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공종구의 독서칼럼: 책과 사람 그리고 세상 이야기 - 김서영 <내 그림자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꿈 일기>
글 : 공종구 / kong@kunsan.ac.kr
2024.07.26 16:26:0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무엇보다 지금 현재,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기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칼 마르크스(1818-1883). 서구의 근대 지성사에서 ‘위대한 지성’ 3인(G3: Great 3)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다. 이 세 사람이 위대한 지성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페르니크스적 대전환을 통해 인간 존재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이전까지의 지배적인 통념이나 상식에 혁명적인 균열과 해체를 감행한 용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 이전에 감정(몸)은 이성(정신)에 비해, 물질은 정신에 비해, 그리고 무의식은 의식에 비해 어둡고도 병적인 영역이자 천박하고도 깊이가 없는 세계로 폄훼당해 왔다. 또한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도전하는 반체제적인 불온한 세력으로 내몰리는 천더기 신세를 면치 못해 왔다. 한마디로 이들 영역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위험한 타자’로 박해와 추방의 위협에 늘상 시달려왔다. 하여 이들 영역들은 위대한 지성 세 사람의 우상 파괴적인 도전과 모험 이전까지는 행랑채의 서자 설움을 곱다시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 말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 감정과 물질,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는 이 세 사람의 용기에 힘입어 인간존재와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혁명적인 프레임으로 등장한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책은 프로이트와 그의 옹골찬 적자임을 자부하는 자크 라캉(1901-1981) 정신분석 이론의 대중화에 공을 들이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김서영의 <내 그림자에 빚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꿈 이론에 기대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 책에서 분석 대상으로 소환되고 있는 텍스트는 2004년부터 2023년까지 기록한 자신의 ‘꿈 일기’이다. 이러한 꿈 일기 분석 작업을 통해 김서영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온전한 자신의 삶, 니체가 말한바 주인 도덕에 기초한 ‘금발의 야수’로 표상되는 귀족적 정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현재에 충실한 ‘건강한 개인주의자’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밖에 모르는 영악⸱얍삽한 이기주의자의 삶을 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배려나 의식,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에 대한 자책이나 회한,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저당잡혀 자신의 온전한 삶을 망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꿈의 분석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이 늘상 꾸는 꿈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조건인 내 인생의 주인의 삶을 사는 데 발목을 잡는 훼방꾼 노릇을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 자신이 직면한 문제 또는 대면하는 게 두렵거나 무서워서 회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 무엇인지 나아가 그 해법에 대한 암시 등을  드러내주는 징후적인 증상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도대체 꿈이 구체적으로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길래 우리들의 삶과 실존에 그렇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 질문에 결정적인 키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무의식’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서 ‘무의식’은 키워드로 기능한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리고 단순화의 혐의를 무릅쓰고서 압축하자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에서 시작해서 무의식으로 끝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러한 무의식의 본질은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억압’( repression)이다. 무의식의 본질이 억압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리고 어떤 것들이 억압되고 또 어떤 이유 때문에 억압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실마리는,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릴 정도로 유명한 명제인, ‘의식은 무의식이라고 하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프로이트의 진술이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행동,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것은 의식세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러한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자 기만이다. 프로이트의 통찰에 의하면 우리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조정하는 것은 의식세계 아래에 거대한 심연으로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욕망이나 행동을 조정하고 결정하는 주인공이라 생각했던 의식세계가 실은 무의식 세계의 충직한 하수인이자 시종 또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욕망이나 생각들이 무의식 아래 억압되고 또 어떤 이유 때문에 억압되는가? 

 

대체로 무의식에 억압되는 욕망이나 생각은 기존의 윤리나 도덕, 규범이나 관습, 법률 등과 같은 상징적인 규범 체계가 수용하거나 용인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지탱하던 근간이 붕괴되거나 해체되면서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윤리 도덕이나 규범이나 법률을 만드는 이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저런 사회⸱문화적 금기 체계에 의해 무의식에 억압당한 욕망이나 생각 등은 완전히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멸되거나 사라지기에는 무의식의 욕망이나 감정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근원적이다. 따라서 그러한 욕망이나 감정을 적절하게 해소하거나 관리하지 않고 계속 억압할 경우 몸과 마음에 탈이 나고 병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무의식의 욕망이나 감정이 끊임없이 의식세계 바깥으로의 외출이나 탈출을 꿈꿀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험한 타자’로서의 무의식의 욕망이나 감정은 날 것 형태 그대로 외출이나 탈출을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타협’이다. 타협의 과정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은 그 원형이 변형될 수밖에 없다. 타협의 과정에서 지불해야만 하는 수업료인 ‘압축’(compression)과 ‘전이’(transference)를 통한 상징적인 변형이나 가공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무의식의 욕망이나 생각의 원형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의 작업 공정은 이렇게 의식세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위치는 뒤바뀌고 모양은 뒤틀린 무의식의 원형을 ‘재구’(reconstruction)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다림질과 마름질을 통해 곧게 펴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일이다. 의식세계 바깥에 드러난 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무의식의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유이다. 의식 세계 바깥에 드러난 형태나 모습은 무의식의 실체에 대한 징후나 증상일 뿐 진정한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해석과 분석 작업에는 심층적인 독해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억압된 욕망이나 감정이 의식세계 바깥으로 나가는 네 가지 중요한 통로로 ‘꿈’, ‘문학⸱예술작품’, ‘농담’, ‘실수’를 든다. 프로이트의 이 생각에 의하면 ‘언중유골’이라는 말처럼 농담은 단순히 농담이 아닌 것이다. 실수 또한 단순한 실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문학⸱예술 작품 또한 단순한 심미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당대 사회 구성원들의 억압된 집단 무의식을 투사한 것이다. 이  네 가지 통로들 가운데 프로이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꿈’이다. 

 

우리들이 거의 매일 밤마다 꾸는 꿈의 논리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통찰에 의하면 우리 눈에 꿈이 그런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들이 꿈의 고유한 논리와 문법을 해독하거나 분석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꿈은 우리들의 무의식 아래 억압되어 있으면서 틈만 나면 의식의 검열을 뚫고서 바깥으로 나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욕망이나 생각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무의식의 억압이 문제인 것은 이것을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몸은 병들고 마음은 멍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하고 싶은데 외부의 간섭이나 압력에 의해 못하고 참다 보면 마음에 울화가 쌓여 결국은 병으로 진행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치이다. 우리들이 속된 표현으로 자주 사용하곤 하는, ‘아! 정말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현은 그러한 맥락에서 결코 단순하지가 않은 표현이다.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정신분석적 꿈 분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김서영의 권고를 적바림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매조지고자 한다. “꿈 분석은 심각한 과정이다. 꿈이, 내 안에서 늘 나를 좌지우지하는 콤플렉스를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꿈을 분석하는 건 해볼 만한 과정이지만, 사실 제일 어려운 건 용기를 내는 일이다.”(23면) “용기 있는 사람만이 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꿈이 보여주는 마음 속 폐허를 대면할 때, 비로소 꿈은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이제 꿈은 내게 필요한 인물들을 보여주고, 내가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말해 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조언한다..... 정신분석적 꿈 분석은 한 사람의 콤플렉스를 풀어내고. 익숙한 습관들을 바꾸고, 태도를 수정하며 변신이 가능한 미래로 이끈다.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더 건강한 삶, 더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306-315면) ​ 

공종구님 기사 더보기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