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와 부산 그리고 목포에 뒤이어 1899년 개항한 군산은 금만평야가 쏟아내는 막대한 곡식을 일본으로 반출(搬出)하기 위해 근대 도시로 성장하였다. 금만평야는 동진강 하류에 형성된 김제평야와 김제, 군산, 익산 그리고 완주에 걸친 만경강(萬頃江) 하류에 형성된 만경평야를 아우른다. 군산은 러일전쟁이후 미곡 집산과 수출을 담당하는 항구 기능을 강화하였고, 1907년 내륙 곡창지대와 신속하게 연결하기 위해 군산과 전주 간(間) 전군가도(全群街道)를 개설하였다. 또한 1907년 해벽 및 부두 1기를 축성하여 항만과 정비 등 부두 시설을 갖췄으며, 1912년에 이르러 강경-이리 구간과 군산역을 포함한 호남선을 개통하였다. 이로써 군산은 해로와 육로를 통해 여타 도시들과 빠르게 연결되었다.
항구도시 교통 발달은 사람들을 군산으로 불러들였다. 개항 당시 77명에 불과한 일본인은 1903년 1,255명으로 14배나 증가했고, 511명이었던 조선인은 5년 사이에 1,811명으로 무려 254배나 늘어났다. 조선인 증가는 말 그대로 놀라울 정도였으며 일본인을 압도했다. 하지만 조선인의 생활은 형편없었다. 군산은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였기 때문이다. 1914년에 이르러 일본인과 조선인 인구수 차이는 현격하게 줄어들어들면서 군산은 단연코 일본인의 도시가 되었다.
개항과 함께 군산에 형성된 각국 조계(租界)는 대부분 일본인이 점유했다. 조계가 형성되면서 조선인은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쫓겨나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조선인이 살던 지역을 외국인에게 내준 경우는 부산과 인천, 마산 등 여타 개항도시에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살던 곳을 잃어버린 조선인들은 조계에 인접한 전주가도변(全州街道邊)에 집중적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조계지 일본과 인근의 조선인 거주라는 종족(種族, ethnic)간 이중적인 도시가 형성되었다.
일본인들은 격자(格子) 형식으로 만들어진 서북부 지역에, 조선인들은 협소한 도로와 주택이 불규칙적으로 형성된 동남부 지역에 살았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외국인 거주지 제한이 폐지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인 거주지로 더욱 침입하였다. 조선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밀려나 죽성동과 개복동 그리고 구복동과 둔율동 등 변두리 구릉(丘陵)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그곳에서 토막(土幕)을 짓고 생활하였다.
일본인 이주(移住)와 함께 군산 도심은 우편국, 병원, 은행, 경찰서, 언론사, 학교 등 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었다. 1914년에 이르러 군산은 6개의 여관과 5개의 요리점 그리고 군산공원(群山公園)까지 만들었다. 군산의 근대도시 기반 시설 가운데 극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군산에서 처음으로 영업을 시작한 극장은 명치좌와 군산좌이다. 명치좌와 군산좌 개관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다만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발행한 『호남선』을 통해 1906년에서 1914년 사이에 개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치좌는 도심 명치통에 자리한 것으로 확인될 뿐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이에 따라, 강호정(현 죽성동)에서 문을 연 군산좌가 지역 극장의 시조(始祖)로 평가된다. 군산좌는 단층(單層) 목조 건물로서 군산을 포함한 전북 최초의 옥내 공연장이었다. 군산좌는 이후 개복동에서 개관한 희소관(喜笑舘)과 함께 일제강점기 지역 극장을 대표하였다. 명치좌와 군산좌 그리고 희소관 모두 일본인이 관주(館主)였다. 1926년 현재 군산좌 주인은 도전(島田) 씨였고, 군산좌가 군산극장으로 개명하고 영업을 하다가 1932년 '조선상설관'으로 전환할 때, 군산극장을 인수한 자 역시 일본인 송미인평(松尾仁平)이었다.
글쓴이 위경혜는 <호남의 극장문화사> 저자이다.
1965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유치원 시절부터 전남 강진에서 살았고,
전남대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서른이 되는 해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 과정을 수학했다.
현재 전남대 강사로, 광주에 극장박물관이나 영상 아카이브(Archive)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