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10년이 넘도록 무관에 그치다가 제41회 봉황대기 전국 고교야구(9월)에 이어 제94회 전국체전(10)도 우승, 2013년 시즌 2관왕을 차지한 것. 후배들의 대견스러운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봤을 김성한(56)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대전 한밭종합운동장에서 만났다.
"김성한(현 한화 수석코치)은 1978년 군산상고 졸업생(야구부 8기) 중 '군계일학'이었지. 이곳저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데, 배성서(동국대) 감독이 가장 욕심을 내더라구. 내가 '동기생 다섯 명도 함께 데려가라'고 했지. 그랬더니 입장이 난처하다며 총장을 만나보라는 거야. 그 해 동국대 총장이 영남대에서 옮겨온 이선근 박사였거든. 나하고 인연이 깊은 사이였지. 그래서 찾아가 '숨어 있는 준재들이니 동국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요청했더니 흔쾌히 받아주더군."
이용일(83) 전 KBO 총재권한 대행의 회고다. 이용일 대행은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설하고, 서울상대 야구부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온 야구인들을 찾아다니며 선수들의 진학과 취업에 온 힘을 기울여왔다. 그는 "그해부터 동국대와 군산상고 사이에 각별한 인연이 싹트게 됐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김성한(56) 수석코치의 이야기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은행을 최종 목표로 서울의 명문대에 가려고 죽어라 고생했는데, 영남대(감독 배성서)로 가라는 거예요. 서울에서 연·고대 배지 달고 여학생들과 미팅도 하고, 연애도 하고, 머리를 박박 깎은 시골 촌놈이지만 왜 그런 꿈이 없었겠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가겠다고 버티면서 술 마시고 행패 부리다가 개복동 파출소에 끌려가 몽창 뚜드려 맞기도 했죠. (웃음) 그때 마침 배성서 감독이 동국대 감독으로 옮기는 바람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리궁둥이 타법', 배성서 감독에게 전수받아
김성한과 함께 동국대에 진학한 군산상고 출신 선수는 송승호, 박전섭, 김형종, 최병춘, 김승래 등이다. 이들은 1학년 때부터 '역전의 명수' 저력을 보여준다. 하위권을 맴돌던 동국대가 1978년 대학야구 봄철 연맹전에서 신입생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일약 6강의 결승리그에 오른 것. 그러자 배성서 감독은 1, 2학년 선수들(군산상고 출신 6명 포함)을 주전으로 기용하고,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투지의 팀워크를 구축, '80년대 동국대 전성기' 기틀을 다진다.
1981년 7월, 전국으로 생중계된 제2회 한·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스타는 김성한(타격상), 윤학길(다승), 박종훈(홈런상) 등. 그해 대회는 한국대학 선발팀이 역대 최고 성적(5승 2패)으로 우승, 대학 야구사에 의미가 깊다. 특히 기대를 모았던 김정수(고려대), 이만수(한양대), 김일권(한양대) 등은 부진했고, 22타수 10안타(4할 5푼)를 터뜨린 김성한은 리딩히터로 유망주에서 벗어나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타격에 자신감이 붙은 김성한은 '오리 궁둥이 타법'을 배성서 감독에게 전수받는다. 강속구에 대비, 더욱 빠르고 파괴력 있는 스윙이 필요했던 것.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단점을 보완하다 보니 독특한 자세가 취해졌다. 하체를 뒤로 빼면서 배트를 뒤로 눕혀 들고, 투수를 노려보며 타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오리 궁둥이. 그러나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는 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아이콘(애칭)이 된다.
해태타이거즈 입단 계약금 받고 가족회의 열어
김성한은 군산상고에 진학하며 세운 목표를 동국대 4학년 때 달성한다. 그해 8월 한일은행에서 촉탁 발령을 받고 매월 20만 원을 수령하기 시작한 것. 가을에는 친구 소개로 만난 지금의 아내(박미영)와 데이트를 즐긴다. 당시 박미영씨 직업은 비행기 승무원이었다. 그럼에도 김성한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청소년대표와 대학선발팀 주전으로 뛰었음에도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프로팀 연봉 협상 때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세미프로 형식으로 운영되는 팀들이어서 연봉이 많았죠. 하지만 은행을 택했습니다. 하루 빨리 유니폼을 벗고 은행 업무를 보면서 안정된 가정을 꾸미는 게 희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이 들리는 거예요. 안정된 직장(은행)이냐, 불안한 도전(프로)이냐, 갈등을 많이 했죠. 미국 프로야구를 동경할 때여서 약간 흥분도 되고. 고민 고민하다가 프로 쪽으로 마음을 굳혔죠.
그런데 해태와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1,800만 원에 계약하면서 저에게는 1,200만 원을 제시하는 거예요. 이유는 국가대표 경력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어이가 없더군요.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선수로 뽑겠다는 어우홍 국가대표팀 감독의 언질(메시지)도 있었는데, 1년이라도 태극마크를 달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30년도 더 지난 얘기인데요. 그때 1,200만 원은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이었죠. 처음으로 목돈을 쥐니까 고생하면서 살아온 형제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요. 객지에서 아버지가 생각나면 형님을,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누님들을 그리면서 외로움을 달랬는데, 여동생도 보고 싶고……, (잠시 침묵) 땀 흘려 번 돈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싶어 고향(군산)으로 달려가 가족회의를 열고 모두 큰형님 사업자금으로 드렸죠."
김성한은 "극구 사양하는 큰형님을 어렵게 설득해서 건네주었어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결혼(1982년 10월)을 준비하느라 매월 '개나리 적금'을 넣고 있으면서도 '좋은 일'이라며 선뜻 동의하면서 격려해준 아내가 고맙게 느껴집니다."고 덧붙인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한 6남매는 그날 처음으로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국 프로야구의 원조 '멀티 플레이어'
우여곡절 속에 탄생한 한국 프로야구는 해태 타이거즈(현 KIA), OB 베어스, MBC 청룡, 롯데 자이언츠, 삼성라이온즈, 삼미슈퍼스타즈 등 총 6개 팀으로 출범, 1982년 3월 27일 잠실구장에서 개막전을 치른다. 프로원년 해태 성적은 전체 4위. 그러나 홈런 부분에서 김봉연(22개), 김준환(19개)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고, 김성한은 10승 투수에 타점왕(3할 5리), 홈런 13개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면서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예고한다.
깔끔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배짱이 두둑하고 손목 힘이 뛰어난 김성한의 최고 장점은 운동선수에게 생명이나 다름없는 하체가 튼튼하다는 것. 그는 시즌이 시작되자 득점 찬스 때마다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적시타를 뿜어대 타점 1위를 지키면서 그해 8월까지 300여만 원의 상여금(메리트 시스템에 의한 배당금)을 별도로 받았다. 그가 받은 액수는 해태 팀 전체 선수들이 받은 금액의 30%에 해당,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1982년 5월 15일, 7000여 관중이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운데 광주구장 울타리 안에서는 호랑이가 사자에게 물린 채 고초를 겪고 있었다. 5회까지 2-0으로 뒤지면서 4연패의 치욕을 당하려는 순간, 타잔과 같은 사나이가 나타나 건곤일척의 진검승부로 위기에 빠진 호랑이를 회생 시킨다. 6회에 마운드를 인계받은 김성한은 변화구와 강속구를 적절히 구사, 사자의 허리를 꽁꽁 묶으면서 쾌도난마의 역습을 가했다.
7회 말 주자를 1루에 두고 삼성 투수의 초구를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으로 2-2 동점을 만든다. 연장 11회 말 역시 안타를 치고 나간 앞 타자가 2루를 훔치자, 곧바로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깔끔한 안타로 게임을 승리로 이끈다. 이 적시타는 자기 자신에게 시즌 4번째 승리 투수의 영광을 안겨주는 결정타이기도 했다. 혼자 차치고 포치고 장구도 치는 1인 3역, 그의 멀티 플레이어 역할은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해태에 입단하는 1985년까지 계속된다.
한국프로야구 각종 타격 기록에서 1980년대는 김성한의 시대였다. 해마다 새로운 기록이 탄생, '기록의 사나이'라는 애칭이 붙어 다녔다. 1986년 5월 13일 한화와의 경기(청주구장)에서 한국 프로야구사상 최초로 500개 안타를 기록한다. 대기만성, 첫 만루 홈런은 1987년 삼성과의 경기(대구구장)에서 프로 첫 1000루타와 함께 터져 의미를 더했다. 1991년 4월 19일에는 롯데와의 경기(사직구장)에서 프로야구 최초 1000개 안타를 쳐낸 선수가 된다.
82년·88년 타점왕, 85년 최다 2루타, 85년·88년 최다 안타, 89년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85년·88년·89년 홈런왕과 장타율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1990년부터 후배 장종훈(빙그레)에게 대부분 기록을 넘겨준다. 홈런, 타점 등 시즌 최고 기록도 내준다. 이에 김성한은 털털하게 웃으면서 "제가 누군가의 기록을 밀어내듯, 제 기록도 누군가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다"며 "프로야구 발전에 작은 초석을 놓았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83 한국시리즈'
김성한의 진가는 한일 프로야구사상 처음 정예 선수끼리 맞붙은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서도 발한다. 7대1, 큰 점수 차로 패색이 짙어가던 1차전 8회 초 이라부 히데키의 광속구를 통쾌한 좌월홈런으로 받아쳐 한국 타선의 자존심을 살렸다. 그의 파워는 특유의 오리궁둥이를 흔들면서 계속됐다. 네 게임에서 홈런 세 개를 터뜨린다. 그가 사용했던 배트는 도쿄돔 지하에 있는 야구박물관에 보관됐다. 한국프로야구 선수로는 최초의 영예였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30여 년을 주전선수로 뛰면서 가장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기는 제1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1976), 1983년 MBC청룡-해태 코리언시리즈(한국시리즈), 그리고 프로야구 14년을 마감하는 1995년 광주구장에서의 은퇴경기였다고 술회한다. 세 경기의 공통점은 그가 승리의 주역이 아님에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는 것.
"대통령배 우승은 군산상고 2학년 때였죠. 최관수 감독님과 선수들이 우승컵을 안고 암으로 투병 중인 원용학 교장 선생님 댁으로 문병을 다녀왔는데요, 그때 감격은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83 한국시리즈 역시 해태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감돌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제가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도 아닌데……. 그 후 3년 연속 해태가 우승하고, MVP를 수상했을 때도 기쁘기만 했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어요. (웃음) 은퇴 경기도 범타로 물러나 아쉬움을 남긴 경기였죠. 그럼에도 팬들의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김성한은 은퇴경기를 치른 그해 12월 친정팀 해태 2군 타격코치로 데뷔,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97년 봄 해태 1군 타격코치와 수석코치를 거쳐 KIA 타이거즈 3대 감독(2001-2004)을 역임했다. 하지만 2002년 2군 포수였던 김지영을 폭행한 사건으로 감독생활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2004년에는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MBC 프로야구 해설위원과 강사로 활동하다가 2012년 가을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래는 그의 짧은 소회.
"빈손으로 시작한 제가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분에게 과분한 사랑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타격코치로 시작한 지도자 생활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요. 그럼에도 투지만 앞세워 뛰어난 용장(勇將)이 되려다가 남긴 오점(폭행사건)은 오욕의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야구) 일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죠. 이제는 시대도 변했고 지도자상도 바뀌었으니, 원활한 소통과 포용력으로 존경받는 덕장(德將)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도쿄돔 담장을 넘기는 홈런 세 방으로 한국 야구를 깔보던 일본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팬들에게 희열을 느끼게 했던 사나이. 국내외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포효하던 그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었는지, 큰아들(31) 결혼날짜를 잡아놓은 예비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경험과 견문이 넓은 원로에게서 느껴지는 유연함과 노숙함이 묻어났다.
자료출처: 동아일보, 경향신문 기사.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