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그매를 아시나요? 옥산면 금성리에서 으뜸가는 마을 금성마을을 가리키는 옛 이름입니다. 만경강 둑이 만들어지기 전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닿아 배를 묶어두어 배그매란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마을의 중앙에 자리한 느티나무는 사백여년 세월을 안고 금성산 자락 아래에서 평유 들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멀리 만경강 너머 일망무제의 바다를 바라보던 오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입니다. 가을 단풍이 든 느티나무의 모습이 마을의 수호목처럼이나 듬직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마을에서도 이 지역에 오뢔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 성씨를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제주 고씨나 두릉 두씨입니다. 두릉두씨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두 번에 걸쳐 나누어 이 땅에 이주 해 왔다고 하는데요. 마을 입구를 지키는 이 집은 고려시대에 들어온 두릉두씨 쪽이라고 합니다. 오래도록 터를 잡고 살아온 들녘에 처음 신작로가 나고 들녘이 만들어지던 때를 기억하며 대대로 햇살 좋은 집을 지켜갑니다. 윤기 있는 사철담장 안으로 몸 좋은 풍산개가 지나는 이들을 먼저 반깁니다.
길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는 이 지역의 유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경강을 통해 칩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한 요새지로서 성터가 남아 있었던 곳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는 수선화가 피던 봄날의 정원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살기 좋은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심었던 탱자나무에 깃든 사연을 소개합니다.
"길가에 탱자나무를 심었는데 옆집 할머니가 차들 다니는데 탱자나무를 길가에 심으면 차가 손상될 수 있다고, 그래서 탱자나무를 한데 모아 심었는데 그것이 재미난 모양이 되었지 뭐예요."
그 탱자나무를 보면서 어릴적 탱자나무 담장이 있던 넓은 마당집과 탱자를 따 신맛을 보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옆으로 보이는 돌탑은 졸레졸레 주인을 따라오는 강아지처럼 재미난 표정이었습니다.
동네를 한바퀴 돌다가 어느 빈집에 앉아 구름이 흘러가는 언덕과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언덕에 심기어진 나무와 시골집들의 지붕 그리고 채마밭이 어우러진 풍경이 가을햇살처럼 따스하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빈집은 오래도록 비어 있고 툇마루엔 먼지가 자욱히 내려앉았지만 토담과 툇마루에는 떠나간 사람들의 사연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 그 옆집에는 도회지로 떠났다 다시 고향 마을에 돌아와 산다는 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옛날식 예배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언덕 위의 하얀집, 교회를 지날 때면 어릴적 예배당 종소리를 듣고 교회로 향하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들녘 나지막한 언덕에 새하얀 예배당의 모습은 멀리서도 마음 깊은 곳에 풍금소리처럼 추억어린 울림을 전해줍니다. 언덕을 넘어 예배당으로 향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일찍 인터넷이 보급되었다는 문화마을이 이 마을에도 자리 잡았고 그 후로 도시 외곽에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싶은 사람들의 로망처럼 아름다운 집들이 보입니다. 파란 하늘 아래 따스한 햇살, 고요한 마을과 맑은 바람이 기분 좋은 풍경입니다.
금성리에는 유독 버드나무란 이름이 들어간 지명이 많습니다. '버들류(柳)'자가 들어간 지명인데요. 버들마을인 유동(柳洞), 안버들(內柳), 밧버들(外柳), 그리고 평유(平柳) 마을입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버드나무의 모습은 들녘 위에서 그림처럼 아득한 경계를 만들어줍니다. 금성산 자락을 둘러싼 버드나무의 풍경을 지금은 많이 볼 수 없지만 말입니다.
금성마을에서 언덕을 넘으면 보이는 금성방죽이 보입니다. 그 방죽 안쪽에 있는 마을이 방죽안마을입니다. 지금은 전원주택들이 지어지고 새로 마당을 넓혀 자손들 주차장으로 이용하는 집도 있는데요. 그 중에 빈 집이 한 채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지붕은 옛 기와지붕은 아니지만 집터를 둘러싼 주위의 풍경이 옛 고향집에 와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주는 기분 좋은 집입니다. 도시에 사는 분이 가끔씩 들른다는 집에 은행잎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전해줍니다.
가을의 끝자락, 억새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들녘을 돌아오는 길에 탁 트인 들녘에 우뚝 솟은 금성산 자락을 돌아보았습니다. 곧 찬바람이 일고 가벼워진 달력이 나부끼듯 낙엽들이 날아간 자리에 눈발이 날리는 겨울이 찾아오겠지요. 들길을 걸으며 문득 우리가 지나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11월, 가을과 겨울의 건널목에 서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