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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나의 인생_미술 외길 수채화가 신수연
글 : 오성렬(자유기고가) / poi3275@naver.com
2012.11.01 15:36:3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인간의 행복에 대한 관점은 전혀 주관적이어서 이에 대한 정의(定義)도 제각각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것이 여러 가지 조건이나 한계, 그리고 이런저런 제약으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어서 당장의 처지나 생활에 쫓겨 소질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듯싶은데 반면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자아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하고 싶은 일’ 은 곧 ‘타고난 재능이나 취미’ 그리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라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하거니와 자신이 즐기는 일을 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례는 물론 다른 분야도 많겠으나 대체로 문화예술분야를 들 수 있지 않나 한다.

 

수채화가 신수연(辛受姸/52)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녀의 고향은 익산 춘포면.  한약방을 하던 조부와 한학자로서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던 부친을 둔 가정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농협 조합장 직을 20년 넘게 재임할 정도로 가정 형편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그녀는 익산에서 여고를 마치고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였는데 당시만 해도 유교적 인습 탓인지 자녀의 미술 전공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세태 속에서도 왠지 그녀의 부친은 자녀들의 미술 공부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평소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조차도 나무라던 엄격한 부친이었기에 의외의 면이기도 하였지만 평소 부친 자신도 취미 삼아 그림을 즐겼던 분이라서 그랬을 것으로 이해되었다.

 

 


 

학창시절만 해도 그녀의 삶은 순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26세 되던 해, 뜻밖에도 건강하던 부친께서 급작스런 병환으로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었다.  부친의 병간호는 모친과 함께 집안의 막내로서 미혼인 그녀의 몫이 되고 말았는데 몇 년 동안 병간호에 매달리느라 자연스레 혼기를 놓치게 되었고 무엇보다 전공분야를 찾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30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갔다.  처음 시작한 일은 한복 염색이었다.  그녀의 일터는 강남 압구정동으로서 그 일대는 하나같이 값비싼 고급의상실들의 경연장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한복이나 드레스 등도 일상적 수준의 것이 아니라 대체로 디자이너의 이름을 내 건 작품으로서 염색이나 도안 등도 보통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물론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것이 도움이 되기는 하였지만 막상 실생활에서 접해보니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6 년여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실력이 향상되면서 업계에 차차 그녀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어느 순간 매너리즘(Mannerism)도 같이 찾아 왔다.  그것은 마음 속 심연의 파문처럼 걷잡을 수 없는 순수미술에 대한 강렬한 욕구였다. 

 

그녀는 6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접고 군산으로 내려왔다.  사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그녀의 언니 둘도 수채화가로서 활동 중이었는데 군산에 거주하는 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병석에 계시던 부친께서도 그 즈음 별세하셨던 터라 응어리진 마음의 짐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나운동사무소 3층에서의 이희완 화백 수채화전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이화백의 수채화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려한 색채의 조화는 순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것이 오늘의 수채화가(畵家) 신수연으로의 변신을 가져다주는 전환점이 되었으니 돌이켜보면 그날의 만남은 운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화백의 제자가 되어 화실에 나가 기초부터 수채화의 기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평소 동경했던 분야라선지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따라서 남들보다 열심히 정진했다. 그렇게 8년의 수련에 매달린 2004년도 어느 날 이화백으로부터 도전(道展) 공모전에 응모해볼 것을 제의받게 된다. 첫 출품이라서 그녀는 다소 설레기도 하였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입선’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자신감이 배가되어 더욱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데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공모전에 약 20여회 출품하여 다수의 입선과 특선 3회라는 경력을 쌓게 된다.

 

그녀는 꽃을 즐겨 그린다. 그것은 대체로 여류화가 공통의 경향이기도 한데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 특유의 심성이 그대로 화폭에 드러나는 것일 게다. 100호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6개월 이상 소요되기도 하는데 이젤 앞에 앉아 그림에 몰두하는 순간만은 일체의 잡념이 다 스러지고 그야말로 무아의 세계로 빠져들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붓 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꽃송이는 그대로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며 나비는 금방이라도 화폭 밖으로 날아 나올 것만 같다.  그녀는 지금까지 주로 실내에서 작업을 하였지만 앞으로는 야외 스케치도 많이 나갈 예정이다.  또한 주제도 지금까지 즐겨 그렸던 장미나 국화 말고도 자연풍경이나 무리 진 해바라기도 화폭에 담아보고 싶다.  그녀의 화풍은 최근 구상(具象)에서 반구상(半具象)으로의 경계점을 보여주는데 강렬한듯하면서도 그 내면에는 은은한 관조와 시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승인 이희완 화백은 지난 16년 동안 지켜본 제자로서의 그녀를 이렇게 들려준다.  “한마디로 노력파지요. 그림은 지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그리는 것인데 그 부분이 특히 뛰어납니다. 처음 미술에 입문하면 대체로 대상을 모방하거나 보이는 그대로 베끼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어 발전이 더딘데 신수연 씨는 어느덧 자신만의 화풍을 구사하고 있어요. 저는 평소 제자들 모두가 각기 다른 저마다의 작품세계를 갖도록 지도하고 있는데 그 가르침을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요. 거기다 성격도 섬세한 편이라서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현재 대한민국 수채화 작가협회 회원이자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서 수송초등학교에서 4년째 미술지도를 하고 있기도 하며 퇴근 후에는 거의 화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동안 그린 그림만도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실제로 그녀의 집 거실 벽에는 멋스런 그녀의 작품들이 집안의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었고 한 쪽 방에는 크고 작은 자신의 그림들로 가득 차 있어 평소 그녀가 얼마만큼 작품에 몰두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면서 다소 뜬금없이 결혼은 안 할 거냐고 물었더니 “글쎄요, 제 나이에 결혼이 쉽겠어요? 이젠 포기하고 산답니다. 대신 저는 그림들과 살고 있잖아요, 하지만 모르죠, 생각지도 않았던 인연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날지...” 웃음과 함께 들려준 이 말에서 알 듯 모를 듯 여운이 느껴지는 건 필자만의 오버가 아닐지 모르겠다. 

이희완 수채화갤러리 010-6620-6357

군산시 미룡동 453 (성심빌딩 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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