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1972년 7월 황금사자기 우승에 이어 9월 대구에서 개최된 국회의장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강팀들을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 그해 2관왕에 오른다. 군산상고 에이스 김봉연은 대전고와의 결승에서 1회 초 1점만을 내주는 호투로 역전승(4-1),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면서 대학과 실업팀 감독들이 욕심내는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한다.
"스카우트 제의는 3학년(1972) 여름부터 대학과 실업팀 등, 여러 곳에서 들어왔는데요. 저는 최관수 감독님이 투수로 활약했던 기업은행을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스승의 뒤를 잇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영어교사였던 큰형이 '공부해서 교사가 되려면 연세대에 가야 한다'며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불과 옷만 싸들고 서울로 올라갔죠. 그리고 그해 겨울 연세대 야구부에 합류해서 동계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촌놈' 별명 얻은 후 인기 더 높아져
경북고 에이스 남우식과 함께 초고교급 투수로 인정받던 김봉연은 1973년 봄 연세대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그는 시즌이 시작되자 투타에서 신기에 가까운 기량을 보여준다. 그해 5월 개최된 전국 대학야구연맹전 춘계리그에서 '영원한 맞수'라는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이룬다. 투구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자신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조차 몰랐단다.
"당시 배수찬 감독님이었는데요. 7회인가 8회인가 던지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데 배 감독님이 '기록을 너무 의식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했죠. 해서 여쭤보니 '모르면 됐어, 지금까지 던진 것처럼 편하게 던져라.' 그러시더군요. 그때야 대기록 달성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알고 편하게 던졌죠. 그야말로 '공심(空心)'으로요. 그렇게 9회가 끝나자 경기장이 함성으로 가득하고, 기자들이 몰려오는데 정신이 없더군요.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었죠. 제가 1학년 신입생 투수이고, 연고전 역사상 첫 기록이어서 더했던 것 같습니다. '촌놈'이란 별명도 <연세춘추>라는 학교신문에 기사가 실리면서 얻었죠.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잘생긴 얼굴은 놔두고,(웃음) 새집처럼 엉망이 된 머리와 염색한 작업복, 편하게 신고 다니던 고무신 등이 찍힌 사진만 보여주면서 '군산 촌놈'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축제 때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갔는데···.(웃음) '고려대로 가야 할 김봉연이 연세대에 와서 물을 흐리고 있다'는 말도 그 후 유행됐죠."
'촌놈'이란 별명이 널리 퍼질수록 김봉연의 인기는 상승했다. 그는 일찍이 국가대표 후보로 선발되는데, 연습이 끝나면 찾았던 도서실 앞에도, 강의실 앞에도 어떻게 생긴 '촌놈'인지 확인하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화여대 후문 앞에 있었던 연세대 야구부 기숙사 앞에도 여성 팬들이 모여들었다니, 그를 '원조 야구스타'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
홈런왕 타이틀 가장 많이 차지한 선수
야구의 꽃이자 백미인 홈런. 김봉연은 1973년 가을 또 하나의 대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한다. 그해 대학 추계리그연맹전 동아대와 경기에서 대학야구 사상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한 것. 이어 1974년 대학야구 추계리그 홈런왕, 197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홈런왕, 한국화장품 소속 3년(79~81) 연속 홈런왕에 올랐다. 프로야구 원년(1982)을 합하면 4년 연속 홈런왕에 등극한 셈이다.
육군야구단 시절인 1975년 백호기쟁탈 전국야구대회에서 한전과 건국대를 상대로 3이닝 연속 대형 아치를 그리면서 대망의 두 번째 3연타석 홈런을 달성한다. 홈런왕에 타점왕까지 차지, 거포의 진면목을 보여줬던 그의 3연타석 홈런은 그해 5월 20일 한전과의 경기에서 9회를 홈런으로 장식한다. 21일 건국대와 경기에서 1회 말 최한익과 랑데부 홈런, 3회 말 솔로 홈런을 쏘아 올려 팀 승리(4-2)에도 이바지한다.
1977년 11월 니카라과 마나과 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회 슈퍼월드컵(대륙간컵) 야구대회 결승전(한국-미국)에서도 2-3으로 리드 당하던 6회 초 동점 솔로 홈런으로 우승의 불씨를 당긴다. 결과는 5-4 한국의 역전승. 이는 한국 야구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쾌거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1978년 7월 개최된 한미 대학야구 대회에서도 3게임 연속 장쾌한 홈런을 날려 홈런상(4개)과 타점상(9점)을 거머쥔다.
한국 야구의 세계무대 진출은 1975년 9월 몬트리올 대륙간컵 쟁탈 야구대회가 처음이었다. 8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3승 4패로 공동 4위에 머물렀다. 11개 팀이 참가했던 1976년 11월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5승 5패로 공동 5위. 그리고 1977년 대륙간컵 대회에서 세계 정상을 정복한 것이다. 당시 야구전문가들은 김응룡 감독의 박력 있는 작전을 치하했고, 김봉연은 유달리 국제경기에 강한 선수로 평가했다.
한국화장품 소속이던 1981년 9월 실업야구 후기 리그 한전과의 경기에서 7·8·9회 연속 3점짜리 홈런을 작렬, 3번째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작성한다. 아마추어 야구에 6개밖에 없던 3연타석 홈런 중 절반을 차지한 것. 그중 3연타석 연속 3점 홈런은 최초이며, 한 게임 13루타 10타점 역시 희귀한 기록으로 아마와 프로 합해 '홈런왕' 타이틀을 가장 많이 차지한 선수로 자리를 굳힌다.
홈런왕 타이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김봉연은 대학과 실업팀(73~81)을 거치면서 계속 태극마크를 달았다. 또한, 73년 '노히트노런'을 시작으로 만루 홈런, 연타석 홈런, 3연타석 홈런 등 홈런의 대명사가 되면서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긋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는다. 그렇다고 그가 투타에만 능한 선수는 아니었다. 1977년 9월 개최된 제32회 전국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학창시절 달리기 실력을 발휘, 도루왕(5개)을 차지한다. 그렇듯 그는 못 하는 게 없는 만능 '슈퍼스타'였다.
일본 야구의 영향으로 다운스윙이 교과서로 통하던 시절, 그는 호쾌한 어퍼스윙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타격의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홈런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주변 눈치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지니고 있던 타격의 이단아, 그는 프로통산 홈런 110개(7시즌)로 이만수 선수의 252개(16시즌)에 비해 극히 적음에도 홈런왕 소리를 듣는 이유에 대해 홈런의 가치와 느낌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팀이 리드하고 있을 때 홈런과 동점이나 한 점 차이로 경기가 지루해지면서 팬들이 목마르게 기다릴 때 터지는 홈런과는 가치와 느낌이 다르다고 봅니다. 극적인 역전 홈런은 더하겠죠. 문득 떠오르는 홈런이 있는데요. 83년 한국시리즈 3차전(해태-MBC) 3회 말 노아웃 주자 1, 3루 상황에서 막 교체된 하기룡 투수의 초구를 빠~앙! 받아쳤을 때입니다. 날아간 공은 잠실구장 레프트 펜스 중간에 꽂히고, 관중은 모두 일어나 환호하고···.정말 통쾌했죠.
홈런과 뜬공 차이는 힘이 아니라 시간차, 즉 타이밍입니다. 힘이 좋은 선수라고 해서 모두 홈런을 날리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어떻게 스윙을 하면 홈런이 되고 땅볼이 되는지 끊임없는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감각을 익히고, 숙달되면 자기 자신만의 스윙법이 나오게 되죠. 군산상고 시절부터 '왜 그럴까?'를 되뇌면서 고민을 했는데요. 결과적으로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홈런왕 타이틀도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봐야겠죠."
역사적인 개막전, 무등산 호랑이들 호된 신고식 치러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70년대를 풍미했던 만능 슈퍼스타 김봉연. 그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현 KIA)에 입단한다. 당시 나이 서른한 살. 선수로는 적잖은 나이였다. 본인도 아마시절 거의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고 트로피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미련은 없었지만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겠다고 생각되어 프로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국가대표가 꿈이었는데.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 야구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도 했고, 대회가 끝나면 개인 트로피를 4~5개씩 받기도 하는 등 할 것은 다 해봐서 더는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81년 중반부터 프로야구 얘기가 슬슬 들려오는 거예요. 나이 때문에 부담은 됐지만 2~3년은 가능할 것 같아 술을 절제하고 체중도 감량하는 등 몸 관리와 훈련을 병행하면서 개막전에 대비했죠."
해태 타이거즈 초대 주장 김봉연(2대 김준환, 3대 김일권 이후 폐지됨)은 1982년 1월 30일 창단식에서 선수 15명을 대표해 선서한다. 2월 1일부터는 시즌 오픈에 대비 광주, 전주, 군산, 이리, 여수 등을 순회하며 훈련에 돌입한다. 3월 28일에는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롯데와 역사적인 개막전을 가진다. 결과는 2-14로 롯데의 완승. 해태는 기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무등산 호랑이들이 부산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른 것이다.
김봉연은 설상가상으로 4월 8일 부산 게임(해태-롯데)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다. 발목에 깁스하고 몇 게임 결장하는 사이 백인천, 김우열, 이만수, 김성한 등은 계속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붕대로 칭칭 감은 다리를 만지면서 구경만 해야 했던 당시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그래도 하루에 수백 통씩 전달되는 팬들의 격려 편지가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마수걸이 홈런조차 신고를 못하고 와신상담,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4월 14일 경기(해태-삼미) 9회 초 공격 때 주장 권한으로 대타를 자청한 것. 그는 인호봉 투수를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장식한다. 해태가 9-2로 앞선 상황일 때 터져 빛은 나지 않았으나 다리를 절면서 힘겹게 홈인하는 모습에 감동한 관중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그 홈런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핀치히터(대타) 홈런이기도 하다.
발목에 깁스하고도 근성을 보여줬던 김봉연은 그해 22개 홈런을 작열시키며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에 오른다. 79~81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던 그는 아마추어와 프로시대를 관통하는 홈런타자가 된다. 그의 홈런왕 타이틀은 박철순과 백인천 두 해외파가 투수부문 3관왕과 타격왕을 독점한 가운데 국내파 선수들 체면을 세워줘 더욱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1983 한국시리즈 우승, 라면으로 자축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10월 2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코리안시리즈(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MBC 청룡을 8-1(4승 1무)로 누르고 낙승, 한국 프로야구 2대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V10에 빛나는 '해태 왕조'가 시작된 것. MVP는 야구기자단 투표에서 5게임을 통해 19타수 9안타(4할 7푼 4리) 8타점을 올리면서 맹활약한 김봉연이 차지한다. 그럼에도 그는 기쁨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고 단골 구멍가게를 찾아간다.
"동료들은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칵테일파티를 벌이는데, 저는 호텔 뒷골목 단골 구멍가게로 갔습니다. 조용히 혼자 자축하기 위해서였죠. 주인아저씨에게 라면 하나 끓여달라고 했더니 달걀까지 풀어주면서 '오늘 대한민국에서 최고 멋진 남자가 됐는데 왜 이러느냐'며 의아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몸과 마음은 지금 하늘만큼 행복하고, 라면 국물이 맥주보다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해(1983) 전기 리그를 우승으로 마감하고 6월 28일 전남 여수로 가족여행을 떠났다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술 담배를 못할 때였거든요. 의식을 3일 만에 찾았고, 얼굴과 머리 부위를 314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죠. 그 와중에도 30일 만에 그라운드에 복귀, 홈런을 날리고,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도 됐는데요.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오늘의 모든 영광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뜬 친구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해서 지역 팬들의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었죠."
자신의 은퇴 소식, 연습장에서 신문 보고 알아
김봉연은 가장 불행했던 시절을 '탈모왕' 별명을 얻었을 때라고 회고한다. 홈런에 욕심이 앞서다 보니 스윙 폭이 커졌고, 헛스윙 때마다 헬멧이 자꾸 벗겨졌단다. 그때 깨달은 게 '공심타법', 그는 마음을 비우는 타법으로 1986년 타격 3관왕(홈런왕, 타점왕, 장타율)을 차지하면서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제 몫을 다한다. 그럼에도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정든 그라운드를 떠난다.
그는 1988년 10월 2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6차전(해태-빙그레)에서 3-0으로 이기고 있던 8회 초 승부에 쐐기를 박는 2루타로 1점을 보태면서 해태의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한다. 그럼에도 "이듬해(1989) 연습하러 나갔다가 신문을 보고 자신의 은퇴 소식을 알았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빙그레와 6차전이 마지막 경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은퇴 후 2001년까지 해태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했던 김봉연. 지금은 극동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6년 전부터는 충북 음성에 복숭아밭을 사들여 아내와 채소도 가꾸는 등 농사에 푹 빠져들었다. 야구장에서는 체력의 200%를 발휘했는데, 밭에서는 20%도 어렵다며 허허롭게 웃는 왕년의 홈런왕. 그가 건네준 명함(ID 'homerun')에서 홈런왕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 멘트에서도 야구에 대한 애착이 진하게 묻어났다.
"프로팀 감독요? 기아(KIA)든 삼성이든 불러만 준다면 당장 교수직 그만두고 가야죠!"
덧붙이는 글 | 자료출처: 동아일보, 경향신문,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