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배수정의 미술칼럼 - ‘에곤 실레’ 포장지를 벗겨낸 자아를 바라보다.
글 : 배수정 / jlmjlm710@naver.com
2024.08.23 16:01:3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에곤 실레, 죽음과 여인,Oil On Canvas, 180×150.5cm, 1915, 빈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

 

오늘의 주인공 에곤실레1890년 오스트리아 작은 마을 투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도역장이며 평범한 중산층의 화목한 가정이였다.

아버지 직업의 연관성과 철도 가까이 살며 기차에 대한 애정으로 기차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위 작품은 1910년대 왕성한 활동으로 성공기를 걸쳐 현대에 주목받고 있는 대표작 죽음과 여인이다. 작품속의 여인은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로 추정된다. 에곤 실레의 모델을 하게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 되었지만 발리와는 4년이라는 시간 동거를 끝으로 결국 이별에 이르게 된다.

 

실레는 제목에서 죽음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남녀 사이에서 관계의 죽음을 실제 죽음이라는 은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고 한다. , 여라는 단순한 대립적인 구도를 넘어서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라는 구도를 이러한 방법으로 대립 시킨 것이다.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누드화에 대한 것이다. 특히나 대부분 누드화에서 나오는 표정들은 공허하고 초점없는 눈빛을 하고 있으며, 앙상한 알몸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었다.

이렇듯 그는 왜 누드에 집착 하게 되었을까. 그것을 알려면 역시 과거의 배경을 따라가야만 한다.

 

실레의 자화상, 1910년

 

 

서두에 말했듯 어린시절은 단란하고 평범한 가정이였다. 그러나 다가올 시련은 그의 작품에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실레가 지내던 비엔나는 성에 대해 관대한 이중적인 도시였다. 많은 수가 매춘을 하고 있었고, 매독에 걸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실레의 아버지역시 매독에 걸렸다. 병이 심해지고 직장까지 잃었다. 가계가 기울던 어느날 아버지의 정신병적 발작으로 인해 집에 있던 주식과 채권을 모두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905년 그의 나이 15세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었슴에도 그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봤던 성병에 대하여 그때부터 성에 집착하며 자신만의 성적 시점을 갖게 되었고 그가 그려내는 수많은 누드화에 영향을 주게된다.

또한 혹자는 그의 누드화가 당시 비엔나의 성적 문화에 대한 이중성을 고발한다고도 평가한다.

 


 

어린시절 집안 사정은 어려웠지만 그는 그림에 대한 천재성을 인정받고 16세라는 나이에 빈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초기에 그린 그림은 실레의 특징적인 부분이 나타나지는 않았었다.

이후 빈아카데미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그곳은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보수적인 학교였기 때문이였다. 색채에 관한것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꼬박 3년동안 데셍만 해야하는 학교의 보수적 교육과 맞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교수와의 트러블까지 생기며 학교를 중도 하차하게 된다.

 

당시 보수적성향의 예술(1897년 퀸스틀러하우스)에 불만을 갖고 그곳을 탈퇴한 예술가들이 결성한 빈 분리파라는 모임이 있었다. 이곳은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곳이였으며, 그곳의 초대 회장은 지난달 칼럼에 소개한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학교를 하차한 실레는 클림트를 만나기 위해 빈 분리파건물을 배회했다. 실레의 나이가 17살이 되던때 드디어 클림트와 만나게 되었고, 당시 클림트의 나이는 45세였다.

클림트는 실레가 보여준 그림을 보며 한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 보았고, 스승으로 맞으려는 실레에게 너는 이미 나보다 뛰어나다.”,“너는 나와 사제지간이 아니라 동지로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빈 분리파에서 동지로써의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 실레는 아틀리에 지역 근교의 하름스 가의 에디트라는 여인에게 관심을 보였다에디트는 중산 계급의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다그는 앞서 말한 4년간 함께한 발리와 결별하고 에디트와 결혼을 했다.

에디트와의 결혼 후 실레는 작품은 안정적이였다.

평소와 다른 색채와 선, 인물의 표정이 이를 말해준다. ‘가족은 이 시기에 그려진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아이러니 하게도 아래 그려진 아이는 아직 아내 에디트가 잉태중일때 그린 것이다.

그러나 불운이 시작 된다. 그당시 스페인 독감이 창궐하여 많은이를 죽음으로 몰아갈때였는데, 결국 그는 작품 속의 아이를 만나지 못한채 임신한 아내를 독감으로 먼저 보낸다. 3일뒤 1918, 28살에 실레역시 같은 질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가족, 1919년

 

 

실레는 자기애가 강한듯하다. 거울속 자신의 모습들을 살피며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고, 본인의 누드를 보며 이런말을 했다. ‘인간의 본질은 옷을 입은 모습이 아니라 나약한 육체에 인간의 본질이 들어있다.’

그는 누드 자화상을 통해 그림 속에서 아름다움을 부각 시키기보다 포장지를 벗겨낸 앙상한 실체를 표현함으로 당시에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또한 누드화 그림들은 포르노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실레는 자아에 대한 실체적인 접근을 하려고 했다.

한때 미성년자를 모델로 그렸고, 외설적 그림을 미성년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뒀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일부 혐의를 받으며 3주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옥에 있는 동안에도 그림을 멈추지 않으며 나는 나의 예술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서 이 고통을 견딜 것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단란한 가족의 평화를 깨뜨린 당시 오스트리아의 성병 매독은 한 예술가의 성장기를 뒤흔들며 천재의 자아에 대한 촉매제가 되었다. 그는 작품과 마주하며 인간의 실존’,‘죽음에 대한 공포’,‘성에 대한 욕망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괴기스러울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림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말하는 에곤실레는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 했던 것 같다.

오늘 그의 그림 안에서 숨겨둔 나를 만난다.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