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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현 LG트윈스 2군감독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4.07.01 11:46:2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1981년 당시 1년생 조계현 투수를 앞세워 제15회 대통령배 정상에 오르고, 이듬해 전국규모대회 3관왕을 차지하자 군산은 ‘조계현, 장호익 신드롬’에 빠진다. 

 

군산만이 아니었다. TV에서는 역전의 명수를 모티브로 한 개그 프로가 방영되고, 골목동네 야구 꿈나무들은 서로 조계현-장호익 배터리를 하려고 신경전을 벌였다. 군산상고 유니폼 차림의 조계현 얼굴이 각종 스포츠신문과 월간지 표지를 장식하면서 어느 여중학교에서는 가짜 ‘조계현 사촌 동생’이 등장해 소동을 빚기도 하였다. 

 

입이 있어도 사투리조차 함부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암울했던 시절. 당시 군산은 군사정부의 편향적인 개발정책으로 시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군산상고 응원 구호로 ‘우리 소원은 신외항 개발!’을 외쳤을까. 그 시기 조계현 투수가 구원자처럼 나타났던 것, 시민들은 그의 파워 넘치는 강속구가 뿌려질 때마다 기뻐했고, 환호했고, 희열을 느꼈으며, 슬퍼하고 분노했다. -기자 말-

 

‘역전의 싸움닭’다운 조계현의 찬란한 기록들

야구 명문 군산상고와 연세대를 졸업했다. 88올림픽 대표와 농협을 거쳐 해태 타이거즈(1989~1997), 삼성 라이온즈(1998~1999), 두산 베어스(2000~2001) 등에서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2001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KBS 해설위원을 거쳐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2002~2003),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2005~2009),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2009~2011)를 지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선임되어 남자단체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이끌었다.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타격코치였던 김기태 LG 트윈스 감독 요청으로 2011년 10월 수석코치로 영입됐다. 지난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팀을 감독 대행으로 이끌다가 5월 11일 양상문 감독이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후 2군 감독으로 보직 이동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상은 조계현(51) LG 트윈스 2군 감독의 스펙이다.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조계현. 물러설 줄 모르는 투지와 승부 근성을 지닌, 그러면서도 정이 많은 의리의 사나이로 알려진 그는 선수 시절 ‘싸움닭’이란 별명을 얻으며 명성을 날렸다. 국내 변화구의 일인자로 타자를 요리조리 꼬이는 능력과 끈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눈 감고 던질 수 있는 변화구만 10가지가 넘는다고 해서 팔색조, 변화구의 마술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난삼아 ‘조 닭’이라 부르는 팬도 있었다. 

 

연세대 4학년이던 1987년, 춘계대학야구 리그 11경기 모두 나서 8승 1패 2세이브를 달성한다. 이는 대학야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며 갈수록 경기 수가 줄어 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994년 4월 28일 광주구장에서 쌍방울 김원형 투수와 15회까지 완투 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3-3 무승부. 투구 수는 조계현 190개, 김원형 212개로 팔이 빠질 정도로 던졌다. 이는 프로야구 마지막 15회 완투 기록으로, 100개 한계 투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요즘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프로야구 통산 15회 완투는 모두 10회. 그중 해태 선수가 무려 다섯 번을 차지한다. 왜 해태가 강팀이고 투지와 근성의 팀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수치이기도 하다. 

 

프로통산(1989~2001) 320경기에 등판 126승 92패 17세이브 방어율(평균 자책점) 3.17을 지켰다. 64회 완투승, 19회 완봉승, 1100 탈삼진(1923 1/3이닝)을 기록했다. 해태 우승에 5회(89년, 91년, 93년, 96년, 97년) 이바지했으며, 두산 베어스 우승(2001) 멤버이기도 하다. 1993년(17승), 1994년(18승) 연속 다승왕을 차지했다. 1995년에는 방어율 1.71을 기록, 최소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다. 통산 완봉승 역대 4위, 통산 다승 역대 6위를 마크한다. 어느 강타자를 만나도 물러설 줄 몰랐던 ‘싸움닭’다운 찬란한 기록들이다.

 

 


 

지난 11일 LG트윈스 2군 선수들 훈련장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 ‘LG 챔피언스 파크’를 찾았다. 조계현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와의 만남은 지난 1월 4일에 이어 두 번째. 반갑게 맞아주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에 마주앉았다.  

 

김기태 감독은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조계현 수석코치에게 ‘남아서 감독 대행을 해주시라’고 부탁했다. 구단에서도 ‘감독 대행’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고사했단다. 김 전 감독과 의리 때문이었다. 김 감독을 따라 팀을 떠나려 했다가 2군 감독을 맡기까지 심경이 복잡했을 터. 요즘 근황을 묻자 담임선생을 어려워하는 초등학생처럼 수줍어하며 “지낼만합니다!”라며 피식 웃는다. 그의 천진한 표정에서 시골 소년의 순박함과 강한 카리스마가 동시에 풍겼다.

 

냇가에서 붕어 잡아 판 돈으로 야구장비 구입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趙啓顯). 그는 1964년 전북 군산시 장미동에서 3남 3녀 중 막내(늦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직업은 말단 시청 공무원. 워낙 박봉이어서 여덟 식구 먹고살기도 어려웠다.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는 밭농사도 짓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구정물을 받아다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워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다. 

 

조 감독은 “끈기와 참을성은 보수적인 아버지 성격을, 두둑한 배짱과 승부근성의 싸움닭 기질은 억척스러울 만큼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며 옛 추억들을 떠올렸다. 

 

“저는 늦둥이로 태어난 덕에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원래 황해도 송화군에 사셨다고 합니다. 자식은 모두 12남매를 두었는데, 한국전쟁 때 둘째 누님을 고향에 남겨놓고 피난 내려오다가 5남매를 잃었다고 하드군요. 가슴 아픈 사연인데요. 얼굴도 모르는 누님이 북에 계시니 저도 이산가족인 셈이죠.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도시에서 돼지 사육을 할 수 없게 되자 양돈·양계가 가능한 오룡동 산동네로 이사했죠. 그곳도 가난뱅이 집단촌인 피난민촌이었습니다. 저처럼 북에서 내려온 아이가 많았는데, 그들과 석전(石戰·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을 자주 했습니다. 1971년 남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석전을 즐겼죠. 그때는 야구가 무슨 운동인지도 몰랐습니다. (웃음) 

                  

야구는 제 의도와 상관없이 시작했어요. 한창 공부에 취미를 붙이던 3학년 2학기 때 같은 반 백인호(현 KIA 코치)가 추천하고 문철웅(체육부장) 선생님이 권해서 야구공과 인연을 맺었죠. 송상복(스마일피처) 선배가 감독이었는데, 선수들이 고생 많이 했어요. 고된 연습에도 일요일이면 고철과 폐품을 수집해서 고물상에 팔기도 하고, 냇가에서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아 식당에 팔아 야구 장비를 샀거든요.” 

 

그랬다. 모두가 가난했던 1970년대 중반. 그때는 군산에 초·중·고 야구팀 7개를 피라미드 형식으로 창단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오던 이용일(전 KBO 총재권한대행) 당시 경성고무 사장이 대형화재를 두 번이나 당하고 주식 50%가 선경(현 SK)으로 넘어가 관심에서 한 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성숙한 리더십 보여줘

야구 인생을 FM대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조계현.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체육부장에게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 모집 때 54명이던 야구부가 14~15명으로 줄어들고, 운동화 한 켤레도 구매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는 동료들을 보며 뭔가 결심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5학년 때 송상복 감독님이 군대에 가고 투수이자 4번 타자였던 제가 감독 겸 주장을 맡았죠. 작전도 세우고 선수들 관리도 했거든요. 그렇게 팀을 이끌다가 어느 날 체육부장에게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소질도 있는 놈이 왜 그러느냐고 묻더군요. 대뜸 육성회비(2400원) 면제를 요구했죠. 그 시절에 선생님과 딜(협상)을 했던 겁니다. (웃음) 체육부장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기에 저 혼자가 아니고 야구부 전체라고 했더니 놀라더군요. 결국, 교장 선생님과 상의 끝에 전원 면제 결정이 내려져 선수들이 연습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는 그렇게 육성회비 면제로 선수들 사기를 북돋워 주었고 선수들은 이듬해 봄 서울에서 개최된 제6회 전국 초등학교 야구대회 우승으로 화답했습니다. 저도 무패행진을 이어갔죠. 제가 미더웠던지 학교에서 붙잡는 바람에 서울 야구 명문의 스카우트 제의도 뿌리치고 중학교 진학을 1년 미뤘습니다. 그리고 1977년 7회 대회도 우승, 2연패의 영광을 안았죠. 야구를 잘해서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을 두 번 다닌 것도 기록이라면 기록일 겁니다. (웃음)”

 

조 감독은 “주위에서는 군산 촌놈들이 서울까지 올라갔으니 한 게임만 이겨도 큰 수확이라고 했는데 우승까지 했고, 그 모두가 땀과 눈물의 결실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노히트노런 기록 

초등학교 시절부터 파워 넘치는 투구로 주변을 놀라게 했던 조계현은 1978년 장호익, 고장량, 한경수 등과 함께 군산남중에 진학한다. 그는 중학교에서도 장호익과 호흡을 맞추면서 전국규모 대회에서 두 차례 결승에 진출한다. 투수라면 누구나 욕심내는 노히트노런도 달성한다. 그럼에도 우승기는 한 번도 거머쥐지 못한다. 

 

중학생 조계현의 롤 모델은 고교 시절부터 초특급 투수로 찬사를 받으며 연세대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는 최동원(2011년 타계). 소년 조계현은 각종 타이틀을 거머쥐고 당대 최고 투수로 군림하는 최동원을 보며 꿈을 키운다. 어떤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열심히 노력해서 연세대에 진학하고, 국가대표 선수도 되어 야구장을 호령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제8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1979년 5월 30일 충북 청주에서 열렸다. 군산남중 2학년 때였다. 소년 조계현은 전북 대표로 참가, 개막전 선발로 나서 강원 대표 타자들을 압도하며 7회 2사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갔다. 한 명을 볼넷으로 내보냈으나 곧장 견제구로 잡아낸다. 경기 결과는 전북이 1-0 승리. 그는 대회를 앞두고 조성된 청주구장의 첫 번째 승리투수이자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가 된다. 

 

1980년 6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제35회 청룡기쟁탈 중학부 결승에서 군산남중은 충남중에 1-3으로 석패, 준우승에 머문다. 이 대회에서 조계현은 감투상을 장호익은 타격상을 받는다. 그해 8월 서울에서 열린 제23회 문교부장관기 중학 야구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한다. 조계현 장호익 배터리는 이 대회에서도 감투상과 타격상을 각각 받았다. 

 

 

 

군산상고 1학년 때 스타로 떠올라

조계현은 군산상고에 입학하는 1981년(야구부 14기)부터 스타 반열에 오른다. 야구전문가들이 가장 좋은 구질을 보유한 유망주로 평가했던 것. 그해 5월 대통령배 대회와 7월 미국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선발 및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9월에 열린 한·일 친선 고교야구대회에서도 완숙한 투구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계현-장호익 배터리가 이끄는 군산상고 야구부(감독 백기성)는 유난히 무덥고 가물었던 1981년 5월 15일 대망의 대통령배 정상을 탈환한다. 특히 조계현은 선발 아니면 위기 때마다 마운드에 올라 방어율 1·29의 놀라운 투구로 우승을 이끌었다. 

 

제15회 대통령배 고교야구 결승전이 열리는 그 날 오후 3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스탠드를 꽉 메운 3만 5천여 관객에 응원 열기까지 더해져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응원 함성이 하늘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군산상고와 북일고 결전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전국의 고교야구팬과 많은 군산 시민이 라디오와 TV 앞에서 숨을 죽였다.

 

군산상고의 선공. 1회 초 선두 김평호와 4번 임동구가 포볼을 골라 1사 후 주자 1, 3루 기회를 잡는다. 이때 5번 조계현이 북일 선발 안성수의 두 번째 공을 휘어 치는 순간, ‘딱’ 소리와 함께 우익 선상으로 빠지는 적시 2루타가 되어 주자일소, 2점을 선취한다. 1회 말 군산상고 선발 강대호 투수가 2루타를 맞고 실점 위기에 놓이자 그날의 히어로 조계현이 마운드에 올라 나머지 타자들을 3진으로 가볍게 처리한다. 

 

다시 2회 초. 연속 포볼과 야수선택으로 만루를 만들어 스퀴즈로 1점을 뽑고, 2번 고장량의 적시타로 2점을 추가 5-0으로 대세를 굳히자 군산 시내는 흥분의 도가니. 그에 화답하듯 조계현은 완벽한 투구로 2, 3. 4. 5회를 범타로 처리한다. 공을 던질 때마다 터지던 환호성이 잦아든 것은 2점을 내준 6회 이후. 사람들은 TV 앞에서 가슴을 태웠다.  

    

드디어 7회 말. 위력이 떨어져 데드볼을 내주고, 장호익마저 파울볼로 팔을 다쳐 군산상고는 최대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강한 배짱의 조계현은 빠른 직구로 승부수를 던지며 1점만을 허용한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모두가 숨을 죽였다. 8회 말 무실점. 9회 말 조계현의 마지막 직구가 범타로 끝났을 때 땀으로 범벅된 선수들은 얼싸안았고, 군산 시민들의 함성은 높이 솟은 월명공원 수시탑 주위를 맴돌았다. 

 

군산상고 우승이 확정되자 다방에서 TV 중계방송을 시청하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집으로 향했다. 초여름 밤, 아름다운 항구 군산의 밤은 야구 이야기와 술에 흠뻑 젖은 채 깊어갔다. 다음 날 아침, 도심지 거리에는 조계현-장호익 배터리를 꿈꾸는 야구 꿈나무들과 색색의 환영 현수막이 하늘을 물들이며 역전의 명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계현 감독은 “50년 야구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 깊었던 경기(대회)를 몇 개 기억하는데, 군산상고 1학년 때 대통령배 우승이 가장 앞 순위에 들어간다”며 “가슴 뭉클한 환영을 받아서 그런지 군산 시내 카퍼레이드를 생각할 때마다 전율을 일으킨다”고 덧붙였다. 이어 시원한 음료수를 기자에게 권하며 ‘한탄’ 한마디를 남겼다.

 

“세월 참 빠릅니다. 초등학교 소사 아저씨가 깎아준 방망이로 타격 연습하고, 고무신 신고 냇가로 물고기 잡으러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들이 장가들게 생겼으니, 차~암나, 서글퍼요 서글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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