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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의사, 미술 심리 상담사 이봉순(혜지) 씨를 만나다
글 : 이소암 / isa6246@hanmail.net
2024.06.19 15:01:2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ㅊ암을 비롯하여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심지어 조현병 등등. 그렇다면 누가 이 병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의사만 이 병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아니다. 여러 방면의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상담과 그림을 통해 누군가의 병을 낫게 한다면 분명 그는 치유사요. 또 다른 의사인 것이다. 여기 미술 심리 상담사 이봉순(혜지)이 그다.

 

가족들과

 

 

어둠 속에서 어머니라는 빛이 이끌다

 

그는 전라북도 익산군 성당면 성당리에서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인자하고 온화하신 분으로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화목했던 가정에 청천벽력이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잃은 것, 훗날 장남이었던 오빠를 뇌출혈로 잃은 것이 그것이다.

“어머니 나이 서른셋, 오빠가 아홉 살, 제가 여섯 살, 네 살, 두 살, 한 살. 어린 동생들을 남기고 아버지는 병으로 하늘나라에 가시고 저희들의 삶은 고단한 삶이 되었지요.” 

그의 어머니는 5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행상을 하시고 그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어린 가장이 되었다. 

“학교 다녀와서 동생들을 씻기고, 밥을 먹이고, 업어서 재우고. 밤늦게 돌아오신 엄마는 힘든 줄 모르고 집안일을 하셨지요. 청상과부이신 엄마는 늘 하던 말씀이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 너희들이 바르게만 자라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런 어머니는 어버이날 때 저희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세상은 거친 바람 속, 그러나 그 속에 길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시골에는 더 이상 할 게 없으니 도시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그 도시가 익산이에요. 지금은 익산이지만 그 당시는 이리였지요. 이리시에 조그만 방을 얻어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지요. 오빠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어머니는 보험회사에 들어가고 오빠 졸업할 때까지만 같이 고생하자면서 저는 이리공단 산업체 회사에 들어가서 주·야간 열심히 일했지요. 중학교를 검정고시로 합격한 뒤 야간 일이 너무 힘들어 퇴직하고 퇴직금으로 간호조무사 학원에 들어갔어요. 1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간호조무사 합격증으로 부여 성요셉병원에 스카웃이 되었어요. 어머니 도우랴, 동생들 가르치랴,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저는 공부에 한이 맺혔었지요. 성요셉병원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 전주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간호과장님은 근무표를 조절해주셨고 야간 근무 때는 수업내용을 녹음해 주셨어요. 제 인생에 길을 놓아주신 참 고마운 분이죠.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겼어요. 지금은 요양병원이지만 그 당시는 준 종합 병원인 논산백제병원 정형외과 병동으로 이직하여 병원 기숙사에 들어가 성실하게 병원 생활을 했어요.”

 


 

배움에 대한 ‘타는 목마름’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자라온 그는 결혼에 대한 조건이 있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가족이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목사님 사모님이 남편을 소개해 주셨어요. 그 사람을 만났는데 첫 만남부터 아버지처럼 푸근하고 든든하여 마치 커다란 느티나무 같은 좋은 느낌을 받아 결혼을 하였어요. 남편 가족이 모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특히 시어머님이 교회 권사님이라는 말에 더 호감이 갔지요.” 

그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고 남편 내조하면서 교회생활, 취미생활 잘하고 있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는 배움에 대한 미련이 떠나지를 않았다.

“어느 날 남편에게 소원이 있다고, 그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어요. 큰 아이가 초등학교 가는 날 저도 대학교에 가겠다고요. 남편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어요. 늦깎이 대학생이라 책을 들고 교내로 들어서면 교수님인 줄 알고 인사하는 학생들도 있었어요.”

 

간절함을 이기는 것은 없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그는 유·아동 미술학원을 개원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미술학원은 좋은 소문이 나면서 학생들도 늘어나고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호시절을 보내던 중 학원장 앞으로 공문을 하나 받게 되었어요. 전주 모 구청 강당에서 열리는 세미나인데 미술치료세미나 공문이었어요. 저는 곧바로 신청하고 그날 전주로 달려가 미술치료를 만나게 되었지요. 미술치료 박사님의 세미나를 들으면서 전율이 일어났어요. 내가 아이들을 잘 가르친 것이 아니라 미술이라는 활동 속에는 치료적인 속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런 그는 학사로는 부족해서 군산대 교육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2004년 군산 최초로 군산미술심리치료연구소를 개원하여 많은 어린이, 청소년, 성인, 노인까지 치료 상담을 했다. 치료센터를 운영하면서 전북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기억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오래전에 유수한 대학을 힘들여 합격했으나 한 학기도 못 마치고 자퇴 후 고향에 내려와 두문불출하는 우울증 여학생이 있었어요. 상담으로 치유되고 직장 생활까지 하게 되어 상담은 종료되었습니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병원 의사들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담선생님도 사람을 살리는 아주 훌륭한 직업이라고 하셨을 때, 이 직업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이 가장 컸어요.”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화뿐이다’

 

그는 2019년 아트앤하모니(사진)라는 간판을 새롭게 내세웠다.

“이곳 저의 상담센터 아트앤하모니가 지역 사회에 귀감이 되고, 이곳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치유되고 희망을 찾아갈 수 있는 기관으로 우뚝 섰으면 해요. 그리고 후학들을 위하여 전문 교재를 집필하는 거예요. 머릿속에 계획은 있지만 늘 바쁘다는 핑계로 실행하기가 어렵네요. 아마 저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인데 곧 실현되겠지요.”

  

열정의 날개로 추는 멋진 生의 춤

 

“제 인생을 뒤돌아볼 때, 참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온 열정적인 삶이었어요.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요. 하늘이 부르는 그 순간까지 지금 하고 있는 일, 즉 가르치고 봉사하고 상담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다음에 나를 아는 사람들이 ‘그녀는 쉼 없는 열정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친 멋진 사람이었다’라고 기억되고 싶습니다.”

 

미술심리상담센터 아트앤하모니는 은파호수 부근에 있다. 호수가 아름다워서일까. 누군가의 얼룩진 마음을 어루만져 줄 또 다른 의사, 그의 미소가 유난히 곱다.

 

*아트앤하모니-군산미술심리치료연구소

군산시 계산2길 8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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