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피 솟은 볼, 날아갑니다, 날아갑니다. 아~ 넘어갔습니다. 홈런입니다!”
“김봉연 선수 대단해요! 힘이 장사예요···.”
1986년 여름 어느 날 프로야구 경기장, 해태 타이거즈 김봉연 선수가 휘두른 배트 위쪽에 맞고 하늘로 솟은 공이 외야수 앞에 떨어지지 않고 긴 포물선을 그으며 외야 펜스를 넘어가자 아나운서와 하일성 해설위원이 주고받은 대화의 한 토막이다. 당시 하 해설위원은 김봉연 선수가 헛스윙을 하고 헬멧이 벗겨지면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했다. 배트를 얼마나 세게 휘둘렀으면 550g이나 되는 헬멧이 벗겨지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70~80년대 김봉연은 힘이 장사였다. 촌놈, 탈모왕 등 그의 별명에서도 느껴진다. 불고기 10~12인분을 한자리에서 먹어치우는 대식가인 그는 천부적으로 타격 소질까지 타고나 대학과 실업야구 시절 다양한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쥔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자 적진에 뛰어든 장수가 명검 휘두르듯 배트를 휘두르며 원년 홈런왕에 오른다. 원심력을 이용한 그의 스윙에는 볼이 정확히 맞지 않아도 수비 거리가 엄청나 외야수들이 애를 먹었으며, 배트 중심에 맞으면 거의 펜스를 넘어간다는 게 당시 야구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를 거쳐 해태 유니폼을 벗는 1988년까지 부동의 4번 타자였던 한국 야구의 진정한 레전드. 방망이 하나로 숨 막히는 긴장과 희열,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그의 기록은 ‘홈런왕’으로 끝나지 않는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 중 최초로 대학 전임교수가 돼서다. 2001년 정들었던 야구계를 은퇴하고 충북 음성군 극동대 겸임교수로 시작, 현재 같은 대학 사회체육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김봉연 교수(아래 김봉연)를 만났다.
짜장면 자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야구
김봉연(62)은 전북 전주시 전동에서 11남매(7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다섯, 아래로 다섯, 형제가 많다 보니 끼니때 누가 밥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추운 겨울에 누가 양말을 신고 나갔는지 맨발로 나갔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단다. 아버지 사업을 돕는 일꾼까지 합하면 항상 15명 안팎의 대식구. 그래도 안방, 건넌방, 사랑방 합해서 방이 여섯 개나 되는 집에서 복날이면 형제들 앞으로 삼계탕이 한 그릇씩 나란히 놓일 정도로 살림은 풍족했다.
“저는 10살이 돼서야 전주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두 살 위인 형이 야구를 했는데요. 기다렸다가 연습이 끝나면 함께 집으로 오곤 했죠. 3학년 가을로 기억하는데, 하루는 교무실에 들어간 형이 안 나오기에 창문으로 봤더니 야구부 형들이랑 ‘짜장면’을 먹고 있는 거예요. 순간 나도 야구를 하면 맛있는 짜장면을 자주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날부터 연습장에 나가 공이 올 때마다 코치 선생님에게 던졌습니다. 저를 알아달라는 신호였는데, 다행히 테스트를 시켜보더니 받아주더군요.
4학년 때부터 투수로 활약했는데요. 연습 때마다 ‘옥수수빵’이 간식으로 나왔습니다. 짜장면은 경기가 끝나면 사줬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 자장면 맛의 매력에 빠져 야구에 흠뻑 빠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부잣집 아이들도 맘대로 짜장면을 사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 받은 등번호 27번을 프로야구 때까지 고수했고, 1988년 은퇴하는 날까지 4번 타자만 했으니 짜장면과 보통 인연이 아니지요.”
3연타석 홈런, 초등학교 5학년 때 첫 기록 세워
짜장면을 마음껏 먹고 싶어 시작한 야구. 그래서 그런지 김봉연 학생에게 야구는 레크레이션, 다양한 특별활동(클럽활동) 종목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야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나 버스를 타면 우승을 하겠다는 다짐에 앞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짜장면, 갈비탕 등을 먹는 게 더 좋았다. 그럼에도 경기가 시작되면 호투를 했고, 그라운드를 누비며 상대팀을 제압했다. 홈런도 심심찮게 쳐냈다.
“5학년 때 개최된 전북 초등학교 야구대회에 전주시 대표로 선발돼서 3연타석 홈런 기록을 처음으로 세웠죠. 덕진 야구장에서 열린 대회였는데요. 외야 펜스가 없던 시절에, 타자가 1,2,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그라운드 홈런’(장내 홈런)이라고 했죠. 영어로는 ‘인사이드 더 파크홈런’(inside the park homerun)이라고 하지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주시 대표로 함께 뛰었던 김준환 현 원광대 감독은 인정합니다. (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알파벳과 ‘태정태세문단세··.’를 줄줄이 외웠던 김봉연은 전북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았던 ‘전주북중’에 진학한다. 중학교 때는 축구, 핸드볼, 육상, 투포환 등 달리고, 뛰고, 던지는 시합이 열릴 때마다 선수로 뽑혀 출전했다. 모든 종목에 뛰어나다 보니 농구장에 가면 ‘너는 야구선수 아니냐’, 야구장에 가면 ‘너는 농구선수잖아’라며 동료들이 놀려댔다. 그래도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았다. 야구보다 공부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졸업 앞두고 전국에서 스카우트 제의 들어와
영어교사였던 큰형의 권유로 참고서 <삼위일체>를 달달 외우며 영어 공부에 푹 빠져 있던 2학년 말쯤 전주북중 야구부가 해체된다. 이유는 선수들이 연습하느라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때 마침 야구를 계속 하겠다고 서울로 올라간 작은 형도 그만 두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주변이 어수선하게 돌아갈 즈음 큰형을 통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어느 날 형님이 군산남중에서 등록금 면제, 기숙사 제공 등을 제시했다며 묻는 거예요. 11남매가 북적이는 집을 벗어날 최고의 기회여서 망설일 것 없이 ‘예, 갈게요!’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무명 선수였고, 군산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죠. 그런데 아버지는 ‘공부하는 놈이 무슨 야구냐!’며 반대하시더군요. 그래도 형님 도움으로 이듬해 3월 군산남중으로 전학했습니다.”
아래는 1970년을 전후해 군산남중 영어교사로 재직했던 이진원(82) 군산 문화원장의 회고.
“3학년 때(1969) 전학을 왔는데, 촌놈처럼 덩치만 커가지고 엄벙하게 생겼더라구. 가난한 농가 아들처럼 말이야. 내가 영어를 가르쳤는데 착하고 공부도 잘했지, 의리도 있었어. 졸업 후 잊고 지냈는데, 1982년 해태에 입단하고 그해 연말 송년 인사가 적힌 엽서를 보냈더라구. ‘살다보니 별놈 다 있네!’ 하고는 한쪽에 치워놓았지. 그런데 여중 3학년이던 딸내미는 ‘홈런왕 김봉연이 보내준 엽서다’며 자랑하고 다녔더라구···.(웃음)”
이 원장은 “김봉연이 스스로 찾아와 야구를 하겠다며 받아달라고 사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전주지역 체육계 소식 정보통인 전주북중 출신 체육교사(홍성면)가 스카우트해서 군산으로 오게 된 것”이라며 “전주 중앙초등학교 선수 시절부터 눈여겨봤던 홍성면 선생은 김봉연이 대형 선수로 성장할 것을 예측했었다”고 부연했다.
전북지역, 그것도 몇몇 체육인에게만 실력을 인정받았던 김봉연, 군산남중 졸업을 앞두고는 선린상고, 대구상고, 경북고 등 전국 각지 우수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군산상고(야구부 3기)를 선택한다.
예산 아끼기 위해 최소 인원만 시합에 나가
김봉연이 군산상고에 입학하던 1970년, 식욕이 왕성한 시기의 선수들에게 최대의 적은 ‘배고픔’이었다. 그해 운동장 확장공사를 했는데 공사비가 부족해 선수들이 나서야 했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점심은 국수로 때웠다. 쌀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김봉연은 “당시 선수들은 항상 허기진 몸으로 연습에 임했고, 이용일 야구부 후원회장(당시 경성고무 사장)의 학교 방문을 손꼽아 기다렸다”며 고달팠던 시절을 떠올렸다.
“(이용일) 회장님이 오시면 선수들에게 곰탕으로 포식을 시켜주셨죠.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그때를 얘기하려니까 침이 넘어가네요. 전국대회 본선에 진출하면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예산을 아끼기 위해 최소 인원만 시합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함께 고생한 동료 몇몇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이 회장님의 지원과 재학생, 시민들의 따뜻한 격려가 있었기에 선수들이 배고픔을 이겨내고, 집념과 투지로 뭉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봉연을 안타깝게 했던 것은 야구선수들의 수업 불참을 당연시하는 풍토였다. 그러한 분위기는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려는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전주북중 야구팀 시절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선생님들 다그침과 ‘야구를 해도 책을 가까이 하라’는 큰형의 권언이 생각나 영어와 부기 수업을 받으려고 교실에 앉아 있으면 선생님들이 의아해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부터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며 낮에는 훈련을, 밤에는 타격연습과 독서를 열심히 했다.
“아, 야구는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군산상고는 야구 전문가들의 눈길을 끌면서 해가 다르게 성장했다. 전북 지역 유일한 팀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전주상고를 누르고 전북 대표권을 차지한다. 전국 대회에서도 강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해주었다. 일본 갑자원(甲子園)대회 우승팀(相模) 초청 고교야구 선발전(70년 8월)에서 동대문상고를 6대1로 격파하고 준결승에 오른 것. 이날 완투승을 기록한 김봉연은 최관수 감독을 만난 이후 야구에 눈을 뜨게 된다.
“최관수 감독님은 인천 동산고 시절 당대 최고봉으로 빠른 직구와 예리한 커브, 타자 앞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드롭(Drop)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명투수로 평판이 자자했다 합니다. 3학년 때 ‘이영민 타격상’을 받아 야구 천재로 소문이 났고, 기업은행 에이스였던 분이어서 투타에 위력이 대단했죠. 감독님의 투구와 타격 시범 때마다 ‘아, 야구는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놀라면서 몸과 머리로 익혔습니다.”
최 감독의 타격 폼은 초보 선수인 김봉연에게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그대로 따라 하면 5할대 타율도 가능할 것 같았다. 방법은 거울 앞에서 어깨가 아프도록 흉내 내는 것. 노력은 헛되지 않아 얼마 후에는 최 감독의 위력적인 투구를 자유자재로 쳐낼 정도의 수준에 오른다. 실력이 괘도에 오르면서 4번 타자 자리도 확보한다. 야구의 진정한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왼쪽 어깨가 약간 처진 것도 그때 후유증이란다.
투타에 기량이 뛰어난 선수로 성장한 김봉연은, 무명에 불과했던 군산상고가 대한민국 고교야구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정상을 차지하는데 주역이 된다. 유난히 무더웠던 1972년 7월 19일 오후 7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6회 황금사자기 부산고와의 결승 9회말 역전 우승이었다. 그해 10월에는 전국 우수고교초청 군산상고-배명고 경기에서 장쾌한 아치를 그리는 두 개의 홈런을 작렬, 미래 ‘홈런왕’을 예고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