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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인화(文人畵)와 이 시대의 진정한 예인(藝人) 石香 정의주(鄭義洲)
글 : 오성렬 / poi3275@naver.com
2013.03.01 13:44:1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전주시 전동 한옥마을 인근을 지나다 보면 도로변 어느 건물 3층에 석향문인화실이라는 자그마한 간판이 눈에 띈다. 화실에 들어서면 물감의 채색 향과 그윽한 묵향이 묻어나는 크고 작은 작품들로 벽면은 여백이 없을 정도이고 여기 저기 쌓아둔 엄청난 양의 습작 화선지 뭉치들, 그리고 연륜이 지긋해 보이는 제자 몇 분이서 열심히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들을 지도하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동안(童顔)이어서 연로한 노화백을 상상했던 필자는 왠지 의표를 찔린 꼴이 되고 말았다. 이곳의 주인으로서 그림을 지도하고 있는 이는 문인화가 정의주(鄭義洲/50)화백. 그는 현재 대한민국 미술대전(國展) 초대작가이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실력과 경륜을 인정받는 문인화 대가의 반열에 들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군산시 임피면 서원리. 일찍이 조부(雲汀 정복연)께서는 일제 시절 이미 10대 때 개성으로 그림 유학을 떠나 20세에 들어서는 문인화에 있어 당대 최고 수준의 실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난 소질을 보였는데 임피중, 대성중학교에서 평생을 미술교사로 봉직한 인물이다. 이후 후손 중에도 자연히 그러한 가풍과 소질의 영향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바로 막내아들이자 정의주에게는 숙부가 되는 남천(南泉) 정연교 화백이다. 남천 선생의 문인화는 특히 전북 사군자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기도 하며 현재까지 국전 심사 위원이자 예문회 문인화분과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등 지방보다는 국내 고서화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서울의 인사동 화랑가에서 더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서 화단에서는 당대 최고 수준의 작가로 위상을 떨치는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조부와 숙부의 유전자는 그대로 오늘날의 정의주에게 이어졌다. 정의주는 어려서부터 조부님에게는 더 없이 귀여운 손자이자 제자이기도 했다. 조부님은 정의주 뿐만이 아니고 한 동네에 사는 사촌들까지 모두 모아놓고 틈틈이 습자지에 붓글씨 쓰는 법을 가르쳤다. 따라서 서화에 뛰어난 이러한 조부님을 보면서 자라는 동안 정연교도 차차 내재된 소질이 계발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는데 군산동고 졸업 후 원광대 미대를 거쳐 대학원에 진학하는 동안 한국화를 전공, 1학년 때부터 꾸준히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군산 명산동에서 약 7년 정도 입시미술학원을 열기도 했는데 본격적으로 문인화를 더 공부하고 싶은 열망을 참을 수 없어 30세 되던 해 나운동에 거주 하시던 숙부인 남천 선생 문하로 들어가 이후 10년 동안 사군자와 문인화 공부에 매달린다. 제자로서 남천 선생의 지도를 받는 동안 그는 한 번 붓을 잡으면 자신의 운필이 마음에 들 때까지 밤을 새워서라도 연습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각종 문인화전에서 그의 출품작들이 수상을 거듭함에 따라 자신만의 화풍과 작품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입지도 넓혀져 갔다. 그는 2002년도 예술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전주에 화실을 열게 되며 이후 2003년도에는 국전초대작가가 된 것을 시작으로 2005년도에는 살던 집도 전주로 이사하였는데 현재까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작품 활동과 더불어 후학을 지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최근 화풍은 화조(花鳥)를 주제로 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린 시절에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는 인쇄된 카드 대신 자신이 직접 화조를 그려 만든 성탄절 카드를 보내곤 했을 정도로 평소 꽃과 새를 그리는 것에 재미를 느꼈고 그만큼 소질도 뛰어났는데 지금의 수준과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인화에 대한 천착(穿鑿)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사실 문인화는 조선 시기만 해도 전문 화가가 아닌 일반 사대부나 학자들 사이에서 취미로 그린 그림을 일컫는 말로서(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등) 전문 화가의 그림과는 분명한 차별성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한국 미술의 독자적 분야로서 확고한 영역을 굳히게 되었는데 이는 조부 때부터 맥을 이어 온 그의 집안의 영향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는 문인화가 보통의 회화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분야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색의 덧칠이 가능한 반면 문인화는 단 한 번의 붓놀림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만큼 더 어려워 그는 이를 1회성 예술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느끼기에도 그야말로 찰나의 예술인 듯싶다. 일필휘지로 내리 긋는 선의 삐침과 농담(濃淡)의 조화는 단 한 번의 수정도 용납되지 않는 순간의 손놀림이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인화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엄청난 숙련을 요하는 분야로서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대개 문인화를 배우는 교범 중의 하나로 중국 청나라 초기 간행된 개자원(芥子園)화보집을 꼽는데, 그는 평소 작품의 대상을 떠 올릴 때 이것 말고도 때로 그가 직접 찍은 사진, 또는 많은 작가들의 전시회 등을 보며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의 작품들은 사진에서 보듯 낙관(落款)이나 화제(畵題)가 모두 한글이다. 흔히 일반적으로 서화에서는 한자를 쓰는 것이 통례이나 최근엔 한글로 바뀌는 추세로서 그 역시도 한글을 고집하는 것은 언젠가 외국 전시회 때 한자로 된 화제를 본 외국인들이 중국 작품으로 오해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미술 문화가 우리 것 보다는 주류 자리를 서양화에 내 준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실제로 서양에 나가 보면 그들은 동양적인 미술에 훨씬 더 신비감과 호감을 가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벨기에 등지에서는 수시로 전시회도 열 정도로 관심을 나타내고 있어 그는 우리 미술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개인전을 갖지 않는 작가로도 알려졌다. 이유를 물으니 마치 작품을 팔기위한 행사로 오인 받는 것도 싫고 또 워낙이 마케팅 방면으로는 관심도 소질도 없어서라며 멋쩍은 웃음을 보인다. 대신 그는 쉼 없는 작품 활동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각종 초대 그룹전 등을 통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정열을 쏟고 있다. 

 

그의 화실에서 만난 어느 노령의 여성은 금년 83세로서 평소 취미로 서예를 배우다다 약 3년 전부터 이곳에서 문인화를 수련하고 있다는데 그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피부도 곱고 젊어 보여 이유를 물었더니 모든 시름과 잡념을 떨치고 수련에 몰입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고 그것이 결국 노화를 늦추는 비결인 성 싶다는 말을 들려준다. 정 화백은 주 3일 군산문화센터와 여성회관에서 약 70여명의 수강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있는데 1999년도부터 군산 KBS에서 시작했던 강의가 인연이 된 셈이다. 

 

또한 현재 전북대 평생교육원에도 주 1회 강의를 나가고 있어 그의 화실에서 수련 중인 제자들까지 합치면 100여명의 제자를 지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퇴직자 등 시간이 여유로워진 사람들에게 취미 활동으로 문인화를 적극 추천하고 있다. 동적인 취미 활동도 중요하지만 문인화를 통한 정신 수양과 작품 완성 뒤 인정받았을 때의 성취감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질을 갈고 닦아 실력이 뛰어나면 전문작가로 진출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어 자아 충족과 더불어 평생의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은 석향의 미술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석향의 도록(圖錄)에서 미술평론가 김선태 씨의 말을 인용해 본다. “석향의 그림이 완전히 직관에 기초를 둔 문인화의 한 전통과 직결되는 것은 명확하다. 일필휘지의 호방한 필법의 효과가 형상을 압도하고 두서너 번 붓을 휘두른 선화(禪畵)같은 그림들은 기교 없는 묵적의 지고의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특히 붓을 운용하는 속도감과 상하로 누르고 떼는 강약의 운필은 가야금 줄의 무쌍한 변화처럼 석향 그림의 기본을 이루는 필법이다. 석향은 서예에서 먼저 일가를 이루고 그로부터 일어나는 조형적인 매력에 이끌려 오늘에 이르렀으며 문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여백의 미를 살려주면서 자신만의 미의식 및 조형감각에 의해 재배치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처럼 대상의 이미지를 요약하고 압축하는 데는 필경 자연에 대한 깊은 응시와 사색이 필요하며 이를 통하여 대상에 함축된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시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그림의 이야기 거리와 내적 정서가 분출되는 것일 게다”  

 

약력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과 졸(88)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원 졸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초대작가(미협)

대한민국서도대전 초대작가(서도협)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미협)

전북서도대전     “   (서도협)

한.중,일 교류전(오사카 한국문화원)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초대작가전

한국 서예 청년작가 15주년 기념전

남천 사군자 회원전 문자문인화 그림문인화전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 소한도 출품 

월간 아시아의 예술(네델란드 학술지) 석향 지상전

제 1회 한국 서화아트페어전(예술의 전당)

한국서예 뉴밀레니엄전(  “  )

영,호남 교류전, 한국문인화연구회전

동풍회 등 그룹초대 공모전 등 100여회 출품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심사위원

대한민국서도대전 심사위원

전북미술대전 심사/운영위원

서울미술대전 심사위원

경기   “        ”

단원   “        ”

전남, 강원, 광주, 경인, 안견, 서예한마당 심사위원 

전국서예백일장 외 각종 서예, 미술대전 50여회 심사위원 역임

 

< 수상 >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우수상(22회)

전북미술대전 우수상(96)

월간서예대전 우수상(99)

강암서예대전 최우수상(2회)

한국서예 청년작가전 선발 전시(98)

 

석향 정의주 문인화실

전주시 완산구 전동 24-1 파고다 한지상사 3F

063) 28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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