대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운보는 해방 이듬해에 결혼을 하고, 역시 화가인 부인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왕성히 활동했지만 6.25 전쟁은 그를 다시 시련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 부부는 어린 딸과 아들을 업고 군산으로 피난했다. 처가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피난생활이 고단했지만 그들 부부는 붓을 놓지 않았으며, <예수의 생애>는 그 때 그린 것이다.
아내가 없었다면 운보의 예술도 없었으리라고 단언해도 무방할 정도로 운보에게 아내는 큰 버팀목이었고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내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은 군산 출신으로 한국화단에서 운보 못지않게 또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우향은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하여 6살 되던 1925년 군산으로 이사하였고,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와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주여고)를 졸업했다. 재력이 있었던 그녀의 부친 박명수씨는 호남평야의 토지를 사들이며 식솔을 이끌고 군산으로 이사했다. 운보는 1944년 우향이 보고 싶어서 군산으로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본 우향의 방은 두 칸짜리였단다. 윗방에는 큼직한 침대가 놓였고, 아랫방은 온돌인데 양복장과 재봉틀, 커다란 거울, 꽃병, 프랑스 인형 등이 놓여 있었다고 하니 꽤 부유했던 모양이다.
우향은 전주여자고등을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하였다. 1937년 경성여자사범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가까운 순창공립보통학교(현 순창초등학교)에서 2년간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세 때인 1939년 교사를 사직하고 일본으로 가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그 대학에는 당시라면 집안이 넉넉하다고 해도 여성의 몸으로 유학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전문학교 3학년이던 1943년 선전에 ‘장(粧)’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것으로 특선에다 총독상까지 탔다. 운보는 그녀보다 6살이 많기는 했지만 이미 1931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선전에서 입선했고, 이후 매년 입선을 거듭하다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내리 4회 특선하여 제국의 화단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규정에 따라 1941년부터는 추천작가로 선전에 출품하고 있었다.
선전 수상을 위해 잠시 귀국한 우향은 운보를 만나보고 싶었다. 잘은 몰랐지만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미루어볼 때 나이 지긋한 원로화가쯤으로 짐작한 우향은 운보를 만나고 깜짝 놀랐다. 듣지 못하는 농아인데다, 홀몸으로 사는 노총각이었기 때문이다. 운보도 놀랐다. 흰 양장에 흰 하이힐을 신은 멋쟁이 아가씨가 자기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운보는 ‘눈이 부시고, 마당 가득히 환했다’고 그날을 회상한다. 둘은 그렇게 만났고 평생 지극히 사랑했다.
피난 와서 그들은 구암동에 있던 부친의 농장 토방에 살림을 차렸다. 장녀, 장남과 넷이 1년쯤을 보냈는데 처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전쟁 중이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초기에는 운보가 가지고 간 ‘춘향도’를 백화양조 강정준 사장(현 호원대 강희성 총장 부친)께서 80만원에 구매해주어서 그 돈으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난리통에 거금을 들여 젊은 예술가의 작품을 사주었다니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훈훈하다.
전쟁 직후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시인 고은(高銀)은 고향 군산에서 밀항을 노리며 항만에서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군산 북중학교(현 중앙중학교) 이종록 이사장(현 군장대 이승우 총장 부친)이 불렀다. 고은의 재주를 알고 있었던 이종록 선생은 그에게 국어와 미술 교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고은의 학벌은 군산중학교 4학년 중퇴가 전부였다. 시인은 요즘도 ‘중학교 중퇴한 내가 중학생을 가르쳤노라’고 자랑하며 이종록 선생의 따뜻한 배려를 전하곤 한다. 군산이 진정 품격 있는 도시가 되려면 이런 미풍이 이어져야 한다.
운보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차녀 선은 피난시절 군산에서 낳았고, 3녀 영은 환도 후에 성북동에서 낳았다. 아무 소득 없이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다섯 식구가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동네 살며 미군 비행장에 다니는 사람의 소개로 운보는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한 장에 5달러인데 소개료 1달러 50센트를 제하고도 3달러 50센터가 남았다. 하루에 두어 장씩을 그리니 수입이 꽤나 짭짤했다. 그것으로 붓과 물감도 사고, 토방에서 벗어나 근처에 반듯한 집을 한 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작업실이 갖춰진 그 집을 ‘구암장(龜岩莊)’이라고 불렀다.
성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구암장에서 제작되었다. 그 지난했던 과정을 우향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는 자나깨나 성경에 그 모든 괴로움을 묻어가며 성화구성에 날을 보냈다. 그는 잠 속에서 예수를 만나 보았고 백주에 논길에서도 그분을 뵈었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예수를 뵈었다고 하니 이 신비는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평론가 오광수는 이 한국산 성화에 대하여 “예수가 처한 시대와 환경을 2천 년 전의 팔레스타인으로 설정하지 않고 조선조 시대의 이 땅으로 설정함으로써 예수를 이 땅에 때어나게 하고 있으며 우리 속에 존재하는 실체로써 파악하고 있다.”고 말한다.
운보는 독실한 신앙으로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꿈을 매개로 하느님과 자주 만났다. 그의 꿈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막내딸 영을 잉태했을 때다. 꿈에 성당에서 수녀를 보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생생하여 이듬해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운보는 이 작품을 증정하였고, 지금은 바티칸이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한국화이지만 흡사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처럼 보이는데, 구암동 시절 한국의 전통회화를 현대회화로 승화시킨 노력의 결과이다.
운보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개신교회를 다녔다. 그림 공부가 한창이던 청년시절에는 스승 이당과 함께 유명한 안동교회에 다녔고, 그의 나이 23세(1936년)에 이 교회 김우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성화를 그렸던 군산 피난시절이나,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그렸던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개신교도였다. 그런데 이 그림의 계기가 된 막내딸 영은 자라서 실제 수녀가 되었다. 만년에 운보는 이 딸의 권유를 받아들여 가톨릭으로 신앙을 옮겼고, 1985년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이 또한 기이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금년 봄에 서울미술관에서 『운보 김기창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 성화를 비롯하여, <구멍가게> 같은 군산에서 그린 구성주의 작품들, 그리고 강정준 사장에게 팔았던 <춘향도>, 바보산수 등 운보의 대표작이 대거 전시되었다. 그 전시회의 타이틀은 『예수와 귀먹은 양』이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는 스스로를 목자로, 불쌍한 민중을 양으로 비유하고 있다. 목자 예수께서 애지중지 기르시던 양은 불행하게도 귀가 먹었지만 그 천형(天刑)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성화를 그렸던 것이다.
운보는 “구암동에서의 3년은 나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 시기가 중요하기는 우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치열한 실험정신으로 화풍을 혁신시켜 나갔다. 운보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날마다 저녁에 오고가는 신작로 중간쯤에 판자로 엮은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거기서 나는 그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늙은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무엇을 느끼게 되었다. 판잣집 구멍가게를 어떻게 하면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동양화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탄생된 작품들이 운보의 「노점 1, 2, 3」, 「여인」, 「복덕방」, 「엿장수」, 「구멍가게 1, 2」, 우향의 「달밤」, 「달밤의 부엉이」, 「부엉이 A, B」, 「자매」 등이다.
운보가 영감을 얻은 구멍가게는 어디였는지, 또 그 할머니는 누구였는지 알 길이 없다. 운보는 미군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김종래라는 분을 만나 그의 가게에서 같이 일했다고 하는데, 동고동락했다는 김종래씨의 행적도 찾을 길이 없다. 향토 시인 최영은 운보가 “명산동 화교학교 앞 옛 유곽자리에 화실을 차렸다”고 회고했는데, 이 화실이 그들의 작업장이었지 않나 짐작해본다. 우향은 운보의 아내를 넘어서 한국 현대화를 개척한 대표화가이다. 한 고장에서 이런 인물은 그리 쉽게 나는 법이 아니다. 하지만 우향의 생가가 어디였는지 알 수 없고, 그녀를 기억하는 친지도 우리 곁에 없다. 고향에는 그녀의 작품 한 점이 없다. 어쩌면 그 기억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스스로 지웠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분단의 땅을 찾으셨다. 그리고 남북한의 평화를 바라며 기도하셨다. 이 광경을 보노라니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성화를 그렸을 운보와 우향이 떠오른다. 성화를 그리며 그들 또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
이제 그들은 다 하느님 품으로 갔지만,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피난시절 구암동 토방에서 간난아이 젖먹이며 성화를 그렸던 시절이라고 하지 않을까? 아쉽게도 명화의 산실이요, 기적의 현장인 ‘구암동 390번지’에는 아무런 표식 하나가 없으니 심히 애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