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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발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아요!"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1.10.01 13:46:1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넉넉한 미소와 맑은 눈망울이 매력인 이종예(61세) 문화관광해설사. 그는 2009년 12월 28일 군산시청 주민생활지원국장(서기관)을 끝으로 40년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군산 홍보맨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공무원의 꽃으로 불리는 서기관 출신으로 군산시가 모집하는 문화관광해설사에 당당히 합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탯줄이 묻힌 도시 군산의 문화발전과 홍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시했는데 합격했던 것. “퇴직하면 아내와 여행도 다니고 글도 쓰면서 나만의 시간에 투자하려고 계획했어요. 그런데 더 바빠졌습니다. 고위 관리직을 지낸 사람이 문화관광해설사를 한다고 조소하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공직생활의 연장으로 생각합니다. 외지인들에게 군산의 역사와 미래를 설명하면서 사명감과 성취감을 함께 느끼거든요.” 이종예 해설사는 1970년 5월 1일 옥구군 회현면사무소 서기(농업직 9급)로 공직 생활을 시작, 탁월한 업무능력과 적극적인 행정으로 관광산업 인프라 확충 및 사회복지 안전망 구축, 깨끗한 도시환경 조성에 이바지하며 군산 발전을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명예퇴직을 앞두고 첫 시집 <서해 낙조에 핀 어화>를 발간한 ‘시인 해설사’이기도 하다. 고은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그대는 어느 마을인들 어느 길목인들 남남이 아니게 익숙해서 그런 긴 일상들이 마침내 그대의 시적 염원을 불러일으킨 것이오.”라며 순수한 시심(詩心)을 격려했다. 2009년에 쓴 ‘선유 8경’은 ‘천 년의 비상 갈매기의 꿈’으로, 2010년 작(作) ‘가야금 줄에 실어본 월명공원 8경’은 ‘월명산의 사계’라는 주제의 창작무용으로 만들어져 그해 12월 군산시민회관에서 공연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해설사는 “무용협회 군산지부 김정숙 지부장에 의해 처음 공연하는 모습을 무대 뒤편에서 울고 싶은 심정으로 가슴 조이며 지켜봤다”면서 “보잘 것 없는 시 한 편이 멋진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이종예 해설사는 한국전쟁(1950년)이 일어나던 해에 부잣집 큰딸과 문벌 좋은 가난한 집 막내아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젖먹이에서 막 벗어날 무렵(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징용으로 끌려갔던 아버지마저 원폭피해 후유증으로 돌아가시자 8남매나 되는 큰어머니 댁에 얹혀살게 된다.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학비에 보태주며, “세 살 버릇이 건강해야 미래가 보이는 법이니까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당부했던 큰어머니.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그 큰어머니가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는 눈망울 주변에 물기가 맺히기도 했다.  이 해설사는 “매일 새로운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주었던 큰어머니 사랑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며 “손자들도 무척 귀여워하셨는데 가을이면 마당에 떨어지는 감들을 주워 모아 손수 우려내 손자들에게 먹이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어요.”라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에 사촌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학교에 다니고, 인쇄소 직원을 거쳐 공무원 시험에 합격, 시청 국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인생항로가 파란만장했을 거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궁금하게 생각되는 점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맥군_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형편이 어려웠을 텐데 학교는 어떻게 다녔는지요? 

큰어머니 손을 잡고 개정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중학교는 시내로 진학을 못하고 대야면에 있는 옥구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렀고 입학이 가능한 커트라인이 있을 때였으니까요.

 

맥군_사촌이 8남매나 되어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은데요? 

소년 시절은 말도 못하게 고달팠어요. 그러나 그렇게 불행한 시절이 심약했던 저를 의지의 사나이로 만든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남들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가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고 할까요. 그래도 큰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 도움이 없었으면 어림없는 일이지요.

 

맥군_혹시 수험료 때문에 급우들 앞에서 창피당한 경험이 있는지요? 

회비를 몇 달 밀릴 때가 있기는 했어도 창피당한 일은 없었어요. 큰어머니가 머리를 잘라 팔아서 학비를 대주어 중학교는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지요.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옥구 농고에 입학시켜주셔서 왕복 16km 되는 거리를 1년은 외가에서 2년은 큰집에서 다니면서 졸업했습니다.

 

맥군_사춘기를 거치면서 공부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을 텐데요?

저는 어릴 때부터 길을 가도 책을 들고 다니고, 소몰이를 갈 때도 책을 들고 나가는 게 습관이 됐어요. 대학도 쉰 살이 되던 1999년에 젊은이들 틈에 끼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면서 한국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장을 따냈습니다. 그때 일을 얘기하려니까 참 아득하네요.

 

이 해설사는 “학창시절에 취미로 써놓은 글들과 공무원 시절 업무 노트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며 “기회가 있으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 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며 소박한 꿈도 밝혔다. “요즘엔 발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아요!” 이종예 해설사는 명예퇴직과 함께 기아대책군산지역 후원이사회 회장직을 맡았고, 2010년 3월에는 구 군산세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 올봄부터는 군산시 신흥동 ‘히로쓰 가옥’(국가 등록문화재 제183호)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공직 생활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군산 홍보와 불우이웃돕기에 쏟아붓는 이 해설사의 애향심과 봉사정신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 그래서 그의 주변을 들여다보면 군산이 보이고, 군산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 해설사는 군산을 찾는 방문객 안내하랴, 세계 식량의 날(10월 16일)을 맞아 오는 10월 15일(토) 열리는 2011 기아대책 식량지원 캠페인 ‘스톱헝거(STOP HUNGER)’ 행사 준비하랴 오늘도 정신없이 바쁘다. 그는 “요즘엔 발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아요!”라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식량지원 캠페인은 지금도 5초에 1명, 하루에 1만 8000명의 어린이가 빈곤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탄자니아, 짐바브웨, 에콰도르, 파키스탄 등 여섯 개 기아국가에 전달할 사랑의 식량 KIT 만들기, 사랑의 편지(현수막) 작성하기 등의 후원행사라고.  국내 도시 중 일제수탈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군산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21세기 새만금의 미래와 가슴 아팠던 근대사를 설명하면서 사명감과 성취감을 함께 느낀다는 이종예 문화관광해설사. 그의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활동에서 밝고 힘찬 군산의 내일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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