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내 고향 군산에서 일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날 때인 1997년 2월 1일 군산을 대표할 문인 라대곤 소설가, 최 영, 배환봉, 이경아 시인 등 네 사람이 작별의 점심시간을 마련해 주었던 일이 어제 일 같이 기억이 생생합니다. 최 영 시인은 먼저 저 세상 사람이 돼 그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는데 오늘 다시 라대곤 박사와 작별하게 됨은 뭐라고 말해야 될지 할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모임이 있으면 당신은 호방한 재담으로 자리를 웃기고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평생 반려자인 부인을 부를 때 ‘내 각시’라고 하는 그 ‘내 각시’와 자녀들을 두고 74세의 나이로 홀연히 떠났습니다.
언젠가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가려는 나에게
“가지 않는게 좋겠다”는 말을 최 영 시인에게서 듣고 나는 막연히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본인 스스로 췌장암과 담낭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그 때의 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라 박사는 체중이 20kg나 줄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깜비는 내 친구’ ‘내이름은 똥개’를 ‘매거진 군산’에 연재했습니다. 4월호에 ‘다음호에 계속’한다고 예고 했습니다.
그 다음호는 언제 나올 것입니까? 무턱대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을 흠모하는 저 많은 사람들의 슬픈 정송을 들으며 먼 길 편히 가십시오. 라대곤 박사! 엎드려 통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