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문단의 큰 별이 떨어졌군, 삼가 명복을 빕시다!”
지난 16일(화) 오전 8시 50분 선배에게 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이다. ‘큰 별’이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삼가 고인의 텁텁한 미소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 전날(15일) 오전 11시 50분 라대곤(羅大坤) 회장이 7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가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큰 별, 그랬다. 칠순에 췌장암, 담도암 수술을 연거푸 받고, 체중이 20kg이나 감소하는 등 쇠약해진 몸으로 동화집 <깜비는 내 친구>(신화출판사) 1·2·3권을 펴낸 라대곤은 전북 문단의 큰 별이었다. 그럼에도 후배들 창작활동을 격려하고 장려하기 위해 제정한 ‘신곡문학상’이 18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이었으니 ‘한국 문단의 큰 별’이라 해야 격에 맞지 않을까 싶다. ‘신곡’은 라대곤의 아호.
소설가 라대곤은 1993년 늦깎이로 등단, 수필집 <황홀한 유혹> 외 4권, 소설집 <퍼즐> 외 4권, 장편소설 <망둥어> 외 3권을 펴냈다. 탐미문학상(1998), 전북문학상(1999), 표현문학상(2000), 채만식 문학상(2006) 등 수상 경력도 쌓았다. 2011년에는 군산대학교(총장 채정룡)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원로로서 위상을 정립했다. 그의 학위 증명서는 군산이 낳은 대문호 채만식(1902~1950), 해방 후 월북한 이근영(1910~?)의 대를 이어가라는 당부와 격려로 받아들여졌다.
거리낌 없는 호방한 웃음과 풍자 넘치는 유머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던 따뜻한 인정의 소유자 라대곤. 그가 떠나고 허한 가슴을 달랠 길 없어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길게 누운 오성산 줄기 위에서 반짝이는 ‘개밥바라기’(Venus)를 바라본다. 내일도 모레도 해 질 녘 서쪽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한국 문단의 별이 하늘의 별이 되어 미리내 여울 위로 흐르고 있을 것 같아서다.
영결식은 지난 17일(수) 오전 10시 군산 은파장례식장에서 ‘전북문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마지막 떠나는 고인을 송별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은 윤규열 한국문인협회 군산지부장, 오 현 군산예총 사무국장, 정군수 전북문인협회 회장, 수필가 김용옥씨 등 선후배 문인과 지인들은 애도의 아픔을 나누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국화로 둘러싸인 고인은 자신을 향해 절하는 조문객들에게 은은한 미소로 답하고 있었다.
김남곤 시인은 이경아 시인이 대독한 조사(弔詞)에서 “라대곤 회장님은 지금쯤 지구에 두고 온 어여쁜 식구들과 몸 비비며 어울렸던 친지들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곳에는 커피숍도 있고, 바도 있고, 세미나실도 있고, 뮤직홀도 있고, 댄스홀도 있고, 막걸릿집도 있고, 횟집도 있고, 만남의 광장도 있고, 어여쁜 사람 머리 위에 꽂아줄 꽃집도 있을 것···”이라며 추모했다.
소설가 라대곤은 1940년 군산에서 이름난 과자공장(八眞堂)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영동 구시장 입구에 있던 팔진당은 센베이 과자와 알사탕(눈깔사탕) 등 과자에 여덟 가지 맛을 담아낸다고 해서 붙여진 상호. 그러나 어린 라대곤은 맛난 과자를 맘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금만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김제군(김제시) 신곡리로 이사한다.
봄이면 솔개산 중턱으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뒷동산의 할미꽃, 언덕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 담장을 노랗게 수놓는 개나리 등 신곡리는 참 아름다웠다. 친구들과 참외 서리를 모의하던 흥복사(興福寺), 신비스럽게 보였던 대웅전, 눈을 부릅뜬 사천대왕 등은 어린 라대곤의 창작 감각을 키워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훗날 라대곤은 형님이 요절하고 가난과 싸워야 했던 신곡리는 아픈 기억만 쌓인 슬픈 저장고라고 술회한다.
애주가, 호사가, 풍운아 등 따라다니는 수식어도 다양하다. 소설 같은 그의 인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악극단 <미성>의 각색요원으로 채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단장이 도망치는 바람에 경찰서 유치장을 시작으로 남한산성으로 불리는 육군교도소, 안양교도소, 군산교도소 등을 두루 거치면서 인생 수업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가시밭길 같은 인생행로가 리얼하게 그려지면서 동시대를 살아온 동병상련의 애틋한 정이 묻어난다.
집필을 통해 지역의 독창적이고 특성화된 문화 콘텐츠를 알리고, 풍자와 해학으로 사회발전과 인간성 회복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라대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군산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그런지 지명은 물론 등장인물의 이름, 직업, 생김새까지 낯설지 않다. 간혹 데자뷔 현상(already seen)이 일어나기도 한다. 건달, 성매매업자, 사기꾼 등 사회의 비열한 인간 군상들도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2011년 12월 초 동화책을 펴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로 정했다고 말하고,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쓰고 싶다니까 “나 같은 사람도 취재 대상이 되는 거여?”라며 흔쾌히 응해주던 그때 모습이 언뜻언뜻 내비친다. “이제는 내가 나서는 일은 없을 거여. 후진들이 나서야 할 때거든. 나 같은 늙은이는 조용히 뒤에서 후배들 창작활동을 돕는 게 옳은 일이지!"라고 하던 그의 마지막 멘트는 긴 여운으로 남아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동화집 <깜비는 내 친구>는 6권까지 시리즈로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3권까지 펴내고 이승을 하직했다. 탈고를 못 한 아쉬움에 저승의 문고리를 제대로 잡기나 했는지…….. 그런즉 그의 집필활동은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인의 숨결이 숨 쉬는 금강과 오성산, 산철쭉이 만발한 월명산, 명산동 유곽시장, 구 역전 고가도로, 구시장 세느강 등이 내려다보이는 군산의 하늘에서 말이다.
그는 나보다 열 살 위다. 나이로 치면 큰형님 벌이 된다. 좀 더 가까이서 크게 불러보고 싶었으나 입에서 허락하지 않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그 이름 라대곤 형……. 이제는 이승의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부디 영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