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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구의 독서칼럼: 책과 사람 그리고 세상 이야기 - 누구랄 것 없이 한 때는, 그리고 언젠가는 ‘돌봄’
글 : 공종구 / kong@kunsan.ac.kr
2024.06.19 14:36:5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공종구의 독서칼럼: 책과 사람 그리고 세상 이야기

이주혜. <자두>. 창비, 2020.

 

현재 한국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협하는 요인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일까?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 절벽’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인구 문제는 외국에서조차도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을 향해 치닫고 있다. 중앙 정부나 지방정부에서는 매년 적지 않은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대책을 마련하고는 있지만 뚜렷한 개선의 조짐이나 징후는 보이지 않아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현재 한국사회는 머지않아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아 걱정인 저출산 고령화 문제와 연동되어 최근 한국사회의 심각한 쟁점이나 갈등의 불씨로 떠오르는 문제가 바로 ‘간병’과 ‘돌봄’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주혜의 <자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간병과 돌봄은 서사의 핵심으로 소환되면서 가부장제의 억압과 폭력을 심문하고자 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모티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서술자로 등장하는 일인칭 화자 ‘나’는 9년 차 프리랜서 출판 번역자로 일하는 여성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간병과 돌봄 노동을 통해 가부장제의 억압과 폭력을 심문하고자 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인물로 기능한다. 그 계기는 시아버지가 담도암으로 세 번째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상황이다. 처음에 나는 남편 세진과 주야로 번갈아가며 간병을 맡는다. 하지만 입원 1주일째 되던 날부터 시아버지가 심각한 수준의 불면과 함께 하체 근력이 소실되면서 대소변 수발까지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결국 간병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루에 8만원의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는 경제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간병인의 도움은 나에 대한 시아버지의 무의식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진과 함께 처음 인사드리러 갔을 때 시아버지는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26면)라는 달달한 멘트의 환대를 선사한다. 그리고 결혼 즈음에는 ‘이제 너를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대할 것이다’(27)라는 배려 가득한 살가운 환대를 통해 나의 긴장과 불안을 덜어준다. 더구나 ‘길을 걷다 즉흥적으로 가게에 들어가 반짝이는 큐빅이 잔뜩 박힌 머리핀을 사서 직접 머리에 꽃아주거나 가판대에서 꽃무늬 스카프를 사서 목에 둘러주는’ 등(26-27면) 나이나 관계와 걸맞지 않을 정도의 파격적인 ‘로맨틱 가이’의 모습으로 나를 감격하게 하거나 놀라게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시아버지는 결혼식에 참석했던 나의 친구로부터 ‘로매스그레이의 현신’(28면)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게(회귀) 되어 있는 법’. 그리고 진실 또한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 입원 기간 발작적으로 반복되는 시아버지의 섬망은 그동안의 그러한 환대나 배려가 위선이나 허위 또는 통치술이었음이 밝혀지는 계기로 작용한다.

 

작가의 문제의식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섬망은 시아버지의 무의식 깊숙한 심연 아래 들킬세라 꽁꽁 감추며 억압해두었던 불편하면서도 솔직한 욕망, 그러니까 상징계의 외설적 이면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배운 거 없이 맨손으로 상경해 산전수전 겪으며 겨우 집 한칸 장만하고 폭삭 늙어버린’(81면) 시아버지 안병일에게 박사학위 소지자에다 다들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는 세진은 단순한 아들(son)이 아니고 ‘빛이고 태양(sun)’이다(81면). 적수공권의 간난신고 끝에 세진을 박사 학위까지 가르친 보상 심리로 인해서인지 섬망을 통해 드러나는 시아버지의 욕망은 주로 물질적인 것에 집중된다. ‘우리 세진이 뒤를 따라 겨우 수박 한통 들고 온 아이. 반짝이는 내 태양을 가로챈 아이. 내게서 세진이를 빼앗아간 아이. 저 도둑년.’(84면), ‘저 애가 무슨 고생이 많아? 우리 집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이 저 애다!....저 애가 우리 집에 시집와서 지금껏 뭐 한 일이 있나? 박사님과 결혼하면서 열쇠 세 개를 해왔나? 애를 낳았나? 저 애 때문에 우리 집 귀한 손이 끊겼다.’(100면)   

 

그 동안의 시아버지와 모습과는 크레바스의 단층과도 같은, ‘정확하게 자신을 겨누고 찔러 들어오는’(101면) 시아버지의 섬망을 듣던 병실 현장에서 나는 ‘입가가 파르르 떨릴’(101면) 정도로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그 자리에서 당연히 구원자 역할을 기대했던, 아니 해야만 했던 세진은 그러나 나의 그 간절한 기대를 저버린다. 대신 눈을 질끈 감아 그 상황을 애써 외면해버린다. 기지와 순발력을 발휘하여 그 상황을 간신히 수습하는 역할을 해주는 사람은 오히려 가족의 울타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직 사무적인 관계로만 엮인 간병인 영옥씨이다. 그러한 우여곡절이 반복되다 다행히 시아버지는 병세가 호전되어 입원 한 달만에 퇴원한다. 퇴원 이후 시아버지가 입원해서 간병을 하던 그 여름 한 달을 ‘시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했고, 세진을 기억을 지우고 싶어했지만, 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114면)고 다짐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더욱이 발인 하루 전 빈소에서 문상을 온, 나와는 생면부지의 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세진의 육촌 형의 물색없는 참견은 세진과 이혼하게 되는 결정적인 파국의 계기가 된다. 

 

세진의 육촌 형은 친척으로서의 도리와 의무감 때문에 문상을 왔을 것이다. 따라서 육촌 간의 그 거리에 걸맞은 의례적인 덕담이나 애도의 조문 정도를 건네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적절한 처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지랖 넓게도 세진의 육촌 형은 (꼴값을 떠느라고)그 선을 훌쩍 넘어버린다. 육촌 형은 시아버지의 입원 당시 대학병원에서 직장인처럼 오전 아홉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병실을 지키며’(26면)간병하다, 퇴근하는 남편 세진과 교대하고 귀가해서는 집안일과 밀린 번역 작업에 매달리는 고단한 일상을 반복하는 처지의 그녀에 대한 의례적인 위로와 덕담 한 마디 없다. 당연히 그러한 구체적인 전후사정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그랬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 당숙, 평생 세진이 하나 보고 산 분이에요. 그러니 제수씨가 아무리 요즘 사람이라고 해도, 당숙을 모시고 살았다면, 우리 당숙 이리 허망하게 가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우리는 좀 안타깝게 생각해요’(117면)라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육촌 형으로서의 체면치레를 한답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심상하게 해버린다.(꼴깞을 떨어요. 꼴깞을) 설상가상,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세진은 나의 입장을 변호해주기는커녕 오열하면서 자신을 자책한다. 

 

그 자리에서 나는 세진의 육촌 형이 말하는 ‘우리’ 안의 울타리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 이질적인 타자라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한다.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몇 달 뒤 봄에 나는 세진과 이혼한다. 이혼 후 나는 충동적으로 북해도 여행을 떠난다. 신혼 여행지였던 북해도에서 세진과의 좋았던 추억을 반추하는 한편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간병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는 영옥씨에게 ‘영옥씨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133면)’라는 문장이 전부인 감사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이 작품의 서사는 마감한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하면서 자연스레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플랜 75>를 소환하게 된다.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국가가 ‘안락사 적극 지원 정책’을 시행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상호텍스트적 맥락에서 이 작품과 가족 친족성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75세 이상의 노인을 잉여의 대상으로 다루는 이 영화에서의 상황이나 현실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웃나라 일본만의 문제일까?라는,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질문을 던져본다. 더불어 현재 시장과 가족의 역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갈수록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발전할 징후가 농후한 간병과 돌봄 서비스의 바람직한 공공성의 모델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는 질문도 던져본다. 

 

얼마 전 침을 맞으러 들른 한의원에서 목격한 풍경 하나를 적바림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매조지고자 한다. 딸로 짐작되는 젊은 여성이 침을 맞고 나온 어머니의 신발을 정성스레 신겨준다. 그때 에피파니의 섬광처럼 휙 스쳐지나가는 생각 하나. 추론컨대, 3-40년 점에는 그 역할이 거울상처럼 완전 반대였지 않았을까. 그 어머니가 딸의 신발을 정성스레 신겨주는 역할. 그렇다 우리 모두는 생로병사의 인생 서사 한 구간에서 누군가의 돌봄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돌봄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먹고 자고 입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구라 할 것 없이 질병이나 노화 또는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로 인한 장애로 인해 돌봄을 받아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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