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군산의 대부분 조선인 남성은 일본인 소유 사업체나 부두에서 노동자로, 조선인 여성은 일본인 가정 식모살이나 정미소 선미공(米選工) 등 단순 노동자로 일했다. 조선인들의 경제 활동과 그에 따른 수입(收入)으로 인해, 조선인들은 그들의 생활공간 강호정에 자리한 군산좌에서 근대문물 ‘활동사진’을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 노무직에 종사한 조선인들이 극장에서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은 무척이나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낮게 책정된 군산좌 조선인 대상 영화 입장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1928년 경성(京城)의 흥행사 임수호가 지방 순업(巡業)을 하면서 군산좌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한 일이 있었다. 이때 일반인 입장료는 40전이었고, 조선일보 구독자는 할인 혜택을 받아 20전이었다. 이들 입장료는 1920년대 후반 전북 평균 관람료 55전(소인 30전)보다 15전이나 낮은 금액이었다. 게다가 1927년 기준 현재 전북 지역 활동사진 최고 관람료 대인 1원(소인 50전)과 최저 관람료 대인 20전(소인 10전)을 고려하면, 군산좌 조선인 관람료가 얼마나 낮았는가를 알 수 있다. 군산좌 조선인 관객의 입장료는 그만큼 조선인의 경제적 빈곤을 반증하였다.
군산좌 입장료는 희소관의 그것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1928년 희소관에서 열린 소년소녀 음악가극대회(音樂歌劇大會) 입장료는 특별권 1원, 보통권 50전, 그리고 학생권 30전이었다. 전문성을 결여한 집단의 노래극 특별 입장료가 군산좌 일반 영화관객의 입장료의 두 배를 넘어선 것이다. 군산좌와 희소관 입장료 차이는 영화관 등급 차이에서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군산좌는 비상설관이었으며 건물 노쇠를 이유로 위생 상태를 자주 지적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떻든, 군산좌의 낮은 입장료는 군산좌를 들락거린 조선인 관객의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군산좌의 위생 문제는 단순히 극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군산은 한일병합 이전 근대 도시 체계를 갖췄지만, 생활하수 처리 공사는 1923년에 와서야 착수되었다. 게다가 1929년 봄 전북 도내에 유행성 감기가 돌면서 2만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500여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산은 환자 59명과 사망자 3명에 그쳤지만, 군산 인근 농업 미작지대 옥구(沃溝) 지역은 환자 760명과 사망자 32명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다. 군산과 옥구 지역 유행성 감기로 인한 사망자 발생은 지역 유지(有志)들이 ‘생활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근우회(槿友會)를 창립할 정도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건물 노후(老朽) 때문에 신축을 요청받던 군산좌는 유행성 감기로 인해 위생 문제를 더욱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극장 ‘오염’으로 ‘시민의 비난’을 받은 군산좌는 1926년 군산부 도심 일본인 거리 명치정(明治町)에서 신축할 목적으로 5만원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군산좌는 1930년 도심이 아닌 조선인 거주지 초입 개복동에서 군산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였다. 군산좌가 군산극장이 되었지만, 극장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군산극장이 조선인 빈민층 토막민 거주지와 색주가(色酒家)를 배후로 두었기 때문이었다.
개복동에 야마테마치(山手町) 유곽이 자리하였고, 조선인 기생집과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 형태의 은근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군산의 유곽 발달과 집창촌(集娼村) 형성은 부두 노동 종사 남성 비율이 높은 지역적 특성에서 기인하였다. 군산극장이 자리한 장소적 특징은 극장을 여전히 불온(不穩)의 잠재 공간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군산극장은 오락 공간이자 식민지 질서 아래 조선인 계몽 공간이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글쓴이 위경혜는 <호남의 극장문화사> 저자이다.
1965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유치원 시절부터
전남 강진에서 살았고, 전남대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서른이 되는 해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 과정을 수학했다.
현재 전남대 강사로, 광주에 극장박물관이나 영상 아카이브(Archive)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