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제4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9월)에 이어 제94회 전국체전(10월)도 우승, 2013년 고교야구 시즌 2관왕을 차지했다. 군산상고는 10년이 넘도록 무관에 그치다가 연거푸 패권을 거머쥐며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대견스러운 후배들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봤을 김성한(이하 존칭 생략) 한화이글스 수석코치를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만났다.
‘기록의 사나이’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legend) 김성한. 그는 해태 타이거즈(82~95) 시절 20홈런-20도루(1989), 1000안타(1991), 2000루타(1992), 700득점(1993)을 최초로 달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최다안타 1위 두 번(85, 88), 장타율 1위 세 번(85, 88, 89), 홈런왕 세 번(85, 88, 89)을 차지했다. 투수로도 통산 15승 10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정규레이스 MVP 2회, 골든글러브 7회, 올스타전 MVP 1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기념비적인 기록으로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그는 ‘오리 궁둥이 타법 창시자’이기도 하다.
1995년 9월 24일 광주구장에서 프로 무대 14년을 마감하는 은퇴경기를 치르고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붉은 유니폼을 벗었다. 땀으로 쌓아올린 찬란한 기록들을 정든 그라운드에 묻고 떠난 지 20여 년. 그럼에도 고향의 60~70대 할머니 팬들 가슴에는 ‘야구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선수’로 그의 잔영이 남아 있다. “김성한이, 내가 잘 알지. 방맹이도 잘 때리고(안타도 잘 치고) 미남 선수였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놀러도 오고 그랬는디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는개비네...” 군산시 미원동에 사는 73세 할머니의 추억담이다.
다섯 살 때 사고, ‘야구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 끼쳐
김성한은 1958년 5월 18일 전북 군산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모가 평화동 ‘농방 골목’ 모퉁이 건물에서 생선탕 전문 한식당 ‘신진옥’을 운영했다. 영업은 그런대로 됐으나 딸린 식구가 워낙 많다 보니 살림은 항상 쪼들렸다. 김성한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야구와 축구를 무척 좋아했다. 유별난 개구쟁이였고, 연년생으로 태어난 6남매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인생은 ‘새옹지마’, 다섯 살 무렵에는 야구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때 큰형(김재한)은 중앙초등학교 축구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집(식당)에는 항상 축구공이 몇 개씩 있었죠. 학교와 가까워 축구공 보관소였습니다. 하루는 형 몰래 축구공을 가지고 놀다가 식당 화덕에 올려놓은 물솥에 공을 빠뜨렸습니다. 그 공을 잡으려다 팔팔 끓고 있던 물이 쏟아져 3도 화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죠. 훗날 야구를 하는 데 지장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흉터가 혐오감을 준다고 해서 군대도 면제받았어요.”
김성한은 “사경을 헤맬 정도의 대형 사고였고, 고통의 흔적인 흉터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며 손으로 엉덩이 쪽을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흉터가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한편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는 것. 그는 “몇 달간의 지루한 치료기간과 아팠던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3년의 군(軍) 복무 공백이 없었던 것도 행운이라 할 수 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며 개구쟁이 시절을 회상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감독 권유로 야구 시작
"농방골목, 약방골목, 물망초다방 앞길, 중앙초등학교 운동장 모두가 놀이터였습니다. 밤에는 상가 불빛과 가로등이 야간경기장 나이트 역할을 해주었죠. 1960년대 초 시내 초등학교 네 곳(군산초교, 남초교, 중앙초교, 금광초교)이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군산에 야구 붐이 일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시멘트 포대와 신문지로 글러브를 만들어 물렁물렁한 고무공으로 ‘골목야구’를 했죠. 그때는 ‘공치기’라고 했습니다. 종이로 글러브를 잘 만들어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지금은 접는 순서도 잊어버렸어요. (웃음)
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하루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캐치볼을 하는데 학교 감독님(이순철)이 부르더니 ‘야, 너 정식으로 진짜 야구를 해봐라!’라며 야구부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놀랐죠. 그렇잖아도 발바닥에 땀이 조금만 나도 미끄러지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줄무늬 운동화 차림의 선수들을 부러워하고 있었거든요. 운동화 신고 싶어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 주전선수로 뛰었고, 상(賞)도 많이 받았어요. (웃음)”
김성한의 야구 인생은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5~6학년 형들의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 속에 투수와 유격수로 활약하면서 강속구와 날카로운 타격으로 주목을 받았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연습경기 때마다 장타를 날렸고, 전국대회에 출전, 4강 진입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군산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전라북도가 주최하는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유소년들에게 최고 명예인 ‘전북의 별’(MVP)도 받았다.
이준원 교감 선생님은 ‘평생의 은인(恩人)’
김성한의 인생 험로는 예고돼 있었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것.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3학년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신다. 조숙했던 김성한은 잘 달리던 기차가 탈선하듯 옆길로 빠지기 시작한다. 공부와 운동은 뒷전이고 ‘문제아’들과 어울려 학교 근처 만화방이나 음침한 월명공원 뒷길 등 우범지역만 찾아다녔다. 꿈이 조직폭력배인 불량 청소년들과도 어울렸다. 좌절과 방황의 늪을 탈출하지 못하고 헤매기를 2년여. 인생의 기로에서 고민할 때 구세주가 나타난다.
“군산상고 에이스였던 김용남과 중학교 동기인데, 그 친구는 곧바로 진학하고 저는 유급당해서 1년을 더 다녔죠. 그렇게 거리를 방황할 때 바로잡아준 분이 당시 군산중학교 이준원 교감 선생님입니다.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재능도 있는 놈이 왜 야구를 멀리하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집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저를 자식처럼 돌봐주셨는데요. 선생님 보살핌으로 야구 배트를 다시 잡았고, 군산상고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준원 선생님은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조직폭력배 일원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니까요.”
이용일(83) 전 KBO 총재권한 대행 회고에 따르면 이준원 교감은 김성한을 데리고 살면서 아침에 같이 출근하고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 한쪽에서 연습을 지켜보다 같이 퇴근하곤 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김성한을 돌보고 있는 것에 대해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한다. 김성한도 자신을 돌봐준 은사가 돌아가시는 1992년까지 명절 때마다 인사를 다녔다. 결혼(1982) 후에는 아내와 함께 찾아뵈었다. 지금도 이준원 교감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김성한 부부의 앨범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선배들의 텃새와 질투
김성한은 1975년 군산상고에 입학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항상 자상하고 언행일치를 보여줬던 이준원 선생님과 ‘기량이 뛰어난 야구 선수 이전에 인간이 되라’고 권하는 최관수 감독을 통해 ‘인생의 지표’가 정해진 것. 특히 밤낮없이 공부하는 군산상고 은행반 학생들을 보며 야구를 열심히 해서 은행에 들어가 훌륭한 지점장이 돼야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3학년 선배만 14명, 그럼에도 1학년 때부터 중심타자로 뛰었다. 그러나 세탁기가 없던 시절 빨래해야지, 선배들 세숫물 떠다 바쳐야지, 합숙소 연탄불 갈아야지, 청소해야지, 타격 연습도 해야지.. 외출은 감히 생각도 못 했다. 어쩌다 연탄불이 꺼지면 엉덩이에 불이 났다. 고된 훈련과 매타작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선배들의 텃새와 질투. 어떤 선배는 최관수 감독 몰래 ‘볼 보이’를 시키기도 했다. 그 속에서도 새벽마다 할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다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어요. 저는 중학교 3학년 겨울부터 군산상고 합숙소에서 지냈죠. 세 살 아래 여동생은 해망동 산동네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결혼한 누님과 형님이 보살피긴 했지만, 고생을 많이 했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할머니와 여동생을 보러 갔습니다. 학교 뒷산을 쭉 타고 뛰어가면 30~40분 걸렸는데요. 상수도 시설이 없는 산동네여서 수돗물을 길어드리고 돌아오면 선배들 세숫물 떠다주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죠. 그래도 연습은 흐트러짐 없이 열심히 했습니다."
최종 목표가 정해지고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니 그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았다. 잡념이나 망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해진 훈련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해서 저녁을 먹으면 배트를 들고 뒷산에 올라 허공에 대고 ‘이미지 스윙’을 연습했다. 그야말로 전력투구. 결과는 1976년 한해에 우승 2회(대통령배, 전국체전) 준우승 2회(청룡기, 전국 우수고교초청)로 나타난다.
제10회 대통령배 야구대회 군산상고 우승
1976년 5월 20일. 그날 군산 시민의 눈과 귀는 제1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 결승전이 열리는 동대문구장에 쏠려 있었다. 이날 경기는 군산상고 에이스 김용남과 대구상고 에이스 김시진의 팽팽한 투수전으로 7회까지 0의 행렬이 계속됐다. 라디오와 TV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숨을 죽였다. 그러나 9회 초 2번 타자 김형종의 방망이에 맞은 천금 같은 3루타가 외야 쪽 하늘로 날아갔고, 시민의 함성은 월명산에 메아리쳤다.
다음 타자는 3번 김성한. 그러나 승리타점을 올리지 못했다. 김시진의 악송구로 3루 김형종이 바람같이 뛰어들어 결승점을 뽑아냈기 때문. 9회 말 결과는 1대0. 시민들은 최관수 감독을 헹가래 치는 선수들을 보며 감격했다. 지역감정의 피해의식 속에 지내던 사람들에게 대구상고와 결승에서 승리가 주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카시아 향 짙은 5월의 밤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대통령배 우승기가 처음 전북으로 넘어온 것을 자축했다.
다음날 지방신문들은 군산상고 우승 소식으로 장식했다. 시청 직원들은 환영식 준비를 서두르고, 시민들은 가슴 설레며 ‘역전의 명수’들을 기다렸다. 35사단 오픈카에 오른 선수들이 전주를 출발 익산을 거쳐 군산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시청 앞에 도착하자 모두가 감격했다. 고층 건물에서는 꽃가루가 뿌려졌고, 하늘에서는 경비행기가 퍼레이드를 벌이면서 행사는 절정에 달했다. 당시 서해방송은 사상 유례없이 전 게임을 재방송으로 내보냈다.
김성한은 2학년(1976) 때부터 투수와 삼루수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그해 군산상고가 전국규모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는 데 중심역할을 한다. 3학년(1977) 때는 대구상고 이만수와 쌍벽을 이루는 장타자로 인기를 누렸다. 투타에 능해 야구천재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시즌에서는 전국규모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을 못 한다. 제58회 전국체육대회 3위가 최고 성적. 그럼에도 팀에서 ‘군계일학’으로 졸업을 앞둔 시기 대학과 실업팀에서 욕심내는 선수로 성장해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