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이 파래지고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추운 겨울 저녁,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꼭 쥔 손을 펴기조차 어려운 칼바람에도 단 하루도 노점을 쉰 적이 없다. 그건 오기였고 세상과의 싸움이었다. 삶의 힘든 고통을 그 차가운 겨울로 생각하며 맞섰다. 또래의 친구들은 부푼 꿈을 가지고 새로운 직장을 찾을 때였고, 남자친구들과 달달한 연애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시기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은 아기자기한 액세서리가 가득 쌓여있는 가판을 지키는 전투의 시간이었다.
혹 당신이 2000년대 초, 중반 군산에서 산 사람이라면 분명 한번은 그녀를 본적이 있을 것이다. 원도심의 예전 경찰서 로터리 자리가 있던 부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액세서리 노점상을 하던 강선녀씨를 말이다. 그녀가 고생하며 희생했던 젊은 시간은 이제 번듯한 세 가게의 사장님으로 되돌아왔다. 더 이상 내복을 세 겹씩 껴입고 칼바람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40도의 폭염 속에서 땡볕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리 크지 않지만 깨끗한 물건들로 가득한 세 가게가 있고, 믿고 따라주는 여러 직원들, 함께 일생을 같이 할 남편과 아이들이 곁에 있다.
그녀는 평생 단 한 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가난은 업보처럼 따라 다녔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후 노점을 시작해서 지금의 영동거리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구 경찰서 부근에 가게를 얻어 제대로 된 장사를 시작했지만 설상가상 건물이 없어지는 통에 내쫓겨났다. 그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 때부터 아버지의 노점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운 그녀에게는, 오직 장사만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길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002년 여름, 고모에게 70만원을 빌려 가판 장사를 시작했다. 너무나도 힘들게 졸업한 전북대 경영학과의 번듯한 간판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직장을 구해 남의 밑에 들어가서 일해 보겠다는 생각은 해본적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귀걸이, 목걸이 등 여성용 액세서리를 사와서 무작정 노점을 시작했다.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도 단 한 번 없었다.
그저 돈을 버는 일은 목숨과도 같은 일이었다. 첫날 68만원을 팔았다. 노점에서 희망을 보았다.
물건이 좋고 가격이 싸다면 장사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목이 좋으면 성공의 확률은 더 높아진다. 단속을 피해 오후 5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소문이 나고 점점 단골들이 늘어나서 근처 카페에서 장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손님들도 생겼다.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더워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나 함박눈이 펑펑 내려도 3년 동안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그건 손님과의 약속이기 전에 자신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점은 커져갔고 2005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의 1호점이 있는 건물에 입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원도심이 많이 쇠퇴해졌지만 당시 그 자리는 군산 최고의 상업 지역이었다.
노점장사를 하던 때 친구가 지어준 망고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서 장사를 시작했다. 천생 장사꾼이라 누구보다도 제대로 장사하는 방법을 알고 있던 터에 번듯하게 꾸며진 매장은 날개를 달아주었다. 고객에게 믿음을 주고 좋은 물건을 판매하며 가게는 승승장구 했다. 군대를 제대한 동생과 늘어나는 식구들을 위해 군산 우체국 맞은편에 망고2호점을 냈다. 나운시장에는 어머님이 보물섬이라는 가방가게도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남들보다 빠른 시간에 성공한 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되뇐다. 노점을 하던 때의 초심을 잃지 말라고. 그리고 지금은 모든 행복을 가진 사람이 되어있다. 든든하게 뒤를 지키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부모님과 교육공무원 남편, 그리고 아직은 어린 두 딸이 항상 곁에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한번 쯤 되새겨볼만한, 군산사람이기에 너무 자랑스럽고 흐뭇한 이야기일 것이다. 젊음은 누구에게나 단 한번 온다.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녀석은 분명 노력한 이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한다. 그게 십년 후가 될지 당장 다음 달이 될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