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소서(小暑)가 코앞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프리카 사바나 추장처럼 개흙을 몸에 잔뜩 바르고 미끄럼도 타고 물장구도 치고, 참외 서리도 하면서 뛰놀았던 그 옛날 고향동네 '갯벌'로 추억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금강 하류 언저리에 자리한 째보선창에서 해안을 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월명운동장보다 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그 넓은 '갯벌'을 어른들 사이에는 '깔밭', '깔대밭', '뻘탕', '뻘바탕' 등으로 불리었고, 우리는 '뻘바탕'으로 통했다. 지금도 표준어인 '갯벌'은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딱딱하고, 방언인 '뻘바탕'은 친구처럼 정겹게 느껴진다.
강바람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강둑에 서면 시원하기가 그만이었다. 천 리(401km)를 흘러온 금강이 다하는 서해가 아스라이 보였고, 강 건너 초가집들은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으며, 우거진 갈대숲과 저녁노을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어른 몇 사람이 숨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갈대밭에서 해지는 줄도 모르고 '때까치' 알을 찾으러 헤매고 다녔다. '때까치'가 집 나간 가족을 찾을 때 내는 '찌르륵, 찌르륵' 소리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요란했는데 다시 기억하려니까 아름다운 음악으로 다가온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침밥 수저를 놓기 무섭게 골목에 모여, 이웃동네 아이들과 함께 갯벌로 향했다. 부모에게 들키면 된통 혼났지만, 시원한 강바람, 스릴 만점의 얼음 서리와 참외 서리, 몸에 바르고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촉감이 부드러운 개흙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틀이 멀다고 찾아다녔던 갯벌은 참외 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키면 피하는 장소로도 이용됐다. 강둑을 경계로 육지에는 참외밭과 원두막, 깊이 파낸 땅에 인분을 보관하는 거름통이 여기저기에 있었는데, 코를 찌르던 인분 냄새도 이제는 원두막의 운치와 함께 추억의 향기로 변해버렸다. 당시만 해도 갯벌에는 해삼, 짱뚱어, 농게는 물론 갯지렁이가 많이 살았는데, 온몸에 개흙을 바르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웃고 떠들면서 미끄럼을 타고 강물로 빠져들 때 희열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농게, 짱뚱어, 서리의 추억
붉은 왕발이 달린 농게는 어찌나 빠른지 하루에 한 마리 잡기도 어려웠다. 실로 둥글게 매듭을 지어 농게가 들어간 구멍 둘레에 붙여 놓고 기다리다 모습을 반쯤 드러낼 때 정확하게 낚아채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잡은 농게는 실로 묶어서 강아지처럼 끌고 다니며 놀았다. 자기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고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짱뚱어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고, 해삼은 징그러워서 만지지도 못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칭찬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짱뚱어를 고무신에 가득 잡아왔다. 그런데 칭찬은커녕 가지 말라는 '뻘탕'에 갔다고 혼나기만 했던 추억도 새롭다.
'때까치' 집을 찾아다니다 지치면 참외와 수박 서리에 나섰다. 참외밭에 침투해서 노획한 개구리참외는 이어달리기할 때 바통을 넘겨주는 식으로 물속에 던져놓고 갈대숲으로 도망가면 따라오던 주인이 발길을 돌렸다. 숨어서 지켜보던 우리는 다시 모여 빨갛게 익은 개구리참외를 맛있게 먹었는데, 성취감이 더해져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서리는 수박이나 개구리참외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고깃배가 잡은 생선을 싱싱하게 보관하려고 얼음을 배에 싣는 과정에서 얼음을 훔치는 일은 항상 '원철이'가 맡아 했는데, 공중에서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손에서 땀이 나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출어하려고 배에 얼음을 채우려는 어선이 제빙공장 쇄빙탑에 대면, 바닥이 대나무로 된 통로를 통해 상석만 한 직육면체 얼음 덩어리들이 저빙고에서 나왔다. 얼음 덩어리가 줄줄이 나올 때 앞에 것 하나를 세우면 뒤에 오는 놈과 부딪치면서 깨지고, 깨진 얼음은 강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다이빙을 해서 가져다 나눠 먹었는데, 원철이는 항상 적군의 비밀문서를 꺼내오는 특전용사 대우를 받았다.
아사리와 시래기죽
'오염'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그때는 갯벌 건너 삼각주에 '아사리'(어른 엄지손톱 크기의 노란 조개)가 지천이었다. 썰물 때는 동네 사람들이 함지박에 가득가득 잡아 수제비에 넣어 끓여 먹기도 하고, 삶아서 배고파하는 아이들 허기를 달래기도 했는데, 길가에 버린 껍질을 밟을 때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사리판'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끄러운 시장판이나 동네 사람들이 질서없이 떠들거나 싸우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는데,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아사리' 얘기만 들으면 고향동네 갯벌과 사바나의 추장처럼 얼굴에 개흙을 바르고 웃고 떠들던 옛 동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먹는 얘기가 나오니까, 홀어머니와 살던 개술이와 개화네 집에서 얻어먹었던 시래기죽이 생각난다. 미군부대 쓰레기처리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항상 두 아들이 먹을 시래기 밥 한 그릇을 솥에 남겨놓고 출근했다. 처마가 우리 키보다 약간 높아 낮에도 컴컴했던 방에서 실뜨기와 딱지치기를 하다 배고프면 물을 한 바가지 넘게 부어 끓였다. 그러면 다섯 명도 먹을 수 있는 양의 시래기죽이 되었는데, 반찬이라야 소금에 절인 시래기 김치가 전부였다. 하지만 맛은 다시없는 별미였다.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개화도 이제는 환갑을 넘겼을 터 어디에서 그 별미를 맛볼지,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었던 갯벌
갯벌에서 놀이 삼매경에 빠지다 보면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것도 몰랐다. 강 건너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고 강아지 짖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는 순간, 바람이 갈대숲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스산하게 느껴지면서 집에서 기다릴 어머니가 생각나 서둘러 돌아올 때도 있었다. 중동 갯벌은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이어서 집에 올 때는 짠물에서 놀았다는 증거를 없애려고 육지와 연결된 작은 수문에서 몸의 소금기를 씻어냈다. 다 씻으면 손톱으로 상대방 팔을 긁어 확인해주었는데, 소금기가 남아 있으면 하얗게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군산은 해방 이후 내항에 토사가 쌓이면서 퇴보하기 시작했는데, 수수백년 전부터 쌓여왔다고 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어른들은 "이러다가 마당까지 '뻘바탕'이 될꺼여!"라며 걱정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거워했다. 아니, 집이 떠내려가든 말든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최고의 놀이터요. 여름 피서지였으니까.
최고의 놀이터였던 갯벌은 영원한 추억이자 안식처였고, 가난에 허덕이는 우리의 희망이었다. 온갖 종기와 부스럼 딱지를 계급장처럼 붙이고 다니고, 짝도 맞지 않고 실로 꿰맨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동무들은 미래를 예상이라도 한 듯 항상 표정이 밝았는데, 조금은 짓궂었던 그 시절 놀이들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