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군산에는 남진, 하춘화, 김지미 등 당대의 인기스타가 출연하는 버라이어티쇼(variety Show)가 자주 들어왔다. 공연은 주로 군산극장(우일시네마)과 남도극장(국도극장)에서 했다. 쇼가 들어오는 날은 통행이 불편할 정도로 사람이 넘쳐났던 개복동 골목. 이곳은 비들기집(해장국집)을 비롯해 크고 작은 술집과 식당이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하고 있어 '먹자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사판 노동자에서 한국합판 여공, 대학생, 기업체 사장님까지 다양한 계층이 즐겨 찾던 추억의 골목이다.
음식점 주방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고소한 육수 냄새, 비릿한 맥주 냄새,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칼칼한 고춧가루 냄새, 새콤달콤한 막걸리 냄새에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아가씨들 화장 냄새까지 더해져, 뭇 사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떠나버려 대낮에도 적막강산처럼 고요가 흐른다.
언제부턴가 사람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려운 골목, 바람마저 쓸쓸하게 느껴지는 골목을 40년 가까이 보초병처럼 지키는 식당이 있다. 1970년대 말, 지금의 위치에 설렁탕집 간판을 내걸고 개업한 운정식당이다. 한자리에서 그리 오래도록 버티면서 적잖은 단골을 확보한 비결은 손님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성과 주인아주머니의 깔끔한 손맛이 아닌가 싶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그만인 '녹두삼계탕'
운정식당은 기자가 객지에 있을 때도 군산에 오면 들러서 설렁탕 한 그릇 사 먹고 가던 단골집이다. 조리사들이 정성을 다해 끓여내는 '녹두 삼계탕'은 수라간 상궁도 맛보면 탄복할 정도로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 중심에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를 연상시키는 양기추, 정옥순 부부가 있다.
서수 양계장에서 가져온 동우닭에 찹쌀, 녹두, 참깨, 밤, 대추, 인삼 등을 넣은 '녹두 삼계탕'은 손님이 주문하면 삶아놓은 닭을 다시 뚝배기에 넣고 끓여서 내놓는 게 아니라 즉석에서 조리한다는 게 가장 큰 특징. 3개월 정도 키운 닭을 재료로 하는데, 일반 삼계탕집에서 내놓는 닭보다 푸짐하고 질감도 좋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밑반찬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알맞게 익은 깍두기와 새콤달콤한 양파 피클, 고소한 배추 겉절이, 상큼한 오이 무침도 녹두죽 맛을 돋우는데 각자 한몫을 한다. 특히 싸~아한 맛이 입안으로 퍼지는 양념과 개운한 젓국이 어우러지는 부추 겉절이는 어머니 손맛을 떠오르게 한다.
씹을수록 입안이 개운해지는 양파 피클은 맛도 맛이지만 느낌이 시원하고 아삭아삭 씹는 즐거움이 더한다. 그래서 양파 피클과 부추 겉절이는 별미 중의 별미로 꼽힌다. 양파 피클은 젊은 층에게 부추 겉절이는 노인 층에게 인기가 좋다는 양기추 사장 설명에서 세월과 함께 음식의 기호도 변화하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맛으로 승부하겠다는 정순옥 아주머니
운정식당 녹두 삼계탕은 일반 삼계탕과 여러 면에서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 맛은 그야말로 일품. 닭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전혀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살코기도 야들야들 쫄깃하고 고소한 질감이 씹을수록 입맛을 당긴다. 음식을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야 옛날 어머니 손맛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신선한 재료에 정성을 깃들여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이 제 '영업 철학'이에요, 옛날부터 군산 사람들 입맛이 까다롭기로 소문났잖아요. 그렇게 입이 까탈스러운 손님일수록 맛이 좋으믄 더 오죠, 요즘엔 산골짜기에 있는 식당도 맛이 좋으면 찾아가잖아요···."
정순옥 아주머니의 대답, 즉 손님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비결은 ‘정성’과 ‘손맛’에 있었다. 예상외로 간단했다. 중앙로에 있던 시청이 조촌동으로 이사한 지 20년이 되어가고 법원·검찰청 등 관공서들도 시청 부근으로 이전했다. 따라서 원도심권에서 호황을 누리던 유명 식당들도 대부분 이전개업을 했다. 그럼에도 정순옥 아주머니는 불리한 상권을 맛으로 경쟁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녹두죽은 고소하고 담백한 게 특징.
처음 개업할 때 운정식당은 우족탕과 설렁탕 전문이었다. 그렇게 영업을 쭉 해오다 10여 년 전부터 연구의 연구를 거듭한 끝에 녹두 삼계탕을 선보였단다. 손님들 반응은 예상외. 그동안 터줏대감 노릇 하던 우족탕과 설렁탕이 ‘왕따’당할 정도로 찾는 손님이 많아 고민이라는 것. 그 나이에 '삼계탕' 벤치마킹에 성공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탐스럽고 정성스럽게 얹은 고명과 팔팔 끓는 육수의 구수한 냄새는 침샘을 자극한다. 닭을 다 발라먹고 후식으로 먹는 녹두죽은 소화도 잘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고, 고소하고 담백한 맛 또한 환상적이다.
찜통더위가 시작됐다. 초복(初伏)도 며칠 남지 않았다. 삼계탕은 복날에 먹는 전통음식으로 알려졌다. 맞다.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한다. 소식(小食)을 전제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골고루 잘 먹는 게 보약이라고 생각해서다.
사람의 신체는 잠을 잘 때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고 한다. 그렇게 신체의 각 부위가 각자 임무를 수행하면서 필요한 영양소가 있으면 그에 합당한 음식이 먹고 싶다고 한다. 감기에 걸리면 콩나물 해장국이 생각나고 임산부가 미역국이 먹고 싶듯 말이다.
녹두는 우리 몸 어디에 좋을까?
20여 년 전 서울의 모 여자고등학교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80%가 넘는 학생이 ‘녹두나물’의 다른 이름인 '숙주나물'을 모른다고 답변했다는 기사를 읽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얘기하다 보니 어머니가 무쳐주던 녹두나물이 새삼 떠오른다. 학교에서 배운 녹두장군(전봉준 장군)도 생각나고.
죽도 끓여먹고, 밥을 해먹기도 하는 녹두는 예로부터 1백여 가지 독을 풀어준다는 말이 내려온다. 그래서 그런지 입술이 헐거나 몸이 피곤할 때, 또는 피부에 질환이 생겼을 때 녹두죽을 끓여 먹으면 효험이 있단다. 기자도 녹두죽을 먹고 효험을 봤던 경험이 있다.
숙주나물은 씹을수록 개운한 맛이 더하고 입안에 고소한 맛이 감도는데 비타민 성분이 증가하여 소화가 잘 되고 해열 숙취에 좋다고 한다. 막걸리 안주로 으뜸인 빈대떡의 주재료이기도 한 '녹두'는 한방효능에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동의보감에 나온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녹두로 베개를 만들어 베면 눈이 밝아지고 두통을 없애준다. ② 원기를 돋워주고, 정신을 안정시킨다. ③ 열을 다스리고, 독을 풀어주며 소변을 이롭게 한다. ④ 오장을 조화시켜 주며, 소갈증에도 좋다 ⑤ 설사를 그치게 하며, 당뇨, 해열 고혈압, 숙취에도 매우 좋다.
그러나 녹두는 몸을 차게 하는 힘이 강해서 혈압이 낮거나 냉증이 있는 분들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더위가 극심하고 큰비가 내린다는 소서(小暑), 대서(大暑) 절기다. 건강관리가 절실한 계절이 아닌가 싶다.
운정식당
장소: 군산시 개복동 10-13(군산시 중정길 8-2)
전화: 063-446-0891
매주 첫째, 셋째 월요일은 휴일 (겨울에는 일요일에도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