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1971년 전국체전 우승에 이어 이듬해 2관왕을 차지, 호남에 야구 붐을 일으키면서 국내 정상급 팀으로 자리매김한다. 경기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방전, 투지와 끈기로 접전을 펼치면서 팬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다. 1971년~1972년, 그 짧은 기간에 놀라운 저력(우승 3회, 준우승 1회)을 보여줬음에도 선수들 진로는 불확실하기만 했다.
"나는 김일권의 진로를 놓고 당시 한일은행 김응용 감독과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김응용 감독은 김일권을 원했고 나는 양기탁과 함께 입행시켜달라고 요구했다.(중략) 김응용 감독은 애써 노력했지만, 한일은행은 김일권 한 명밖에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김 감독은 며칠 뒤 '죄송합니다. 김일권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김일권과 양기탁은 함께 상업은행으로 갔다···." (2003년 5월 22일 중앙일보)
1968년 군산상고에 야구부를 창단하고 선수들의 진학과 취업에 힘을 기울였던 이용일(84) 전 KBO 총재권한 대행의 회고다. 이 대행 회고대로 1973년 10월 5일 자 <경향신문>은 김일권을 한일은행 스카우트 예정자로 보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처음 스카우트 제의는 금융팀이 아닌 고려대였다"며 자신 또한 고려대를 희망하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연·고대 진학이 목표였는데, 마침 고려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아, 내년에는 연고전을 뛰겠구나!' 하고 가슴이 부풀어 있었죠. 근데 아버지가 한사코 반대하시는 겁니다. 그때 처음 아버지에게 말대꾸했고, 귀싸대기도 맞았죠. 아버지는 '네가 대학에 가면 용돈을 댈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대학에서 스카우트비랑 장학금을 받으니까 용돈이 필요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 저보다 조금 처지는 선수를 한두 명 데리고 갈 수 있는 위치니까 학교에서 아버지를 통해 상업은행으로 유도했던 겁니다."
일본 진출 좌절 후 대학캠퍼스 더욱 그리워져
국내 최고 대학스포츠 축제인 연고전(고연전) 출전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던 김일권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상업은행으로 진로를 정한다.
"결국 상업은행(감독 장태영)으로 마음을 정하고, 입행 동기생 9명이 장태영 감독에게 인사를 갔죠. 근데 대뜸 집 주소와 가족 이름을 한자로 써보라고 하는 거예요. 모두 놀랐죠. 저하고 양기탁 둘만 써냈는데, 이번에는 마음에 드는 중앙 일간지 사설을 골라 노트에 옮겨 오라는 숙제를 내더군요. 그것도 매일. 연습 끝나면 숙소에서 한자투성이인 사설을 적느라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생활의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필체 좋다는 칭찬도 듣고요(웃음)."
상업은행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는 1975년 추계연맹전 타격왕(타율 4할 6푼 2리)에 오르면서 상업은행을 12년 만에 우승(7승 1패)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대회가 끝나자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팀 가네다(金田正一) 감독은 김일권, 장효조, 이선희 등을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밝힌다. 가네다 감독은 한국계로 제2의 장훈, 백인천을 스카우트하겠다고 해서 관심을 끌었다.
당시 팬들은 한국 선수들의 일본 진출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체육계 역시 한국야구 사상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한 백인천 선수도 1962년 병역 특혜를 받아 출국한 전례가 있어 가네다 감독이 탐내는 선수들에게도 병역 특혜를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여망이었다. 그럼에도 김일권은 병역법에 묶여 꿈을 접어야 했다. 일본 진출이 좌절되자 대학 캠퍼스가 더욱 그리워졌다.
"1974~1976년까지 상업은행 소속이었는데, 대학 진학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체육특기자 혜택 기간이 3년이었거든요. 상의할 사람은 없고, 속만 태우다가 하루는 장태영 감독님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단칼에 '안 돼!'라고 하시더군요. 해서 '감독님은 옛날에도 명문인 서울대학 나오신 것으로 아는데, 왜 저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당돌하고 건방졌죠(웃음)."
김일권은 상업은행 소속 3년의 마지막 무대를 통렬한 대역전 홈런으로 장식한다. 1976년 10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추계실업야구 연맹전 마지막 경기(상업은행-한일은행)에서 9회 초까지 두 점(0-2)을 리드당하다 9회 말 주자 1, 3루 상황에서 한일은행 에이스 주성노의 두 번째 볼을 받아쳐 끝내기 3점 홈런을 터뜨린 것. 승리를 목전에 두고 안도의 숨을 내쉬던 김응용 한일은행 감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대학 진학, 군 복무 모두 납치로 시작
1976년 시즌이 끝나자 기업은행 박해종, 상업은행 김일권, 함상윤, 철도청 황태환 등 실업야구 톱클래스 선수들의 대량 이탈 현상이 일어난다.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그들의 가장 큰 이유는 실업팀 선수로 보람을 찾을 수 없고, 더욱이 고교 졸업장으로는 은행원 장래가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언론들은 금융기관의 소극적인 운영방침이 선수들의 이탈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상업은행 유백만 감독의 동의를 얻어 연세대를 희망했던 김일권은 입학시험(1977학번)에 대비, 체력장 테스트를 끝낸 상태였다. 아버지의 강압으로 포기했던 대학 진학의 꿈이 이루어지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해 12월 콜롬비아에서 개최되는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에 다녀와 연세대 이재환 감독과의 만남도 약속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 이튿날 새벽 상업은행 숙소에서 납치를 당한다.
"을지로 6가에 있는 다방에서 이재환 감독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새벽 4시쯤 납치를 당했습니다. 체격이 우람한 청년 몇 명이 끌고 가는데 '아야~' 소리도 못했죠. 코로나 차에 싣고 잠실 어느 아파트(한양대 스카우트부장 자택)로 데려가 하루 재우더니 소공동에 있는 호텔 스위트룸에 가둬놓고 청년들이 보디가드 식으로 지키면서 끼니때 밥만 쓰~윽 넣어주는 거예요. 연세대 입학원서 제출 기간 2~3일 지나서 풀어주는데 눈앞이 깜깜하더군요."
타의에 의해 한양대 선수로 등록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감을 프로정신으로 버텨냈다. 강한 정신력으로 연습에 돌입 그해(1977) 대학 춘계리그에서 홈런왕(9개)을 차지한다. 5월에는 미주(美洲)에 원정할 대학야구선발팀(감독 김진영)으로 뽑혀 인천에서 합숙훈련에 들어간다. 당시 나이 22세, 어느 날 갑자기 징병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서가 날아든다.
"합숙훈련을 받는데 군대 신체검사 영장이 나온 겁니다. 김진영 감독에게 말씀드렸더니 '군대는 무슨 군대야, 안 돼!'라고 하시면서 가더니 3개월 연기해놓고 오시더군요. 그래서 미주 원정(6월 29일~7월 22일)을 무사히 다녀왔죠. 제가 홈런도 몇 개 날리고, 원정 통산 14전 9승 1무 4패로 성적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백호기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을 치고 끌려가 군복을 입었죠.
하루는 심말룡 육군야구단(경리단) 감독이 잠깐 보자고 해서 갔더니 지프에 타라는 거예요. 아무런 생각 없이 올라탔죠. 지프가 방향을 잡고 속력을 내는데 이상해요. 자세히 보니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기사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더니 한 시간 남짓 지나서야 목적지가 논산훈련소라고 하는데, 어이가 없더군요. 어쩔 수 없이 4주 훈련받고 올라왔죠. 그래도 대접은 잘 받았습니다. 머리도 1주일이나 지나서 깎고···.(웃음)"
졸지에 육군야구단 소속이 된 김일권은 1977년 11월 니카라과 마나과 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회 슈퍼월드컵(대륙간컵) 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김봉연을 3번, 장효조를 5번에 두고 4번 타자로 기용되어 한국야구가 역사상 최초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주역이 된다.
야무진 타격과 재치 넘치는 베이스 러닝으로 국가대표팀 톱타자로 자리를 굳힌 그는 1979년 리그 롯데와의 경기에서 1게임 도루 6개의 한국 최고기록을 세운다. 1980년 3차 리그에서는 소속 경리단이 1승 2패로 부진했음에도 홀로 5할대 타율을 지키면서 체면을 세운다.
1980년 6월 제대 후 한양대 복귀를 거부하고 실업팀(포항제철) 입단을 희망한다. 하지만 등록규정에 묶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1년 5월 한양대 선수로 등록한다. 당시 김일권을 입단시키려던 포철 허정규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양대를 졸업하면 다시 포철에 온다는 조건으로 김일권의 한양대 등록을 승인했다'고 밝힌다.
감독 허락받고 나왔는데 대표팀 무단이탈?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 김일권. 그가 1982년 9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1년여 앞두고 시작된 국가대표팀(감독 어우홍, 코치 김충·배성서) 숙소에서 이탈, 이듬해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 잡음을 일으켰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언론들은 '선수촌 무단이탈', '명예보다 돈을 택한 김일권' 등의 타이틀로 보도했고, 사람들은 '돈만 밝히는 선수'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러나 그의 얘기는 사뭇 다르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받던 1981년 12월 어느 날 아내가 이삿날을 잡았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마침 일요일이어서 어우홍 감독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배성서 코치가 막는 겁니다. 감독님과 김충 코치에게 외출 허락을 받았다고 했더니 모멸감을 주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하는 거예요. 자기는 국가를 위해 신혼여행까지 반납해가며 대표선수 생활을 했다면서···.
저도 처자식이 있는 놈인데,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배성서 코치와 한판 붙었죠. 김충 코치는 말리구요. 자존심도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이해창(주장) 선배에게 '형, 나 대표선수 그만할래' 하고는 그날 밤 자정쯤 보따리를 싸서 나왔죠. 그게 지금도 회자하는 '대표팀 무단이탈'이에요. 이삿짐을 나르고 다음날부터 스포츠신문들이 무책임한 타이틀로 기사를 써대는데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 하고 죽고 싶더군요. (한숨)"
그 후 훈련에 불참한 김일권은 프로야구 입단을 밝히면서 자신을 국가대표에서 제명해 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1982년 2월 20일에는 광주체육관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 결단식 및 시민 환영대회에 참석, 구단주인 박건배 해태 사장으로부터 입사를 뜻하는 해태 배지를 받아 단복에 꽂는다. 사회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갈림길에 서 있는 김일권 선수'라고 소개하자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불고기 화형식' 사건은 해태 선수 모두가 공범
김일권은 호남 팬들의 대대적인 서명운동과 한양대 자퇴, 야구협회의 제명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해태는 그해 3월 31일 경기에 처음 출전한 그의 선전에 힘입어 MBC를 6-0으로 격파, 프로원년 첫 승리의 개가를 올린다. 이날 그는 1회 말 톱타자로 등장 4구를 고른 뒤 3번 김성한의 우전 적시타를 틈타 홈인, 첫 득점을 올렸다.
그리고 1982년 시즌 동안 풀타임에 가까운 75경기를 소화하며 2할 7푼의 타율과 홈런 11개를 때려내고 도루 53개를 기록, 프로원년 도루왕에 오른다. 그의 도루 기록은 경기가 108게임으로 늘어난 1987년 선배 이해창(54개)에 의해 깨진다. 그해 해태의 최종 성적은 38승 42패로 6개 팀 중 전체 4위에 머문다.
불굴의 투혼으로 뭉친 해태 선수들은 1983년 패권을 차지한다. 그해 10월 20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코리언시리즈(한국시리즈) 5차전(해태-MBC)에서 해태는 1회 말 출루한 김일권이 2루 스틸 때 볼이 빠지는 사이 3루에 안착, 안타 없이 선제점을 올린다. 기세가 오른 해태는 5회 말 김일권의 좌월 2루타 등 2안타와 포볼 1개로 2점을 추가, 일찌감치 승패를 갈랐다. 이날 MVP는 홈런왕 김봉연. 김일권은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음에도 메리트시스템이 절반으로 줄고, 숙소도 남서울호텔에서 시설이 떨어지는 호텔로 옮기자 해태 선수들은 구단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1984년 4월 10일 박건배 구단주가 마련한 회식자리에서의 '불고기 화형식'. 회식에 참석한 선수들은 석쇠에 올려놓은 불고기 새까맣게 타는데도 한 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다소 섬뜩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김일권이 주동해서 일어난 것으로 야구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선수 모두가 공범이었다"고 주장한다.
"안타·도루는 5000원, 2루타는 10000원씩 지급하는 '메리트시스템'과 숙소 문제로 선수들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죠. 그때 마침 박건배 회장(구단주)이 회식자리를 마련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한 번 들이대자'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 '좋다'고 하면서 앉아만 있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니 선수 모두가 주동자이고 공범이죠. 다만 제가 젓가락 드는 것을 신호로 불고기를 먹기로 약속했으니 기수 노릇을 했던 겁니다. (웃음)
저와 김응용 감독 사이에 언쟁은 있었죠. 하지만 제가 주범이 아니었다는 것은 박 회장도, 김 감독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며칠 지나고 박 회장이 부른다기에 갔더니 봉투를 하나 주면서 '네가 주동하지 않은 것 다 아니까 다른 생각 말고 여행이나 다녀와라' 라고 하는 거예요. 당시엔 김준환 선배가 주장이었고, 얼마 후 제가 주장을 맡았는데, 주동자였다면 구단이나 김 감독이 보고만 있지 않았겠죠.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김일권 개인의 '사보타주'였다는 것과 20명이 넘는 선수들과 구단 사이에 숙소와 돈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다고 알려지는 것과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이죠. 그런저런 상황을 유추해보면 (해태)구단이 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저도 할 말이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니까요. (웃음)"
그는 내성적인 성격에도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조직문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왔다. 경기 때마다 상대 팀 투수들의 세트모션을 노트에 메모할 정도로 도루에 욕심이 많았고, 프로의식도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프로야구 최초로 300도루를 달성하고 받은 상금과 광고모델 출연료를 가정이 불우한 최연소 아마레슬링 국가대표 선수에게 장학금으로 내놓는 등 어려운 이웃에 대해 애정도 남다르다.
영욕의 순간들을 모두 그라운드에 묻고 1991년 선수 유니폼을 벗은 대도 김일권. 그는 "고교 시절 꿈이었던 연·고대 진학은 진즉 물 건너갔고, 감독직은 아직도 미련이 있다"며 "납치, 타의에 의한 대학진학, 선수촌 무단이탈, 불고기 화형식 주동자 등 사건이 본질과 다르게 알려져 당시엔 속이 끓어올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타고난 업보,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같다"며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