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11월 군산으로 이전한 국가핵융합연구소의 ‘플라즈마기술연구센터’(오식도동 소재)는 선진 과학 기술의 산실로서 많은 연구 인력이 투입되어 있다. 이곳 연구원의 거의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들 사이로 이채롭게도 여성 과학자 한 명이 눈에 띈다. 송미영(宋美英/36)박사다. 이채롭다고 한 것은 공과대학을 기피하는 요즘의 세태에서 더구나 여성이 어렵고 골치 아파보이는 물리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필자는 갑자기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왜 과학자가 되고자 했을까?
무남독녀 외동딸로서 그녀가 태어난 곳은 서울. 5살 때 인천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인천에서 초, 중, 고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동급생 중 유일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부터 유독 과학에 재미를 느껴 서클 활동도 중, 고 6년 동안 과학부장 자리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였고 따라서 이런 저런 과학 경진 대회에서 입상도 여러 번 했을 정도로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심 장래 과학자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고교 진학을 앞두고 잠깐 갈등의 시기를 겪기도 했는데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부모님은 대학보다는 여상에 진학하여 일찍 취업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포부를 꺾지는 못해서 그녀는 끝내 대학에 진학하여 물리학자의 길을 내딛게 되며 대학 졸업 후 유망한 기업으로부터 취업 제의도 받았지만 가정 형편으로만 보면 당장 수입이 되는 일을 해야만 된다는 절박한 현실과 필요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왕성한 학구열 사이에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대학원을 택하여 보다 심도 있는 학문에 정진하기에 이른다. 대학원 시절 박사 과정 중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국가핵융합연구소(NFRI)에서 부직 학생으로 근무할 때에는 데이터 수집, 분류 등 업무를 익히면서 차근차근 경험과 실력도 쌓아갔다.
이후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NIFS(일본 핵융합연구소)에서 2년간 인턴 직으로 근무하기도 했는데 재계약 시점에 국가핵융합연구소에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귀국하였다. 지금의 남편도 같은 직장에서 만난 동료로서 2003년 결혼과 동시에 살던 집도 대전으로 이주하였다. 대전 근무 시에는 선배 과학자로서 약 4년 정도 지역 여대생들과의 멘토링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를 통하여 과학은 어렵다는 선입관 내지는 과학으로는 돈을 벌 수 없을 것이라는 그릇된 편견 등 너무 현실적인 생각보다는 과학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긍지와 보람, 그리고 과학은 똑똑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99%의 평범한 사람들이 공부해서 뛰어난 1%의 사람들의 연구 성과나 업적을 완성해내는 것임을 강조했는데 무릇 어떤 학문이든 남들이 무관심하거나 기피하는 분야를 택하는 것이 먼 장래로 볼 때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며 특히 과학의 경우 자신의 성취감을 떠나 국가 경쟁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일원이 된다는 자부심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현실적인 수입 면만 따지면 민간 기업체에 취업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으나 그 경우 폭 넓은 연구보다는 기업 측에서 요구하는 일정 분야에 한정된 연구, 그것도 정해진 기간 내에 성과를 내놓아야 된다는 부담감 등이 작용할 수밖에 없어 그보다는 국가 연구소에서 개인적으로 평소 관심이 가는 여러 분야의 연구를 아무런 제약 없이 시도 할 수 있다는 점을 그녀는 더 매력으로 꼽고 있다.
그녀는 핵융합연구소의 물성연구팀 소속으로서 각기 전공이 다른 박사 5명, 석사 2명, 전산 통계를 담당하는 여성 기술직 1명 등 9명으로 구성된 조직의 팀장을 맡고 있으며 플라즈마의 원자, 분자, 전자의 상호 작용에 관한 원리 등 가장 기본적인 기초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확보된 기술은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상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도록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해마다 2~3회 정도 해외 과학자를 초빙, 장, 단기 협력 연구와 병행하여 국내외 과학자들과 E-mail을 통하여 수시로 관련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더욱 폭 넓고 깊이 있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소속된 물성데이터 팀이 연구소의 일개 부서로서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Network 상에서 독립적 글로벌 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는데 기회가 되면 틈틈이 지역의 중, 고교 학생들에게 강의를 통하여 과학에 대한 이해를 도움으로써 이공계 지원의 문을 넓히고 싶다는 말도 덧붙인다.
자그마한 체구에 수줍음을 띄는 얼굴. 하지만 누구보다 과학자로서의 자부심이 커 보이는 그녀는 같은 직장에 재직 중인 남편(김대철/42/요소기술연구팀 선임연구원)과 사이에 7세 된 아들을 두고 있는데 둘째도 다음 달 설 안으로 태어날 예정이어서 최근 대전에서 군산 나운동으로 이사한 친정 부모님까지 한꺼번에 인구가 6명이 증가하게 되어 군산의 인구 정책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공로자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이제 불과 두 달 남짓 거주 중인 군산의 인상을 묻자 대체로 도로가 좁고 불법 주정차를 비롯한 양보 없는 교통질서로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는 것과 반면에 식당에서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후한 인심이 느껴져 좋았다는 말을 들려주는데 전자의 경우 같은 지역민으로서 교통 법규에 대한 시민의식이 좀 더 선진화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부끄러움도 느껴진다. 또한 군산은 태어나 처음 와 본 도시로서 일제 시절 수탈의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지역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던 게 사실인데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천천히 지역 탐방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인심, 정서 등을 익혀 나가겠다고 말한다. 아무쪼록 이제는 군산시민의 일원이 된 그녀의 연구 실적이 많은 성과를 거둬 우리 군산이 국내 과학 발전의 메카로 새롭게 위상을 정립함으로써 새로운 성장 동력을 견인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아울러 장래 과학자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멋진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