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The Water-Lily Pond). Oil on canvas. 88.3×93.1cm, 1899, 런던 네셔널 겔러리
[백내장을 앓은 후]수련 연못 위의 다리. Oil on canvas. 88.9×116.21cm, 1918~1919년▲
가득하다 못해 팽팽하게 부풀었던 8월의 여름이 고개를 넘어갔다. 얼마전 가족과 함께 경주 안압지 인근의 연못을 가게되었다. 난생처음 마주한 빽빽 수련의 장관에 평생 볼 연꽃을 다 본 듯했다. 물길의 여유없이 수련끼리만 어우러진 모습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오늘은 이러한 수련을 누구보다 애정한 화가를 소개하려한다.
사진작가 '나다르'가 찍은 '모네'(1899)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이며 인상파 양식의 창시자중 한 사람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손꼽는다.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프랑스 서북부에 있는 지방 ‘노르망디’에서 보내고, 19세에 파리로 건너와 아카데미 쉬스에서 ‘카미유 피사로’를 만났다. 스튜디오에서 공부를 하며 르누아르, 바지유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카미유 피사로’는 훗날 그의 뮤즈가 된다. 1870년 결혼 후 이어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가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하게된다.
1873년 이곳에서 무명의 예술가 협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듬해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에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다. 이곳에서 ‘인상주의’란 말을 처음 사용하며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아르장퇴유’에서의 시기는 그에게 격동기였을듯하다. 그림의 방향을 잡는과 동시에 가족 안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아내 ‘카미유 피사로’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 때 미술 수집가였던 한 부부를 만나서 작품을 의뢰 받고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이 부부는 모네의 후원자가 되었는데, 경기 불황으로 인한 파산에 봉착하며 남편은 가족을 버리고 도주하게 된다. 그의 아내 ‘앨리스 오슈데’는 여섯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방황하던 끝에 모네의 부부와 같이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모네에게 아주 특별한 인연이 된다.
모네의 아내 카미유는 둘째 아들을 출산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 아내의 임종 모습을 그리며 마지막 사랑의 마음을 붓 끝에 담게 된다. 이후 앨리스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며 1892년 앨리스의 남편의 사망후 재혼을 하였다. 1883년에는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로 옮겨서 삶을 마감하기까지 이곳에 머문다.
‘지베르니’에서의 삶은 끊없는 창작의 시간이였다. 노안과 함께 그의 나이 70세이후 심한 백내장을 앓음으로 그의 작품은 거칠어진 붓의 터치, 붉고 강렬한 색감, 추상화에 가까운 일그러진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림에는 그가 의도하지 않은 공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첫 아내의 임종을 보고 , 둘째 아들도 교통사고로 보내고, 둘째 부인도 병으로 보냈으며, 자신도 병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순간들의 고통과 두려움이 엄습 할 때마다 캔버스앞에 붓을 들게 하는 집념은 어떤 것이였을까. 자신과의 정면싸움 같은 이 위협적 요소앞에서 화폭에 그림을 그렸을 모네의 모습은 마치 적진 앞으로 진격하는 용사같이 느껴진다.
모네에게 ‘수련’ 그림 시리즈는 유명하나 단지 유명하기 때문에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화가의 삶 전체를 두쪽에 담아내기 어렵지만, ‘수련’연작은 모네의 삶 전체를 대변하기에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모네는 생전에 성공을 거둔 화가이다. 그림이 인기가 많아서 잘 팔리기도 하였고, 말년에 ‘수련’에 따른 연작은 250여점이 된다고 한다.
그는 수익금으로 ‘지베르니’에 큰 집을 지었고, 물길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대형 정원을 완성했다. 다수의 정원사를 두고 조경을 가꾸며 특히나 일본화에 관심이 있던터라 일본식 다리를 짓고 그곳에서 수련을 가져와 연못을 만들었다.
수련에 대한 작품이 많은 만큼 정확한 정보들은 어렵지만 자장 대표할 만한 작품은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