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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조국혁신당 군산지역위원장의 실패와 성공 이야기
글 : 채명룡 / ml7614@naver.com
2025.04.30 10:26:4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공부를 못할 바에는 차라리 돈이나 벌러 갈까.”

1982년 2월의 군산고(통합 55회) 졸업식장. 새 출발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도전이다. 

그러나 졸업이 따뜻한 봄날만을 기약하는 건 아니었다. 

힘겹게 일을 나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한다는 절박감에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청년 이주현.

차가운 바람이 기웃거리는 겨울의 끄트머리에 서서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열아홉 청년이었던 그는 졸업식 날 밤 서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교복을 벗자마자 얼른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공부는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마음 먹었고요.”  

그가 고향 군산을 떠나 외롭고 힘들었던 40년 동안의 외출을 하게 된 출발점이 바로 군산고 졸업식 날이었다. 

영등포역에서의 하룻밤....그리고 촌놈의 방황. 

그리고 도전과 실패를 거치면서 꿈을 꾸었고, 오늘날 고졸 공직자로써의 작은 성공 신화가 만들어졌다.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이주현의 집안은 나포면 숯골이었다. 그가 어릴 때 시내로 나와 창성동에서 흥남동으로 말랭이를 찾아 이사를 거듭했다. 

집이 멀어졌어도 그 아이는 전학보다 먼 길을 걸어서 걸어서 학교에 갔다. 중앙초(67회) 졸업장은 그의 두 발이 만든 소중한 추억이다. 

“어머니는 늘 힘겹게 일했어요. 2남1녀를 키우느라 집안을 돌볼 겨를도 없었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가기로 한 날, 동생들을 전주의 외가로 유학 아닌 유학을 보내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밤새 잠을 못 이루셨지요.”

이 때부터 이주현의 가슴에는 맏이로써의 책임감이 굳게 새겨졌다. 

공장 생활을 전전하며 틈틈이 공부했다. 어려운 환경 이었지만 끊임없이 도전하여 여러 곳의 시험에 합격하였다. 어머니는 그런 그를 늘 응원해 주셨다. 

무상한 세월이 흘러갔다. 

지난 2024년 여름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그의 사모곡은 멈춰졌다. 

어머니를 떠 올리면 눈가부터 촉촉해지는 이주현. 그는 ‘천생 효자’였다.  

 


 

‘고졸 7급’, 꿈을 이루어 낸 이주현 

 

밤차로 도착한 새벽, 영등포의 바람은 차가웠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시작할지 암담했다.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이 구로동의 사출공장이었다. 숙식 제공 12시간 맞교대에 월급은 10만원 남짓이었다. 

힘들었지만 성공하기 전까지 고향에 내려가지 않겠노라 독하게 마음 먹었다.

“문득 문득 ‘이게 내가 가야 할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살길은 무엇일까 고민했죠.”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작될 때 송파지역의료보험 노조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애틋한 마음을 품었던 여성도 여기에서 만났다. 그러나 인연이 아니었다.

‘나를 던져 주변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신념처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부위원장이었기에 옷을 벗어야만 했다. 

충무로에서 잠깐 인쇄업을 하다 포기하고 공직에 도전하기로 작심했다. 

“처음에 세무직 9급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터덜터덜 노량진 고시학원에 찾아갔는데, 7급 시험 안내문이 눈에 띄더라고요. 9과목에 처음 접하는 법과목들  ‘바위에 돌던지기’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날부터 1년 동안 죽을 힘을 다했다. 시험 과목을 수십번씩 읽고 또 읽었다.

9급 낙방에 실망하지 않고, 7급에 도전하는 그의 돈키호테같은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결국 그는 93년도 총무처 시행 국가직 7급 시험에 보기 좋게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총무처 발령 대기 기간 중에 서울시 세무직 9급 시험에 합격해서 관악구청에서 1년 반을 근무했다. 

7급 합격증을 받아든지 2년이 지난 1995년 8월 3일, 기다리던 조달청 발령을 받았다. 

9급 공무원 낙방 - 7급 공무원 합격 - 다시 9급 공무원 합격 - 7급 공무원 ‘발령’이라는 고졸 성공 신화는 이렇게 쓰여졌다. 

  

업무 스트레스를 달리기로 풀자 인생이 바뀌었다.

 

98년도에 조달청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전했다. 국가직 7급 공무원 중에서 이주현 처럼 고졸 학력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정도로 극 소수였다.

공식적인 차별은 없었으나 4년제 대졸자들이 대부분인 7급 공직 사회에서 고졸이 받는 압박은 상상 이상이었다.

심장이 터질듯한 스트레스를 풀길이 없어 그는 무작정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100미터도 못 뛰었으나 뛰고 또 뛰다 보니 5킬로, 10킬로를 넘어 하프코스에 도전하게 되었다.

드디어 2006년 중앙일보 마라톤 대회에서 42.195킬로를 완주했다. 이후 군산~전주 마라톤 대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누구를 탓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를 풀려고 했으며, 스스로를 단련하여 왔던 그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마라톤 도전기이다. 

이런 그의 노력을 하늘이 알아주었다. 어렵게 어렵게 사무관에 승진했다.

“고졸 출신이라서 그랬는지 근무 평정도 좋게 받지 못했고, 승진에서 번번이 탈락했죠. 2010년에 논술 시험 1등으로 발탁되어서 가까스로 사무관으로 승진했어요.”

이 때 전북청에 과장으로 2년여 근무하다 다시 본청으로 복귀했다.  

2020년초에 조달청장 비서관으로 일하던 시기에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졌다. 전국민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시기였다. 

“당시 식약청의 업무를 조달청이 이관 받았거든요. 청장 비서관으로 일할 때였는데, 전국의 지방청을 돌면서 숨어 있는 마스크를 납품하도록 독려했고, 결과적으로 전국민이 안심할 수 있도록 원활히 수급해냈지요.” 

코로나 조기 종식의 숨은 공로가 있어서인지 그 해 7월에 전북지방조달청장으로 영전했다. 

전북청장으로 약 2년 6개월을 일하면서 전북지방청 최초로 연간 2조원 계약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도전을 위하여 2022년 겨울 명퇴하고 고향 군산에 돌아왔다.

 


 

암행어사 활약, 부패와 비리 ‘꼼짝마’ 

 

지난 2013년부터 2년 동안 국무총리실의 공직복무관리관실로 파견 나가 전국을 돌며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암행어사 역할을 했다. 

“감찰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죠. 누군가 피해를 보는 공직자도 나오기 마련이었고요. 부정, 부패의 줄을 끊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거든요.” 

오늘 날 군산지역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일들과 언론에서 지적하는 부패와 비리 등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암행어사 역할을 했던 때를 떠올리곤 한다.

이후 조달청 본청 감사실에서 5년을 근무했고, 당시 청렴도와 부패 방지 시책을 주도하여 조달청 청렴도를 4등급에서 2등급으로 올려 놓은 주역이 바로 이주현이다.  

“오늘의 군산시가 당면한 꼴찌 수준의 ‘청렴도’ 문제는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공직자들 스스로가 평가하는 내부 청렴도가 최하 수준이라는 결과를 볼 때 군산시는 이미 중병 수준을 넘어섰다는 생각이고요.” 

무언가 바꾸어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이런 때 암행어사를 역임한 그가 무엇인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준비하는 자에게 미래가 온다

 

국무총리실 파견 생활을 할 때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일류대를 나온 행정고시 출신들이었다. 

“생각해보면, 고졸 출신 공직자는 설 자리가 없었다고 봐요. 학력 제한이나 차별이 없는 공직 세상이라고 했으나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죠.”

그래서 고향 군산에 가서 봉사를 하려면 공부도 더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야 했다. 

예전 직장에서 방통대에 입학해서 50학점 정도를 따놓았는데, 다시 복학하니 그 걸 모두 인정해 주었다. “전북청에 근무할 때가 코로나 시기였어요. 말하자면 저녁이 없는 삶이었는데, 공부하려는 사람에겐 유익한 시간이었던 셈이죠.”

계절 학기 등 2년 6개월만에 나머지 학점을 모두 이수했다. 그리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내 고향 군산 소식은 너무 슬펐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며, 바꾸어야 병이 치료된다고 생각했다. 

“고향 군산을 고치기 위해서는 공직기강 경험을 가진 내가 조금은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어렵고 힘든 고향을 변화시키는 일이 어쩌면 그의 마지막 소명으로 남지 않을까. 

 


 

독신이니 아내 리스크는 없겠죠(?) 

 

삼십대 중반까지 시험과 직장의 생존 경쟁을 치르다보니 그의 결혼 적령기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결혼을 하지 않은 게 큰 흠은 아니지만 구설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내조(안사람) 정치가 원천 봉쇄되어 있으니, ‘깨끗한 정치’의 기반은 이미 닦여진 게 아닐까요?”

열심히 살다보니 혼기를 놓쳤고, 서로에 맞는 상대를 찾지 못해서 아내를 두지 못했으니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고, 스스로를 갈고 닦으면서 깨끗한 삶을 살아온 그의 케릭터를 두고 이 사회가 냉담하기만 하랴.

그는 로또 아파트가 당첨’되는 행운도 건졌다. 2010년도에 LH 보금자리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10년 임대 후 분양 조건이었다. 

“임대로 8년을 살고 분양을 받으니까 아파트 값이 훌쩍 뛰었더라고요. 가진 것 없이 살아 온 공직자에겐 로또에 당첨된 셈이죠.”

고졸 공무원이 세찬 비바람을 헤치고 40여년 만에 고향 군산에 돌아왔으나 기다리는 건 안타까움 뿐이었다. 인구는 떠나 가는데 이렇다 할 비전도 없는 게 바로 내 고향 군산의 모습이다. 

“저는 마누라와 자식도 없으니 돈 벌려고 아등바등 할 일이 없습니다. 작은 집도 있고 연금도 나오니 검은 돈과 유착될 일도 없지요.”

가난했지만 따뜻했고, 짠내가 머물렀으나 정겹고 힘찬 도시였던 군산을 위해 그는 어떤 길을 갈까.

 

할 일을 다하면, 모든 재산을 ‘내 고향 군산’을 위해 헌납 

 

청년 시절 돈 벌기 위해 서울행 밤차에 올라탔던 이주현. 그가 40여년 만에 고향 군산에 돌아왔다. 

그리고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한 그는 마지막 반려자를 ‘내 고향 군산’이라고 생각했다. 

‘꿈을 꾸자 오늘이 만들어졌다.’는 이주현 전 전북조달청장, 

그는 거대한 벽일지라도 부딪쳤고, 안주하지 않았다. 또 상상하고 꿈을 꾸면서 그 일들을 이루어 나갔다.

“군산도 꿈을 꾸면 시민들이 바라는 방향대로 이루어 질겁니다. 지금은 아프고 힘들지만 좋은 상상을 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늘상 꿈을 꾸지만 그는 다른 욕심은 없다. 이주현의 ‘진심’을 믿어주면 그나마 희망이 좀더 생기지 않을까.

“제가 구상하는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미련없이 전 재산을 군산의 장학기금으로 내놓을 생각입니다.” 

빈 손으로 돌아가는 삶을 제가 실천할 거라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깊고 멀리 울려퍼졌다.

 

이주현 

조국혁신당 군산지역위원장

군산경제연구소장(전 전북지방조달청장)

010-8726-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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