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들 사이에 ‘전라도 판소리 가락에 엉덩이가 들썩이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냐, 전봇대지!’라는 말이 회자되던 시절 국악에 입문해서 고집스레 한길을 걸어오고 있는 (사)금강문화원 김갑식(70) 원장을 만났다. 전북 군산 토박이인 그의 국악 입문 동기부터 듣기로 했다. “열다섯 살 때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유곽시장이 있는 명산동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청아한 가야금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오는 거예요. 처음 듣는 소리였고, 그곳에 군산국악원이 있는 것을 모를 때였죠, 낭랑한 소리가 흐르듯, 구르듯, 감기듯 하면서 춤추는 것처럼 느껴져 정신이 몽롱해지더군요. 한참을 서 있었는데, 그 울림의 조화에 매료되어 5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야금과 ‘동고동락’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웃음)
소년 김갑식은 가야금 소리가 듣고 싶으면 명산동 거리를 거닐었다. 결국, 열아홉 살 되는 1962년 국악에 입문한다. 그저 가야금 소리가 좋아서 배워보려고 등록한 것이지 전문 국악인이 되거나 늙도록 하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다. 당시 군산국악원에는 가무를 배우는 ‘실기반’과 취미로 다니는 ‘동호인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동호인을 ‘한량’이라 불렀다. 약관의 나이에 자그만 꽃집을 운영하던 김갑식도 한량들 틈에 낀 것.
“예술인들을 ‘쟁이놈’이라고 하던 시절이어서 국악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었습니다. 국악원에 드나드는 동호인은 기관장이나 회사 고급 간부,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 등 돈 많고 나이 많은 군산의 유지(有志)들이었죠. 여성 지망생은 많았는데, 유지들 눈에 띄어 작은 부인이 되거나 안방을 차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게 흉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한량 소리를 듣는 동호인들 아니었으면 군산의 국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랬다.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군산 국악의 맥을 이어간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1948년 기금을 모아 ‘군산국악 연구회’(군산국악원)를 설립, 기악부, 창악부, 무용부 등을 두고 국악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67년에는 당시 회장(박환준)이 사재를 쾌척, 시청의 보조를 받아 군산시 창성동에 강의실, 실습실 등을 갖춘 건물(약 60평)을 장만했다. 한자로 ‘군산국악원’이 양각된 현판도 내걸었다. 강사도 따로 초빙하여 운영에 혁신을 가져오자 수강생이 많아졌다. 해마다 판소리, 화관무, 장구춤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국악제도 열렸다. 중앙 국립국악원과 유기적인 단체로 발전시켰고, 수료한 원생의 진로를 터놓기도 했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국악인과 내로라하는 명창들이 탄생했다. 남원명창대회 대상(1978), 전주 대사습 대통령상(1989), KBS 국악대경연 대상(1993)까지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김수연(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명창과 최란수(지방문화재 2호), 성운선(지방문화제 2호)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일찍이 한량 반열에 올라, 여성국극단 악사로 활동하기도
1960년대 초 가야금이 밥보다 좋았던 김갑식은 손가락에 피멍이 들고 상처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광의 상처’로 받아들였다. 그가 사사한 선생님은 박귀남(가야금), 김준섭(唱), 김무찬(고법), 이동수(아쟁), 성운선(장고) 등 10명이 넘는다. 조금씩 익숙해지니 욕심이 생겨 창, 고법(고수), 장고, 아쟁 등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열두 가지 재주가진 놈, 끼니가 간데없다’는 속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본인도 “기예 자체를 즐기고, 남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익히다 보니 ‘반거충이’가 됐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일찍이 한량 반열에 오른 김갑식. 국악에서 2% 부족함을 느낀 그는 가사(歌詞) 기능보유자인 석암 정경태(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선생을 찾아다니며 한시(漢詩)를 사사 받는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한국 한시연구원이 주최한 백일장 대회(1973) 입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것. 기예가 늘어 가야금 연주를 할 정도가 되자 여성국극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운영하던 꽃가게를 닫고 유랑극단 악사가 됐습니다. <임춘앵과 그 일행>인가? 아무튼, 김경수·김진진 자매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였어요. 대금(大笒) 반주는 훗날 대통령상을 차지한 원장현 명인이 했는데요. 실력이 한참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을 스카우트한 것을 보면 그때는 국악계도 몹시 가난했던 모양입니다. (웃음) 흥행이 별로여서 단원을 여인숙에 볼모로 잡히고 돈을 벌어 찾아오기가 일쑤였죠. 결국, 1년 남짓 견디다가 정읍 공연을 끝으로 군산으로 돌아와 가게 문을 다시 열었습니다.”
30년 가까이 떠돌던 국악원 건물, 시민의 재산으로 돌려놔
객지를 떠돌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소득도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시야가 넓어졌고 기예도 능숙해진 것. 익힌 재주로 문화에 갈증을 느끼는 이웃들을 기쁘게 해줘야겠다는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그에 따라 군산국악원 동호인 활동을 열심히 했다. 수입은 신통치 않았으나 국악 관련 사업과 문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군산의 국악이 침체기로 접어든 1989년 그는 임기 3년의 군산국악원 원장을 맡는다. 전국 최연소 원장이었다고.
김 원장은 선후배들의 추천으로 국악협회 군산지부장을 겸임하면서 평소 마음에 담고 있던 계획들을 하나씩 실행으로 옮긴다. 10회가 넘는 위안잔치와 국악강좌로 대화와 소통의 자리를 마련했다. 1992년에는 군산국악원 설립이래 처음으로 학생판소리 경연대회를 개최해서 21회째 이어지고 있으며, 제10회 전북 시·군 농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여 군산 국악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의 희생적인 국악 사랑과 열정은 연임으로 이어진다.
1993년 3월 20일 시민과 국악 동호인들의 화합을 위해 국립창극단을 초청하여 위안공연을 가졌고, 며칠 후에는 김수연 명창의 대통령상 수상 축하공연을 군산 그랜드호텔에서 개최했다. 특히 매매계약서가 사라져 30년 가까이 주인 없이 떠돌던 군산국악원 건물을 자비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시민의 재산으로 돌려놓아 진정한 국악인으로 평가받으며 1993년 10월 ‘군산 시민의 장’(문화장)을 받았다.
희망과 삶의 의욕 찾아주는 문화예술단체 설립
김 원장은 1995년 군산국악원장과 국악협회 군산지부장 2대(6년) 임기를 무난히 마치고 물러난다. 그때가 50대 초반으로 가야금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외지에서 초대받아 국악강좌도 다녔다. 시민 위안 무료공연도 봉사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군산시를 비롯해 군산문화원, 대학, 소규모 단체가 주최하는 문화행사도 초청을 받으면 기꺼이 응했다.
21세기 최첨단 디지털 정보화시대 개막을 알리는 2000년대 초부터 새 시대에 부응하는 문화예술 사업을 계획한다. 계획은 2002년 4월 15일 봉사단체(예술봉사회) 출범으로 열매를 맺는다. 설립 목적은 문화행사를 통해 희망과 삶의 의욕을 찾아주고, 화합과 지역 예술발전에 이바지하는 것. 초기 회원은 20명. 2004년 12월 14일 군산문화예술단 창단식을 갖고 꾸준히 활동해오다 2009년 2월 16일 전라북도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는다.
김 원장은 가야금 연주와 고수를 겸하면서 공연기획, 연출 등을 맡았다. 그 결과 2012년 10월 한국청소년신문사가 제정한 문화예술 대상을 받는다. 그 후 단체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2013년 8월 현재 회원이 40명(정회원 30명, 준회원 10명)으로 늘어난 것. 단체 구성은 이사 9명과 지도위원 7명, 강사 4명을 두고 대중음악, 타악, 색소폰, 벨리댄스, 농악, 국악, 가야금, 서예, 무용, 품바(각설이), 무예 등을 연마하고 연구하는 동아리를 운영 중이다. 부설단체인 군산문화예술단은 2002년 4월 15일 노인대학 위안공연을 시작으로 2013년 8월 31일까지 KBS TV 아침 마당과 대전세계무술영화제 등 다른 지역 초청공연을 포함, 총 200회를 넘어섰다. 중점사업은 종합예술 공연(대중음악, 국악, 무용, 난타, 농악, 품바 등)을 비롯해 국내외 문화교류, 금강문화예술상 시상, 향토문화 자료 발굴 사업 등이다. 특히 2006년부터 매년 광복절, 개천절 축하행사를 개최해서 관심을 끌고 있다.
김 원장은 “일제에 의해 사라질 번했던 전통 국악 보존과 문화예술 행사에 정신을 쏟느라 부(富)를 이룰 기회를 놓쳤지만, 후회는 없다”면서 “공자도 치국(治國)의 철학을 음악에 두었듯, 이제는 우리 젊은이들도 정신적 뿌리인 전통 소리를 찾아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개천절인 오는 10월 3일(토) 오후 4시부터는 (사)금강 문화예술원이 주최하는 제7회 우리 문화예술제가 군산 은파호수공원 무대에서 성대하게 펼쳐진다. 1부는 천제의식을 시작으로 기념식과 민요, 색소폰, 아코디언 앙상블, 판소리, 사물놀이, 무용, 독도지킴이 태권도 무예 등 시민과 함께하는 가요잔치가 다채롭게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