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2월 어느 날 고향집 골목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사진은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1974년 겨울 어느 날 필자가 코흘리개 시절 뛰놀던 동네 골목 풍경으로, 왼쪽과 정면으로 보이는 벽돌 건물은 일제가 삼남지방의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 1932년 지은 가등정미소(加藤精米所) 쌀창고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세월의 변화에서 오는 재미난 일을 종종 경험한다. 어렸을 때 어디에서 살았느냐고 물어올 때 상대가 군산 토박이일지라도 30~40대는 ‘구시장’(공설시장), 50~60대는 ‘우풍화학’이나 ‘공설운동장’, 70대 이상은 ‘아로코로 공장’(주정공장) 골목에서 살았다고 해야 얼른 알아듣기 때문이다. 가등정미소는 해방 후(1947년) 한국 주정주식회사(사장 김영구) 공장이 들어선다. 당시 한국 주정은 1960년대 초까지 필리핀 등에서 당밀(주정원료)을 수입하던 3천5백 톤급 풍양호(豊陽號)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당밀 수입이 금지되고, 원료가 고구마로 대체되면서 풍양호도 우리 눈에서 사라진다.
한국 플라스틱 군산공장 준공식에 참석해서 공장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김영구 사장은 1967년 주정공장 자리에 우풍화학을 설립한다. 한국 플라스틱이 완공되던 1960년대 후반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전용열차를 타고 참석해서 테이프를 끊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건물이 모두 헐려 공용주차장과 임시 공설시장으로 사용하다가 시장은 지난 4월 새 건물로 입주하면서 폐쇄되었다. 구 옥구군청 자리 방죽에서 발원하여, 대명동을 거쳐 째보선창으로 유입되었다는 샛강(일명 세느강)은 1970년대 중반 복개되어 주차장과 신영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뱅어가 잡히는 맑은 물이었으나 주정공장에서 내보내는 짙은 커피색깔의 폐수로 물고기는 씨가 말라버렸다. 창고 아래로 흐르는 갯고랑은 장마 때 미꾸라지가 발견될 정도로 물이 깨끗했다. 마음 좋은 보일러실 아저씨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뜨거운 물이 내주어 소문난 빨래터가 되기도 했다. 한때는 오른쪽 창고와 왼쪽 창고 사이 공간을 째보선창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이용해서 사람으로 북적대기도 했다.
가등정미소 쌀 창고 자리는 신군부의 총칼에 충장로가 피로 물들었던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화려한 휴가>(2007년) 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다. 중동 사거리에서 째보선창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동화택시 회사를 ‘광주 택시 합자회사’ 간판으로 바꿔 촬영했던 것. 변전소로 사용했던 창고 옆 빈터는 한국전쟁(1950) 때 폭격으로 파손된 크고 작은 기계들이 방치되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어른들은 위험하다며 출입을 못 하게 했지만, 잡초가 우거지고 나무가 많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른들 말을 종합하면 가등정미소 기계실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일제가 쌀을 실어 나르던 철로. 경비초소가 세워져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신작로를 경계로 공설운동장(일출운동장)과 마주 보고 있던 가등정미소는 째보선창 쪽에 후문이 있고, 정문은 신작로 쪽에 있었다. 모두 대형 트럭(GMC)이 드나들 정도로 폭이 넓었고, 담에는 100M 간격으로 경비초소가 있었다. 사무실 건물을 끼고 있던 옆문(지금의 주차장 입구)에는 쌀과 나락을 실어 나르기 위한 철로가 가설되어 있었다.
군인들의 외마디 고함이 들리기도했던 골목
부대에서 탈영해서 골목으로 도망쳤다가 헌병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맞는 군인이 내지르는 외마디가 오금을 저리게 했던 때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작로 건너 공설운동장에 보충연대(논산훈련소 전신)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부분 마취만 하고 맹장수술을 했던 필자는 당시 보충연대 군의관이 집도해서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지금의 중앙초등학교에도 군부대가 주둔해서 군악대가 오갈 때마다 시가행진을 벌였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U자 모양의 밸브를 피스톤처럼 넣었다 뺐다 하는 트롬본에 반해 배고픈 줄 모르고 군악대를 따라다녔던 추억도 새롭다. 부대 정문 위병 아저씨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놀던 추억들도 시나브로 떠오른다. 부대가 논산으로 이동할 때는 동네 사람들은 물론 학생들까지 군산역으로 나와 환송해주었다. 문간방에 자취하면서 건빵을 나눠주던 부사관(중사) 아저씨 모습도 가물가물하게 그려지고.
맨 윗 사진과 비슷한 위치에서 2007년 찍은 골목. 길도 닦고 건물도 단장됐으나 쓸쓸하게 느껴진다.
지금도 "여~엉태야, 밥 묵으라!" 소리 들리는 것 같아
골목에서 함께 뛰놀던 아이들만 20여 명. 그래서 아이들 부르는 소리와 울음소리, 어른들 웃음소리가 뒤범벅되어 항상 시끌벅적했다. 바닥은 항상 지저분하고 어지러웠다. 길례 아버지와 채 씨 할아버지가 나무장수를 해서 소나무, 볏짚, 합판 잡목 등 찌꺼기가 나뒹굴었다. 내가 살던 집은 밖으로 튀어나온 굴뚝이 두 개였다. 벽돌과 황토로 만든 굴뚝은 항상 온기가 돌아 겨울에는 거지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벙거지를 쓴 거지 남편이 얻어온 음식을 아내에게 권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기억도 새롭다. 무척 다정하게 보였는데. 판자 울타리들이 서로 껴안듯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이웃하고 있던 지붕들은 여러 모양의 조개껍데기들이 어깨동무하듯 이어져 있었다. 음력 초사흘에 고사만 지내도 떡을 집집이 나눠 먹던 따뜻한 골목 동네. 그 푸근하고 아늑했던 골목 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려진다.
짝을 찾는 뒷산의 비둘기들과 논두렁의 개구리들이 요란하게 울어대는 밤이다. 해질녘이면 골목 모퉁이에서 만물상 가게를 하던 ‘영태 엄니’가 저녁밥을 해놓고 골목으로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외치던 “여~엉태야, 밥 묵으라!”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