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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약한 자 편에 서고, 그늘진 곳을 찾아가야죠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4.01 17:29:5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나는 섬에서 태어난 섬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해풍처럼 억세고 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도전하는 근성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바다는 넓다.  그리고 끝이 없다.  그뿐 아니라 바다는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나는 그 무서운 바다 한가운데서 가슴 내밀고 버티며 살아왔다.  바닷가에서 하늘을 물들인 분홍빛 노을을 바라보며 살았고, 어디론가 한없이 떠나가는 돛단배가 언제 돌아올 것인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며 살았다. (김철규 칼럼집 <흐르는 강물을 누가 막겠는가> 후기에서)  

 

그랬다.  고군산군도 야미도(夜味島)에서 태어난 소년 김철규는 하늘과 바다 사이 아슴하게 그어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꿈과 희망을 키웠다.  육지를 동경하면서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망망대해와 그 위를 그림처럼 떠다니는 돛단배들은 풍요 그 자체.  소년 김철규는 하늘을 붉게 물들인 분홍빛 노을에서 문사(文事)의 길을, 바다와 갯벌을 터전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부모를 보면서 도전 정신과 삶의 지혜를 터득한다.

 

사랑채 같은 좁은 방에서 교사 한 명에 여러 학년이 복식수업을 하는 야미도초등학교 김철규 학생은 뒷산에 자주 올랐다.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지만, 육지가 보고 싶어서였다.  그가 처음 본 육지는 희미한 ‘물 끝’.  하루는 선착장에 나갔다가 배에서 내리는 중학교 교복 차림의 선배를 만난다.  순간 밀려오는 슬픔과 부러움을 참을 수 없어 뒷산에 올라 ‘나도 물 끝으로 나가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의 소망은 얼마 후 현실로 나타났다.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를 따라 꿈에도 그리던 육지, 군산의 중학교에 입학한 것.

 

군산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성장한 김철규의 꿈은 법조인.  그는 꿈을 펼치고자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정교사로 학비를 충당하며 공부에 전념하던 시기에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상 반대 데모가 끊이지 않았던 것.  이름 하여 6·3사태. 1964년 6월 3일 대통령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무력을 동원하여 진압한 사건이다.  “지금도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추억이에요.  데모를 주도하다 법대 학장실로 끌려가 감금을 당했고, 무력진압을 피해 어느 집 지붕 위로 올라갔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지요.  거리시위와 각 대학 대표들이 고려대에 모여 대학에 병력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규탄대회도 열었어요.  돌이켜보면 굴욕적인 외교 감행 저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젊은 지성들의 뜨거웠던 외침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언론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던 6·8 부정선거

김철규는 대학 시절 중학교 은사 소개로 김판술(1909-2009) 전 의원을 만난다.  제2공화국 시절 보사부 장관(1960)을 지낸 김 전 의원을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정치에 입문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1967년 6·8총선을 몇 개월 앞둔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된다.  김 전 의원이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 김철규를 눈여겨봤던 것.  “급하게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곳은 화신백화점 2층 다방이었어요.  신민당 군산·옥구지역 후보였던 김판술 선생이 제 손을 잡으며 ‘자네 힘이 필요하네, 도와주게!’ 하는 겁니다.  이미 밖에는 지프 한 대가 대기하고 있고…….. 놀랐죠.  그 길로 양일동씨 사촌 동생(양소자)과 함께 군산으로 내려와 중앙로 이치과 골목 함양여관에 짐을 풀고 선거를 도왔습니다.  상대는 공화당 차형근 후보.  부정선거가 횡행하던 시절이어서 벅차게 느껴졌으나 온 힘을 다해 선거에 임했어요.”

 

야당탄압이 극심하던 때여서 운신하기가 어려웠다.  항상 감시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다.  주로 야밤에 마을을 드나드는가 하면 차를 동구 밖 멀리 세워놓고 주민을 만났다.  악전고투의 결과는 근소한 차의 패배.  현금과 고무신·밀가루를 뿌리는 것으로도 불안을 느낀 상대 후보가 엄청난 숫자의 유령유권자를 만들었던 것.  결국 밀가루 포대와 고무신을 내걸고 규탄대회를 여는 신민당 군산지구당사에 경찰이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신민당은 차형근 당선자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고, 청년 김철규는 대법원으로 소송하는 투표함 호송 책임자가 되어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놀란 공화당은 당선자 차형근을 당에서 제명하기에 이른다.   진실과 정의가 사라진 6·8 부정선거는 정도(正道)를 걸으려는 청년 김철규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다.  동시에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의지가 싹트기 시작, 1968년 전북일보 기자로 입사한다.

 

사회부 기자를 거쳐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며 수많은 사회 현상을 눈으로 확인한 김철규.  그는 1990년 23년의 언론인 생활을 마무리하고, 1991년 옥구 제1선거구에 출마 70%에 이르는 득표율로 제4대 도의회에 입성한다.  의회 출범과 함께 시행된 의장 선출 선거에서 52명 중 43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의장직을 맡아 내규 및 조례를 개·제정하는 등 기초와 골격을 다지며 사실상 초대 의장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실한 글쓰기는 자유와 평화, 행복을 가져옵니다

기자 시절(1978년) 새만금사업 관련 기사를 처음 연재했고, 훗날 도 의장이 되어 기공식에 참석했던 김철규.  그는 군산 시장이 되어 애초 구상을 실현하고자 출마를 결심하고 4회에 걸쳐 경선에 참여하여 세 번 실패, 한 번 성공하여 2001년 본선에 진출했으나 분패한다.  그 후 금융결제원 상임감사와 군산신문 대표이사를 역임하면서 정치 틀에서 벗어난다.  아쉬움에 2010년 지방선거 때도 군산 시장에 도전장을 냈으나 마음을 바꿔 정계 은퇴를 선언, 지금은 군산뉴스 발행인 겸 대표이사로 후배 언론인들을 돕고 있다.  올해 나이 일흔셋인 김 대표와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맥군_ 지난 1월 30일 시내 한 호텔에서 많은 내·외빈의 축하 속에 군산뉴스 대표이사 취임식과 함께 칼럼집 [구름이 짓는 흔적] 출판기념회가 열렸는데,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글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많지만, 힘이 다할 때까지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인생도 정치도 무상해요.  오직 남는 것은 역사뿐입니다.  역사의 변천과 진실한 글쓰기는 서로 공통점을 갖기 마련이며 자유와 평화, 행복을 가져옵니다.

 

맥군_ 언제, 무슨 계기로 기자가 되려고 마음에 두셨는지요?

1967년 6·8 부정선거는 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정의감으로 사회에 만연한 허상과 모순, 비리 등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야겠다는 각오로 언론계에 뛰어들었죠.  돌이켜 생각하면 정치계 입문을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맥군_ 기자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저는 초보기자 시절 ‘불의를 보고 외면하지 말자’, ‘약한 자의 편에 서자’, ‘그늘진 곳을 찾아가자’는 수칙 세 가지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 모순덩어리인 사회의 실상을 체험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각종 사고 현장을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사건 현장(이리역 폭발사고)에서 썩은 시체도 많이 보았고, 울음바다가 된 유족들 속에서 사상자의 앨범을 뒤적이는 비정함도, 비리로 물러나는 공직자 앞에서 취재수첩을 꺼내 드는 언짢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맥군_ 기자에서 논설위원까지 23년의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전북도의회 의장까지 지내셨습니다.  돌아보면 소회가 남다를 것으로 사료되는데요?

한마디로 도전하고 응전하는 삶이었지요.  특히 5월이 가까워지니까 악몽처럼 떠오르는데요.  1980년 5월 한국기자협회 공동대표위원으로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전남도청 기자실에서 진상을 파악하고, 상무대에 들어가 즐비하게 안치된 시체들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겁 없이 총구를 들이댔으며, 누가 누구한테 처참하게 죽어갔는지 처연함에 도무지 입이 벌어지지 않았어요.

 

맥군_ 1990년 정치에 입문, 2010년 은퇴하셨으니 정치인 생활도 20년이 됩니다.  짧지 않은 세월인데요. 은퇴하게 된 특별한 배경이라도 있는지요?

군산 시장 출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이가 너무 많음을 자각했어요.  이제 후진에게 물려주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자, 단체장만큼은 나이가 많아서는 안 된다는 세 가지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단을 내렸죠.  누구보다 내가 실천을 통해 본이 되게 하는 것이 최소한 군산의 발전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맥군_ 마지막으로 매거진군산에 전하고 싶은 말은?

인물잡지 매거진군산 애독자 처지에서 창간 2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렇게 질 높은 잡지가 군산에서 매월 발행되고 있다는 자체가 자랑스러워요.  더욱 노력하고 정진해서 복잡한 사회생활에 몸과 마음이 피곤해진 많은 시민이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이자 사랑방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김철규 대표는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1965년)하고, 전북일보 편집부국장, 논설위원(1968~1990), 제15대 대통령선거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 중앙당 유세위원회 부위원장(1997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중앙선대위 유세·연수본부 부위원장(2002년), 금융결제원 상임감사(2003년~2006년) 등을 지냈으며 2010년 3월 정계를 은퇴하고, 지금은 <군산뉴스> 대표이사 겸 발행인으로 후배 언론인들을 돕고 있다.  '기자수첩' <구름이 짓는 흔적> 외 여섯 권의 칼럼, 논문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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