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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구의 독서칼럼: 책과 사람 그리고 세상 이야기 – 한강 ‘채식주의자’
글 : 공종구 / kong@kun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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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1935-2023)는 자신을 소설가로 만든 첫 자극제를 묻는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경험했던 낚시터에서의 에피소드를 말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나는 우리들의 육체가 어떤 식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하루는 낚시를 따라간 적이 있는데,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바동거리더군요. 그런데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아니 소리를 지르지 않았어요. 어린 나는 생각했어요. 얼마나 아팠으면 소리도 지르지 않았을까! 그게 나를 소설가로 만든 첫 자극제였어요. 결국 나는 물고기의 고통을 반영하고자 작가가 된 셈이죠. 이제 와서 나는 내가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가 되었다고 느끼며......”(사비 아옌⸱킴 만레사, 정창 번역. <16인의 반란자들>. 스테이지팩토리, 2011. 47면)

 

흔히들 작가는 두 번의 생을 사는 존재들이라고 한다. 한 번의 자신의 삶을 살고, 다른 한 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산다고 한다. 이때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산다고 하는 진술의 참뜻은 무엇인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아니 말을 해도 힘이 없어 일방적으로 무시당하고 들어주지 않는, 그리하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하거나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의 한과 슬픔, 고통이나 분노를 대신 말해주는 존재가 바로 작가다라는 뜻이다. 오에 겐자부로를 소설가로 나서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동인도 낚시 미늘에 매달려 생사를 오가는 절박한 명재경각의 처지에 빠져 공포에 찬 처연한 눈빛과 함께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도 아프다고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못하는 물고기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전해주고자 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이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문단에서, 말 못하는 물고기의 고통을 대신 말해줄 정도로 폭력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벼린 작가는 누구일까? 한마디로 타자의 상상력과 공감의 감수성을 존재론적 본질로 하는 작가의 정체성에 가장 부합하는 작가가 누구일까? 한강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강에게 폭력은 서사의 원천이자 화두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폭력(暴力, violence)하면 물리적인 폭력만을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국가폭력, 가정 폭력, 아동 폭력, 군대 폭력, 교제 폭력, 성 폭력, 학교 폭력, 젠더 폭력, 사이버 폭력, 지적 폭력 등등. 폭력의 유형과 층위는 너무나도 다양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은 자신의 우월적인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조정⸱통제⸱지배하려 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려 드는 언어적⸱신체적⸱물리적⸱정서적⸱감정적인 행위 일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력의 정의에 충실할 경우 폭력의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게다가 최근 들어 우리 사회의 인권이 신장되고 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폭력의 개념적 외연과 내포 또한 자연스레 확장되고 심화되면서 과거의 관행과 관성으로 인한 인지 부조화와 충돌하여 발생하는 문제가 적지 않다. 사소한 말 한마디나 부주의한 행동 하나가 빌미나 언턱거리가 되어 곤욕을 치르거나 그 시비곡직을 가리기 위해 법정에 서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비화되는 것도, 심지어는 평생 공들여 쌓아올린 성취나 명예가 하루아침에 허망한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도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아무튼 타자와의 관계 맺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누가 되었든지간에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느 누구도 폭력의 가해자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세상이다. 따지고 보면 동서고금의 인류 역사 자체가 폭력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크고 작은 전쟁이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던 것도 동서고금의 인류 역사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폭력의 문제를 근원에서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연작 소설집이다. 구체적으로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까지 썼던 3편의 중편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이어달리기 형식으로 한자리에 모아놓은 연작 장편이다. 이 세 편의 중편을 관통하면서 사사의 핵심으로 기능하는 화두는 ‘폭력’의 문제이다.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연결고리로 이 세 작품을 이어주는 ‘중핵 사건’(kernel event)은 영혜의 ‘비건’이다. 먼저 이 연작 장편의 들머리에 놓인 「채식주의자」의 초점 인물로 기능하는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꾼 후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만을 고집하는 비건을 실천하고자 한다. 이후 영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육식, 더 정확하게는 모든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나아가 구두를 비롯한 자신의 모든 가죽 제품을 버린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가족들 위에 폭군처럼 군림하는 가부장의 전형을 체화한 인물인 아버지의 폭력에 이르러 파국에 도달한다. 

 

‘나’의 처형(영혜 언니) 집들이 모임에서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는”(38면) 아버지는 육식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영혜에게 마초의 용맹과 결기를 과시라도 하듯 강제로 고깃덩어리를 먹이려다 뜻을 관철하지 못하자 폭력을 행사한다. 그에 대한 저항으로 영혜는 손목을 자해하고 병원에 실려간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영혜는 왜 육식, 더 정확하게 말해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거부하는가? 자신의 수명이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살생하는 약육강식의 착취와 약탈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서사를 추동하는 발화점이 영혜의 신경증적 강박 수준의 채식이었다면 「몽고반점」에서의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영혜 엉덩이의 ‘몽고반점’이다. 이 작품의 초점인물로 기능하는 영혜의 형부 ‘그’는 비디오 아티스트이다. 2년 가까이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별다른 진전이 없는 창작의 모티프를 찾기 위해 그는 무용 공연 관람도 하는 등 갖은 노력을 시도해 보지만 지지부진한 상태는 계속되기만 한다. 그로 인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의 침체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온다. 그것은 생뚱맞게도 처제 영혜의 몽고반점이다. “그가 처제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히 아내에게서 몽고반점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의 몸은 뜨거워졌다.......그녀의 한번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 투명한 빛을 발했다”(87면)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어느날 아들 지우의 목욕을 시키다 여동생 영혜의 엉덩이에도 아직 몽고반점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서부터 그의 내면은 격랑에 휩싸이고 고압에 감전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상황은 질풍노도의 기세로 진전되어 급기야 처제 영혜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넣은 바디 페인팅과 함께 교합하는 비디오 아트 작품을 완성한다. 그리고 도덕적 금기를 훌쩍 뛰어넘는 그 비디오 아트는 결국 그를 파멸로 치닫게 만드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한다. 동생이 걱정되어 음식을 준비하여 방문한 아내에게 실체가 드러난 그 비디오 아트는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악몽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몽고반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영혜에게 채식이 그랬던 것과 같은 신경증적 강박 수준에서 몽고반점에 치명적인 매혹을 느끼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처제와의 성적인 합일을 시도할 정도로 강렬한 정념과 욕망에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한마디로 그에게 몽고반점은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78면)을 느껴지게 할 정도로 인위적인 문명의 침탈이 거세된 원시적 순수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세계이자 원초적 자연의 에너지가 약동하는 대상이다. 고압의 전류가 흐르던 격랑에 휩싸이며 전개되던 서사의 흐름은 세 편의 연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나무 불꽃」에 이르러 평온을 회복한다. 서울 외곽의 정신병동에 입원해서도 동물성 단백질 섭취는 물론 모든 음식 섭취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한편 나무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영혜를 서울의 더 큰 정신병원으로 전원하는 것으로 서사는 종결되기 때문이다.   

 

영혜가 비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아가 왜 모든 음식 섭취를 거부하며 죽어가면서 햇빛만 받으며 살아가는 나무로 태어나고자 하는가? 또한 영혜의 형부는 왜 그렇게 몽고반점에 강박적으로 몰입하는가? 더불어 강렬한 색상의 꽃에 그렇게도 집착하는가? 그것은 비건이나 꽃과 나무는 궁극적으로 타자의 생명에 기생하는 일도, 타자의 생명을 착취하거나 약탈하는 일도 없는 식물 계열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타자의 생명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폭력에 저항하고자 했던 두 사람은 결국 이혼을 당하는 한편 형부는 자발적인 추방의 삶을 선택하고 영혜는 정신병원에 유폐당한다. 이러한 서사 설정을 통해서 작가 한강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들은 과연 폭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이 글을 매조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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